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91)화 (191/456)

191. 싫다고 말해(4)

경환 형 귀에도 멜로디가 익었던 건지 듣자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네. 자꾸 머릿속에 파고드는 것 같아서 꺼내야 될 것 같더라고요.”

2분이 조금 안 되는 멜로디를 듣던 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을 열었다.

“뭔가 음… 환아, 어떤 곡을 쓸 건지 가사는 있어?”

“아뇨. 그냥 정말 건반 뚱땅거리다가 나온 거라.”

뭔가 아리송한 얼굴이 된 경환 형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더니 재생을 멈추었다.

“이거 나보다 하준 형이 들어봐야 정확히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취향이라고 해야 하나,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경환 형은 머리를 긁적거리다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둘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음악의 분위기가 다르다 보니 음악 작업의 방식도 다르고, 넣고자 하는 메시지 등에도 차이가 있다는 대략적인 설명이었다.

“내가 랩을 하기 시작한 게 분노 때문이었잖아. 그래서 난 좀 강하고 빠른 리듬을 더 선호해. 가끔 말랑한 곡을 써보고 싶기도 한데 그 감정이 잘 안 담기거든. 어색한 옷을 입은 기분?”

“에이, 안 그래요. ‘점멸’은 잔잔해도 애틋하고 되게 좋았는데.”

“시끄러, 인마. 여튼.”

사람마다 성향이 다른 만큼 둘의 음악색이 확연히 다르다고 경환 형이 설명해주었다. 다만, 그 모습이 어쩐지 자신이 없어 보여서 은근슬쩍 칭찬을 밀어 넣었다.

싫지는 않은지 귀가 조금 붉어졌지만, 괜스레 퉁명스럽게 내 팔을 툭툭 건드리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거참, 솔직하지 못한 형님이라니까.

“하준 형은 소리를 잘 가지고 노는 편이니까, 음. 뭔가 이 곡은 빠진 것 같고 허전한 느낌이 드는데… 난 그게 아쉽다는 건 알겠는데 해결할 방법을 모르겠거든. 하준 형은 들으면 알 것 같아.”

“그럼 준이 형도 부르면 되죠, 뭐.”

준이 형에게 와줄 수 있는지 물었더니 지금 간다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경환 형과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멤버들에게 내 작업실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언제든지 와도 좋다고 말을 했었다. 한 번에 하나밖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는 늘 작업 중에는 시간을 챙기지 못했고, 멤버들이 잡으러 오는 일이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준이 형이나 영빈 형, 세빈이는 꼭 문을 두드려서 허락을 받은 후 들어왔다. 찬이와 경환 형이 편하게 드나드는 것과는 또 달라서 우리 애들이 이렇게 다채롭다 싶어 웃었다.

“근데 무슨 일이야?”

“말하기 전에 형이 끊어버렸잖아요.”

미안하다며 웃던 하준 형은 보조 의자를 끌어다 경환 형과 내 사이에 앉았다.

툭하면 멤버들이 찾아오는 터라 작업실에는 보조 의자만 세 개가 있었고 작은 소파까지 있었다.

생각해 보니 왜 내 작업실인데 멤버들의 아지트 같은 느낌이지?

한숨을 푹 내쉬는 나를 두고 경환 형이 자신이 느꼈던 느낌을 설명하더니 재생 버튼을 눌렀다.

둘 다 진지한 얼굴로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반복해서 듣기 시작했고, 나는 다시 꿈을 떠올렸다.

에반 선생님이 전해줬던 충고, 그리고 무성의한 손길.

망망대해 같은 새까맣고 공허한 공간 안에서 차라리 녹아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느꼈던 안락함과 극단적으로 몰아치던 환경과 기분.

외로움도 있었지만, 다 포기하고 녹아들고 싶다는 기분이 가장 컸다.

“음. 지환아, 네 생각을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반복해서 내가 만들어놓은 엉성한 멜로디를 듣던 준이 형은 자세를 고쳐잡고 앉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는데, 이 노래는 저 혼자 작업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딱 여기까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 같은? 그런데 이대로 끝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같이 들었고요.”

“곡이 되기에는 많이 짧지. 형도 당장은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잘 가늠이 안 되는데.”

준이 형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책상을 툭툭 건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경환 형을 힐끔 쳐다봤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생각에 빠질 때는 그냥 두는 게 나은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하준 형은 우리를 향해 입을 다시 열었다.

“셋이 이 뒤를 같이 써보자. 아무래도 나도 바로 답은 안 나올 것 같은데 뭔가 계속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

그렇게 말하는 하준 형의 얼굴은 무어라 단정하기 힘든 미묘한 표정이었다.

작업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들 다르다고 했는데 이대로 괜찮은 건가 싶어 경환 형을 바라봤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원래 작업할 때 방해받는 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경환아…?

전생에선 혼자 작업하는 걸 더 선호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기억과 다른 모습에 어리둥절했지만,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한 번 해보자.”

“지금 바로요?”

“응. 왜?”

어디서 불이 붙은 건지 모르겠지만 시작하자는 하준 형의 얼굴에 시원한 미소가 그린 듯 떠올랐고, 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 * *

“우리 셋만 먼저 가라고요?”

“응. 셋은 곡 작업을 계속한다더라.”

“치사하게 셋이서만 어울린다 이거지?”

연습실에서 다른 셋을 기다리던 영빈, 힘찬, 세빈에게 우진이 숙소로 돌아가자며 다가왔다.

다른 형들은 왜 안 오냐는 세빈이 질문에 우진이 말을 전했고, 영빈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힘찬이와 세빈이 얼굴을 불퉁해졌다.

아직도 둘은 한 사람 몫을 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초조해했다. 그러다 보니 먼저 쉬기보다 옆에라도 있고 싶어 했다.

“영빈 형, 우리도 가서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작업할 때는 방해하면 안 돼, 세빈아.”

“형들 작업하는 거 보면 우리도 쪼금 배울 수 있을 테니까, 음….”

세빈이는 무언가 핑계를 대서라도 그 자리에 같이 끼고 싶은 것 같았고,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 영빈은 슬며시 웃으며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동생들의 감정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영빈이 보기에는 다들 지나치게 열심히 하려는 게 걱정일 정도인데 멤버들은 되려 자기가 하는 게 없다고 걱정을 하고 있으니.

예전에 영빈도 느껴본 적 있었던 종류의 것이긴 했다.

하준은 곡을 쓰고 랩을 하는데, 자신은 그저 가이드를 녹음하면서 의견을 말하는 것 외에는 하는 게 없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영빈에게 하준이 정색하면서 말했었다.

부르는 사람이 공감할 수 없는 노래를 듣는 사람이라고 공감하겠냐면서, 영빈의 의견이 하준에게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그 후 영빈은 멤버들에게서 가이드 녹음을 부탁받을 때마다 감상을 더 적극적으로 말해주었다.

반면, 그런 경험이 드문 힘찬이나 세빈이는 자신들이 팀에 도움이 되는 일이 없다고 시무룩해 하는 것 같았다.

안무에 더 열중하고 최근에는 외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쉽게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 준이와 이런 동생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영빈은 둘을 다독였다.

“일단 물어는 볼 건데, 혹시라도 작업에 방해되면 안 되니까 먼저 가라고 하면 그냥 갈 거야. 알았지?”

“네!”

“알았어요. 괜찮다고 하면 그냥 우리는 가서 쉬어요.”

우진에게 미안하다고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긴 영빈은 멤버들이 모여있다는 지환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렇게 들어간 작업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얼 한 건지 얼굴이 퀭해진 멤버 셋이 초점 없는 눈으로 영빈을 바라보았다.

“아니, 너희 뭘 어떻게 하길래 사람 몰골이….”

“잘 안돼서요….”

늘 차분한 모습을 보이던 지환이는 어쩐 일인지 기가 팍 죽은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옆에서 빌딩이 무너져도 무덤덤할 것 같았던 경환이까지 축 처져있는 것 같아 하준을 바라보았지만, 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애들 오라고 해도 괜찮아? 같이 들어가고 싶대.”

“네. 괜찮아요. 그냥 있으면 피곤할 것 같아서 먼저 가라고 한 건데.”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지환이 머리를 토닥여준 영빈은 우진 형에게 먼저 퇴근하시라고 양해를 구했고, 서둘러 동생들을 불렀다.

“헤이, 브라덜! 우리 왔음!”

“창피하니까 하지 말랬잖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둘은 안 그런 척했지만 기뻐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여태 꿈틀거리는 좀비 같았던 셋도 막내 둘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어떻게 걷는 소리만 들어도 찬이랑 세빈이라면서.

영빈은 이 모습을 두 동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어두침침하고 퀭했던 애들이 너희가 오는 것만으로도 웃을 수 있다고.

다소 무거웠던 작업실 안의 공기가 환기라도 시킨 것처럼 한층 밝아졌다.

여기저기에 대충 낑겨 앉았던 멤버들은 이제 막 들어온 셋에게 어떤 것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었는지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들려준 멜로디엔, 전에 환이가 꿈에서 들었다는 그 허밍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빈이가 입을 열었다.

“형들 이야기랑 멜로디 들으니까 명왕성이 생각나요.”

“명왕성? 왜?”

뜬금없이 나온 명왕성이라는 이름에 경환이 묻자, 세빈이가 또박또박 자신의 감상을 형들에게 말했다.

“원래는 태양계 행성이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또 아니라고 빼버렸잖아요. 그냥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좋을 대로 쓰는 것 같아서 기사 보고 조금 슬펐거든요.”

“아, 나 뭔지 알 것 같아. 그냥 난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평가 내리는 거. 그래서 화도 나고 짜증도 나는데 어이도 없는 거야.”

세빈이 이야기를 듣자 힘찬이도 말을 보태왔다.

그리고 영빈은 흐느적거리던 세 명의 눈빛이 돌변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 도망쳐 나왔어야 했다.

“얘들아, 이건 어때?”

“이건? 어떤 느낌인지 얘기해줘.”

힘찬이와 세빈이가 당황한 눈으로 영빈을 바라봤지만, 영빈이 해줄 수 있는 건 평소처럼 희미한 웃음밖에 없었다.

“그러게 형이 숙소 가서 쉬고 있자고 했잖아.”

아무래도 저 세 명은 지금 제대로 삘 받은 것 같으니, 이 작업이 끝나기 전까진 집으로 돌아가기 글렀다고 생각하며 영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지환이가 불 안 끄고 갔나?”

언래블의 리패키지 앨범 때문에 오늘도 밤을 새워야 했던 김주영 팀장은 잠도 깰 겸 회사 복도를 거닐다 문틈으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확인했다.

멤버들의 개인 작업실은 타인이 드나들지 않으니 새벽에 불이 켜져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휴, 걔도 은근 허당이라니까.”

늘 차분한 것처럼 보이는 지환이가 생각보다 덜렁거리고 실수도 많이 한다는 걸 A&R 팀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툭하면 작업하던 곡을 들고 와서 수많은 질문을 쏟아붓기도 했고, 에단 선생님을 졸졸졸 쫓아다니며 끊임없이 배움을 갈구하기도 했다.

제영이나 소현이 왜 애들한테 병아리라고 하는지 잘 알 것 같았다.

멤버들을 떠올리며 다가간 작업실은 예상대로 제대로 닫혀있지 않았고, 무심코 문을 열었던 주영은 그 안의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지금쯤 숙소에서 한창 자고 있어야 할 멤버들이 작업실 소파며 바닥, 책상에 각자 널브러져 잠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잠은 숙소로 돌아가서 자던 애들이라 당황한 주영은 애들을 깨워야 할지 이대로 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깨워서 숙소에 보내자니 이미 시간이 새벽 4시를 넘긴 시점이었다.

차라리 두 시간 정도 더 자게 두었다가 학교 가야 할 애들은 보내고 다른 애들은 휴게실에서 쉬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놈들 도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주영은 조심스럽게 불편해 보이는 멤버들의 자세를 최대한 편하게 바꿔주며 작업실에 있는 인형들을 멤버들 품에 찔러넣어 줬다.

춥지는 않을 테니 담요까지는 필요 없나 하는 생각을 하다 문득 고개를 돌린 화면에는 마지막까지 작업하던 것으로 보이는 곡이 있었다.

옆에 곱게 놓여있는, 자신이 선물해준 헤드폰이 보였다.

지환이가 개인 작업실을 갖게 되었을 때 축하의 의미로 선물해 줬던 것.

호기심이 동한 주영은 헤드폰을 연결하고 파일을 재생했다.

한참 동안 파일을 반복 재생하던 주영은 조심스럽게 파일을 닫고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잠든 멤버들을 바라봤다.

‘얘네는 도대체 어떻게 된 애들이야?’

하준이나 경환이야 워낙 잘하던 애들이지만, 지환이는 본격적으로 작곡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힘찬이나 세빈이는 흥미를 드러내고 있지만, 호기심 수준이었고.

하지만 조금 전 주영의 귓가에 재생된 곡은 셋이 여태까지 작업했던 노래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유사한 느낌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차라리 지금 앞에 널브러진 애들. 딱 언래블 같았다.

잔잔하고 부드럽게 출렁이는 물결 같다가도 한번 몰아치면 사정없이 다 부숴버리는 파도 같은.

정윤 실장과 소현 팀장이 무언가 일을 꾸미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A&R 팀에서는 딱히 신경 쓸만한 일이 아니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곡을 들은 순간, 주영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 날것의 느낌이 가득한 이 곡이 무언가 큰일을 벌일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조용히 작업실을 나와 문을 닫은 주영은 자신의 상사에게 먼저 메시지를 남겼다.

자신이 직접 정윤 실장에게 들이대는 건 모양이 영 그랬다.

주영의 얼굴에는 소현이 봤다면 질색할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무언가 꿍꿍이가 가득한 얼굴이라고 싫어하던 그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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