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싫다고 말해(5)
“멤버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 같네요.”
“네. 가슴이 조금 후련해요.”
초조함 가득했던 마음이 이제는 많이 잠잠해졌다는 걸 힘찬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이전보다 무언가를 물어뜯는 것도 많이 줄어들었고, 심장을 조여오는 것 같았던 압박감도 없어졌다.
눈앞에 멤버들이 없으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안해서 손이 덜덜 떨리던 것도 확실히 덜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앞에 있는 상담 선생님이 이전처럼 마냥 무섭고 두렵지는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회사에서 붙여준 상담 선생님이고, 상담 역시 자신은 과거에 이미 경험했던 일이니까.
하지만 각자의 가족사를 서로에게 속삭이던 밤, 상담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이 조금 바뀔 수 있었다.
하준, 지환, 세빈이가 상담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화하는 내내 멤버들은 언제나처럼 개구진 얼굴로 웃고 장난쳤고, 그러면서도 늘 입을 여는 멤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누가 시켜서 시작한 이야기가 아니어서일까.
대화는 평소처럼 편안하고 녹을 것처럼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힘찬은 이상한 안도를 느꼈다.
분명 어렸던 자신이 친부의 폭행을 견디는 건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상담 치료를 친구들이 알게 되었을 때 보인 반응이었다.
어머니는 마음이 아프면 정신과에서 치료받는 거라고, 배가 아프면 소아과에 가는 것과 같은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랬기에 어디 아프냐고 병원 건물에서 봤다는 같은 반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고.
그러나 얼마 후, 힘찬은 은연중 반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일부 부모들 사이에서 힘찬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오갔고, 그들이 자식들에게 힘찬과 놀지 말라고 했던 것.
결국 힘찬은 전학을 가야 했고, 병원에 가는 걸 거부했다.
그런 일을 겪은 뒤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마저도 어머니와 새로운 가족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과거의 경험은 힘찬에게 상담이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스트레스가 되는 결과를 남겼다.
하지만 늦은 시간까지 지환이와 이야기하며 서걱거리며 통증만 남기던 마음이, 무어라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불안이 덩치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 후 지환과 하준의 손을 잡고 밤거리를 걷던 걸음. 눈물에 번져 뿌옇게만 보였던 그 풍경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얼마 전, 서로의 체온에 안도하며 깊이깊이 억눌렀던 것들을 끄집어내서 풀어낸 후부터는 이제 괜찮다 싶어졌다.
힘찬은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저 숨기고 경계하기만 해서는 나아질 수 없다는 걸 멤버들 덕분에 깨달았다.
자신이 단단해지지 않으면 어느 것 하나 지킬 수 없다는 것도.
“저는 제 I형 양극성 장애를 앓았어요. 약물치료와 상담을 오래 했었고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힘찬은 여전히 찬영과 시선을 마주하는 건 힘들었다. 찬영도 그 부분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자신이 겪었던 상담과 약물치료, 그리고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비교적 담담히 말하는 힘찬을 진지한 눈으로 관찰하던 찬영은 여태까지 확인된 힘찬의 상태를 떠올렸다.
몇 가지 모습에서 추측했던 내담자의 상태와, 내담자가 처음으로 직접 건네주는 정보를 조합해서 보다 적극적인 상담이 가능해졌다.
“큰 결심을 했네요. 고마워요. 이것도 멤버들과의 대화 덕분인가요?”
찬영의 따뜻한 말에 힘찬은 자기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고집스럽게 입술을 꾹 깨물어 눈물을 참느라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었지만 울고 싶지 않았다.
“…네. 우리 팀은 믿을 수 있으니까요.”
찬영은 그 뒤에 생략된 말을 듣지 않았지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팀원들이 당신을 믿으니 자신도 믿어보겠다는 그 말.
무엇보다 내담자가 상담에 충실하게 되었고, 앞으로 좋은 예후를 기대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 * *
나와 멤버들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멈춤 없이 유유히 흘러갔다.
회사의 강경 대응을 비웃기라도 하듯 악플의 수위는 점점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우리를 조롱하는 글이 커뮤니티에 늘고 있었다.
바로 모두를 잡아 족칠 것 같았던 실장님과 팀장님의 모습과는 다르게 회사는 그 모습에 잠시간 침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커다란 범이 사냥감의 목줄기를 노리고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힐링캠프가 공개되는 금요일 밤이 되었다.
* * *
이전에도 몇 개의 프로그램을 흥행시킨 PD와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새벽, 최근 흥행몰이 중인 영화의 주연인 여진우.
그들이 아끼는 동생들과 함께 휴가를 즐기러 간다는 내용은 예고 영상만으로도 이미 꽤 많은 팬을 끌어모은 상황이었다.
물론, 언래블이라는 아이돌 그룹이 나오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은 기사에서, 몇 번은 예능에서 언래블을 봐온 사람들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작은 흥미를 느끼고 TV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은 출연진에 대한 흥미보다는 유명한 PD가 제작한다는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흥미만으로 채널을 고정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다들 꽤 멀끔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다만 여진우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새벽과 언래블 멤버들을 보고 매니저에게 속았다며 울적한 얼굴이 되었다.
순한 강아지같이 까맣고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여진우가 우울해하며 날카로운 얼굴을 한 언래블의 한 멤버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새벽의 가영이 다가와 안겨 있던 멤버를 뺏어가고 키스가 다가와 가영을 긁고 아주 난장판이었다.
그 와중에 중간에 낀 날카로운 인상의 멤버는 넋이 나간 얼굴로 사방에서 붙잡고 흔드는 대로 흔들흔들거렸다.
“아이고, 배 타야 하는데 저래가지고 멀미 나서 어쩌려고.”
“쟤, 그 뭐야 꼭 그거 같네. 풍선 있잖아.”
“그 행사장에 있는 커다란 풍선?”
아주 큰 키는 아니었던지 자기보다 큰형들 사이에서 흔들거리던 멤버 앞에 ‘지환’이라는 이름표가 따라붙었다.
하얗던 얼굴이 더 창백해지는 것 같아지자, 다정다감하게 생긴 멤버가 와서 아이를 쏙 빼갔다.
흡사 땅에서 고구마 줄기를 잡아빼듯 익숙한 모습이었다.
자기들끼리 뭉쳐서 속았다는 둥 제작진이 너무하다는 둥 구시렁대다가 배를 타고, 또 갈아타더니 어떤 섬에 덩그러니 내려졌다.
10명에 이르는 연예인이 그사이 피곤해진 얼굴로 모래사장에 주저앉자, PD가 특유의 얄미운 얼굴로 웃으며 짐을 챙기라고 했다.
“아니, 뭐 이런 거 다 뻔한 거 아녀? 지들끼리 사전답사 다 했겠지.”
“얼굴들이 다 핼쑥하니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저것들이야 남 속이는 게 일상인데 무얼.”
황금 시간대에 시작한 방송은 PD의 이름값 덕을 톡톡히 보며 여러 가정에서 방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식당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 짜고 하는 거다, 아닌 것 같다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고, 잘생긴 얼굴들이 화면 가득 나오니 일부는 얼굴만으로도 만족하기도 했다.
“쟤, 그 뭐야. 쟤가 그 걔 아냐?”
“누구?”
“그, 그림자 어쩌고 거기 나온 애잖아.”
“아, 여진우? 그림자 살인에 나온 애.”
“맞아! 이렇게 보니까 영 다른 사람 같네.”
하늘이 도운 건지 여진우가 출연했던 영화가 이리저리 밀리다 얼마 전 개봉했다.
개봉한 영화는 최근에 보기 힘들었던 느와르 풍의 영화였다.
배우들의 열연과 그 특유의 감정선이 과거를 추억하는 많은 어른의 감정을 건드려 제법 볼만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한국 영화치고 신파가 없는 영화가 없다지만, 불타는 집에서 가족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던 여진우의 연기는 꽤나 볼만했다.
짐승처럼 울부짖다 가족의 시체를 두고 불길을 뚫고 나오던 독기 가득한 눈빛은 사람들에게 여진우라는 배우를 각인시키기 충분했다.
그랬던 그 배우가 지금은 발을 동동 구르며 짐을 나르느라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울상이 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저 사람이 그 배우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와 가영 형은 여기서도 똑같구나…. 저 형은 진짜 무인도에서도 잘 먹고 잘살 것 같아.”
“키스는 역시 키스다.”
새벽의 팬들도 손꼽아 기다리던 방송이었다.
좀처럼 TV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덕에 얼굴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벽은 타 아이돌이나 밴드에 비해 팬덤의 성비가 비등비등했다.
노래는 물론이고 멤버 개개인의 성격이 워낙 뚜렷한 편이라 성별 상관없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편이었다.
지금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전 작은 홀에서 공연할 때, 남팬이 가영에게 ‘가영아, 결혼하자!’하고 우렁차게 외친 일은 지금도 팬들 사이에서 종종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 남팬을 향해 가영은 호주 가는 비행기 표를 끊어오라고 답하며 답가까지 불러주었다.
그 답가는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가영의 자작곡.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 곡은 결국 모든 게 한순간의 꿈이었고, 눈을 뜨니 나 홀로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되자, 방송이 흘러가는 내내 출연진들은 끊임없이 ‘지환아!’라고 외치고 있었다.
오죽하면 화면 하단에 이런 멘트가 나왔다.
‘오늘 지환아! 는 총 몇 번일까요’
짐을 나를 때도, 텐트를 칠 때도, 짐을 정리하고 밥 먹을 준비를 할 때도 사방에서 ‘지환아!’가 터져 나왔다.
이쯤 되니 시청하고 있던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지환이라는 멤버의 얼굴과 이름은 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 냉랭해 보이던 애기였는데,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자기보다 큰형들을 능숙하게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런 형들 뒤에서 혼자 흐뭇하게 웃고 있는 건 또 무슨 광경인가.
처음에 자기소개 때 나이를 말하지 않았다면, 지환이가 이 중 가장 연장자인 줄 알았을 것.
지환은 그 와중에도 제일 뽀얗고 찹쌀떡같이 생긴 세빈이라는 막내를 끔찍이 여겼다.
틈나는 대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입에 먹을 걸 넣어주질 않나, 혹시라도 다칠까 전전긍긍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친동생도 저렇게는 안 챙길 것 같은데.”
“친동생이면 저럴 수가 없지.”
“그렇지. 우리 엄마 아들한테는 저럴 리 없어.”
호프집에서 맥주를 홀짝이던 사람들은 자신의 동생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친동생이 아니니까 저렇게 예뻐할 수 있구나 하고 묘한 납득을 하며.
첫 번째 끼니를 위해 라면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애타는 얼굴로 지환이라는 멤버만 보고 있는 것도 웃겼다.
칭찬으로 멤버들을 우쭈쭈하며 움직이는 것도 매우 익숙해 보였다. 이 모습만으로도 평소에 저 그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여기서 끊냐. 진짜.”
“조우선 진짜 악마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헤매고 다니던 멤버들이 밥을 해 먹으려고 불을 피우려다, 가져온 물품 중에 가스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하는 장면으로 첫 방송이 끝났다.
그리고 바로 광고로 넘어가나 했더니 인터뷰 영상이 흘러나왔다.
첫 번째 타자는 여진우였다.
“언래블이요?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이었어요. 키스 형한테 듣긴 했는데 듣던 것보다 더 착하더라고요.”
스태프의 질문에 여진우는 즐겁다는 듯 눈을 빛내며 어떤 인연으로 각각의 사람들과 친분을 만들게 됐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사이에서 어떤 태도였는지, 사석에서 만났을 때는 또 어땠는지.
“사인 시디를 SNS에 올리기도 하셨다면서요?”
“아, 그거요. 하하, 저 코멘트 적힌 사인 시디 처음 받아보는 거였어요. 와, 그거 받으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왜 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여진우는 즐거움을 감추지 않는 듯 연신 웃으며 새벽형들은 너무 쿨해서 자신에게 그런 건 안 해줬다고 말했다.
사인 시디는 몇 번 받아봤지만 이렇게 정성스러운 코멘트는 처음이었다면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직접 보여주었다.
그렇게 방송이 끝난 후, 사전에 약속되었던 프로그램과 출연진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온갖 커뮤니티에는 힐링캠프와 새벽, 여진우, 언래블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프로그램이 재밌었다는 말, 조우선 PD는 악마라는 온갖 소감과 함께 출연진에 대한 호감, 관심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면서 그동안 줄기차게 언래블에 대한 루머를 퍼트리던 세력과 충돌이 생겼다.
바로 그 순간이 정윤 실장과 김소현 팀장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