194. Guilty(2)
세빈은 방에 틀어박혀 아직 한 글자도 적히지 못한 노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형들이 만든 곡에 자신이 말했던 이름이 붙었다.
그것만으로도 세빈은 심장이 세차게 뛰어서 어쩔 줄 몰랐는데 단 한 줄이라도 좋으니 마음이 들어갔으면 한다고 했다.
이렇게 형들이 믿어주고 있는데 다시 못한다고 투정 부릴 수는 없었다. 무어라도 해내야 했다.
“으으으!”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작업에 머리에는 쥐가 날 것 같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고, 애꿎은 베개를 뭉개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세빈은 자신은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은 못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디테일한 그림을 아주 많이 그리는 타입이었다.
평소에 춤을 출 때도 그랬다. 소소하고 작은 동작을 굉장히 많이 만들고 그 동작을 퍼즐처럼 이리저리 끼워 하나의 큰 그림을 만들었다.
그래서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자 했다.
자신은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디테일한 세부 묘사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손에 쥔 볼펜을 단단히 잡고 침대에 엎드려 생각나는 단어들을 주르륵 적기 시작했다.
‘우주, 외로움, 원망, 제자리, 거리….’
그렇게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 그리고 완성된 우리의 곡을 들었을 때 느낀 마음들을 단어로 계속 적어나갔다.
그렇게 작은 노트 한 페이지를 꼬박 채우고 다음 장에도 끊임없이 적었다.
그다음은 비슷한 단어끼리 묶었다.
그렇게 묶인 단어들과 유독 마음에 콕콕 박히는 단어들로 짧은 문장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들이 또 노트를 채우기 시작했다.
쓰다 지우기도 하고, 딱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오지 않아 볼펜 끝을 잘근잘근 씹다가 화들짝 놀라서 뱉기도 했다.
다른 형들이 매일같이 무언가를 씹어대던 힘찬 형을 어떻게 했는지 잘 아는 세빈이는 들키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원래는 없던 버릇이었는데 ‘그때’ 일을 겪은 후 생겼다.
그렇게 의식의 흐름처럼 볼펜을 씹던 세빈이는 그날을 떠올렸다.
색이 쑥 빠진 것처럼 창백해 보였던 형들의 얼굴과 자신을 맨 뒤에 밀어 넣던 영빈 형의 다급한 손.
그 손은 긴장 때문인지 땀에 젖어있었다.
서로를 붙잡고 둥글게 모여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들이었는데도 그 와중에 가장 어린 자신과 힘찬 형이 제일 뒤에 밀어 넣었다.
고작 두세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도 경환 형과 영빈 형, 준이 형은 왜인지 모를 정도로 필사적인 얼굴이었다.
환이 형이 문밖으로 튀어 나가던 순간 세빈이는 불안함이 극에 달하면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손에 꽉 쥐었다가 바닥으로 패대기치는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면서 이러다 심장이 퍽하고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준이 형과 경환 형이 절박한 얼굴로 환이 형에게 뻗었던 그 손가락.
지금도 망막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 모습은 그림으로 그리라고 해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고, 함께 지낸 시간이 역순으로 하나씩 떠올랐다.
그간 멤버들과의 일을 떠올리던 세빈은 그 모든 시간 속을 유영하며 떠오르는 모든 문장을 글로 적었다.
그 문장들 사이에는 힘들게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원망도, 두려움도 녹아있었고, 무기력하게 있어야 했던 자신에 대한 자조도 섞여 있었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생각에서 빠져나온 세빈이 고개를 들고 ‘네’하고 대답하자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막둥이 잠깐 나와보자.”
“으응.”
형들은 평소에는 ‘세빈아-’ 하고 이름을 부르지만, 가끔 저렇게 우리 막내, 우리 막둥이하고 달콤하게 부르기도 했다.
형들이 저를 그렇게 부를 때면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장난칠 때도 저렇게 불렀지만, 세빈은 조금 부끄럽긴 해도 싫지 않았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홀로 외롭게 자란 세빈에게는 지금 같은 팀에 있는 형들이 자신과 피를 나눈 형제처럼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 줬으니.
무작정 두서없이 적어 내렸던 노트를 들고 방 밖으로 나오자, 들어가기 전처럼 형들은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런 형들 사이에는 작은 틈이 있었고, 그 틈에 들어가 앉으니 그제야 웃음이 흘러나왔다.
꼭 이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 것.
“우리가 좀 주제도 없고 그냥 되는대로 막 적어서 모으기가 쉽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한번 다 같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차분한 목소리로 사람을 모으는 환이 형의 모습이 이상하게 다른 형들보다 더 형 같아서 세빈은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가끔 저렇게 불쑥 맏형 같은 모습을 보일 때면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었다. 꼭 시험 점수를 엄마에게 보일 때 같은 그런 기분이 돼버렸다.
정말 희한한 건 환이 형이 저렇게 말하면 흐물거리며 바닥에 눌어붙어 있던 다른 형들도 동생인 환이 형의 말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자신이 쥐고 있던 구겨진 노트를 환이 형 쪽으로 밀어준 영빈 형은 무심한 척하고 있었지만,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자신이 적은 가사를 보이는 게 부끄러운 것 같았다.
준이 형은 아직도 노트를 구기고 있는 힘찬 형의 등짝을 툭툭 두드렸고, 경환 형은 자신의 노트 위에 빼앗은 힘찬 형의 노트를 얹어서 상 위에 올려놨다.
“어휴, 우리는 왜 다 같이 뭐하나 하기가 힘드냐.”
“다들 부끄럼을 많이 타서 그런 듯?”
괜히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힘찬 형의 목소리에 무덤덤한 경환 형이 답한다.
그리고 또 금방 둘이 투닥거리겠지.
세빈은 그런 형들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형들 사이에 있으면 무서운 것도 덜 무서웠다. 그 절박했던 순간에조차 자신을 감싸고 붙들던 형들을 기억하기에 괜찮았다.
가끔은 엄마나 아빠보다 형들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자신도 깜짝깜짝 놀랐다.
“아니, 왜 이걸 다 나한테 밀어주는 건데요? 같이 보자니까.”
“원작자니까?”
“원작자는 무슨. 다 같이 한 거지.”
투덜거리면서도 노트를 꾹 눌러 펴더니 연필을 든 환이 형은 상을 탁탁 두드렸다. 모두 집중하라는 듯.
얌전히 몸을 일으켜 앉은 형들이 조금 작아 보이는 상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노트를 휙휙 넘겨 확인한 환이 형은 준이 형 쪽으로 시선을 주었고, 그 모습에 준이 형이 픽하고 웃었다.
가끔 환이 형은 우리를 볼 때랑 조금 다른 눈으로 준이 형을 볼 때가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조금 더 믿는 사람, 혹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눈이었다.
준이 형이 어느 날 갑자기 팀 이름을 바꾸자고 해도 환이 형은 순순히 ‘그래요’하고 답할 것 같은, 아직 세빈은 알 수 없는 신뢰 관계.
“누가 한 팀 아니랄까 봐 적은 게 다들 비슷하네.”
“진짜? 와, 왠지 기분 나빠.”
“넌 왜 또 초를 치냐.”
“형은 나랑 형이 닮았다 그러면 좋아?”
“미쳤어?”
“거봐.”
몽글몽글했던 세빈이의 감상은 경환 형과 힘찬 형의 투닥거림으로 와장창 깨졌다. 늘 그렇듯이 두 형은 저 정도면 아직 초등학생인가 싶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디스하고 괜히 툭툭 치곤 했다.
“지방방송 좀 꺼. 진도 좀 나가자. 이거 해야 오늘 잔다….”
“노래를 틀어놓고 이 문장 중에 제일 꽂히는 걸 골라볼까?”
“그거 괜찮을 것 같은데.”
환이 형 핸드폰에 저장해둔, 우리가 만든 명왕성이 재생되자 모두 얼굴이 진지해졌다. 방금까지 장난치던 경환 형과 힘찬 형까지도.
이래서 세빈이는 형들이 더 좋았다.
놀 때는 한없이 가볍고 애같이 구는 형들이지만, 음악 할 때, 일할 때는 다들 나이보다 훌쩍 어른인 것처럼 진지했다.
그 뒤로 꽤 시간이 흐를 때까지 우리는 한 구간씩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서로의 노트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골라냈고,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 사이사이에 세빈은 힘찬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았다.
자신처럼 하나의 곡이 되어가는 이 모습에 안무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환이 형은 그런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는 듯, 눈이 마주칠 때마다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가끔 형은 주변 공기까지 녹진녹진해질 것처럼 다디단 눈으로 멤버들을 보곤 했다. 그건 형들 생일에 함께 먹었던 그 케이크들처럼 폭신하고 부드러운, 그리고 한없이 달콤한 그런 행복한 느낌이었다.
“와, 이게 되네?”
“나도 이렇게 작업해보긴 처음인데 진짜 되네.”
경환 형과 준이 형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얼굴로 중얼거렸고, 환이 형의 얼굴은 왠지 개운해 보였다.
“이제 좀 자자….”
졸음이 쏟아져서 막판에는 거의 졸았던 세빈이 정신을 차리려 애쓰자,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세빈은 그 손길에 저도 모르게 살포시 웃었다.
무언가 한 가지를 또 해냈다는 충족감은 그렇게 세빈을 한 발자국 더 자랄 수 있게 해주었다.
* * *
주말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쉬는 날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냥 평소와 똑같은 하루였다.
그나마 학교를 안 가도 돼서 좋긴 했지만.
어젯밤 늦게까지 다들 머리를 싸맨 터라 아침은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시작되었다.
피곤했던 몸과 머리가 따뜻하고 보드라운 포잉을 껴안자마자 힐링 받은 것처럼 녹아내려서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포잉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모습에 혀를 차고 푹 자라고 몰랑한 핑크 젤리로 내 이마를 한번 꾹 눌러주었다.
“환아, 일어났어?”
“네, 형. 잘 잤어요?”
“일어났냐?”
“어라, 우진 형 아침부터 웬일이에요?”
거의 모든 날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준이 형이었다.
잠이 덜 깨서 지구 맨틀을 뚫을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준이 형의 모습은 가끔 몰래 찍어서 팬카페에 올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평소의 철두철미한 모습과 달리 방어력이 ‘0’일 것 같아서 언젠가 한 번은 시도할 생각이었다.
오늘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비척거리며 냉장고로 향하던 나는 또 다른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거기엔 우진 형이 앉아있었다.
“급한 건 아니니까 일단 너희 할거해. 애들 다 일어나면 같이 말하게.”
“어… 네. 형도 같이 밥 먹을 거죠?”
“응. 나도. 난 밥 많이 줘라.”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답한 우진 형은 밥 많이를 덧붙이며 푸근하게 웃었다.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은 내 새끼들 먹일 밥이 급했다.
대충 세수하고 자는 사이 엉망이 된 머리까지 감고 나와 익숙하게 가스레인지 앞에 섰다.
제일 만만한 게 김치볶음밥이었다.
얼마 전 찬이네 어머님이 들기름까지 보내주셔서 우리의 식사 만족도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찬이는 정말 어머님께 잘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밥을 하고, 옆에서 준이 형은 방울토마토를 씻었다.
밥을 먹고 나면 이렇게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과일 한두 개를 멤버들 입에 물려주었다.
비타민 먹으라고 쫓아다니면서 말해도 잘 안 듣는 동생 놈들 때문에 그럼 과일이라도 먹으라고 챙기기 시작한 것.
“형이 고생이 참 많아요.”
“그래, 우리 참 고생이 많은 것 같다.”
“…너희 뭐하냐.”
서로 주거니 받거니 헛소리하며 준비하는 우리 모습이 퍽 웃겼는지 우진 형은 피식피식 웃으며 핸드폰으로 그런 우리 모습을 찍었다.
“이거 올리면 팬들이 좋아하겠다.”
“아, 형! 안 돼요. 지금 되게 꼬질꼬질해요!”
“이런 게 리얼리티지.”
“제발요….”
대충 준비가 끝난 우리가 멤버들을 깨우느라 한바탕 소란이 있었지만, 늘 있었던 일이라 누구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졸려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주제에 수저를 야무지게 쥐고 밥을 우걱우걱 퍼먹는 찬이나 자꾸 젓가락을 떨어트리는 세빈이 모습도 우진 형의 카메라에 담겼다.
갑자기 이 형이 왜 이러는 거야….
편한 옷차림으로 준비를 마친 우리가 거실에 모여앉아 우진 형이 평소처럼 느긋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지난 밤사이에 좀 많은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이요?”
“자세한 건 회사 가서 얘기해줄게. 아, 너희한테는 좋은 일이니까 너무 겁먹지 말고.”
우진 형의 태도가 느긋했기에 다행히 멤버들은 나쁜 일은 아닌가 보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에 멤버들은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포잉, 너는 무슨 일인지 알고 있어?’
‘당연. 어제 얘기하려다 님이 너무 졸려 보여서 얘기 안 했지.’
‘아…. 무슨 일인데?’
‘가서 들으셈.’
이 냥아치 요정님은 역시 내 편이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