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싫다고 말해(3)
포잉은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 왔다.
요정들은 기본적으로 인내심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물론 소원의 요정인 포잉이 속한 이들은 조금 달랐지만.
어리바리한 인간 계약자가 생기고 그 아이를 챙기는 동안 포잉은 몇 번이나 그 작은 인내심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 잘못된 건지 뒤틀림이 발생해서 계약자의 앞길이 여러 번 방해받았다.
이제는 괜찮아질 거라고 했지만, 그다음 문제는 계약자의 직업이었다.
많은 사랑을 받는 만큼 시기와 질투도 받는 게 이 세계의 연예인이라는 직업이었다.
포잉이 보기에는 그중에서도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상당히 비합리적인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인간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이니 포잉이 간섭할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새끼 고양이보다 방어력이 약한 계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일 뿐.
포잉은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차곡차곡 모은 음해 세력의 정보를 가상의 아이디로 계약자의 회사에 보냈다.
정보를 긁어오는 것쯤이야 어차피 다른 팬이라는 인간들도 하는 일이라 어렵지 않았다.
다만 포잉은 개미핥기의 영상을 풀지 말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이 내용을 인터넷에 공개했을 때 그 내용이 과연 계약자와 계약자가 속한 그룹에 좋은 영향만 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건 워낙 복잡했고, 매일 매일 배워가고 있다고 한들 포잉은 그것들을 모두 짐작할 수 없었다.
인간을 이해하게 되는 것.
그것은 아직 포잉에게 너무나 멀고도 먼 길이었다.
복잡한 머릿속처럼 정처 없이 흐느적거리는 꼬리와 간혹 바짝 서는 수염이 포잉의 심정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아니,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속에서 치미는 천불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서 입 밖으로 불이라도 뿜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간혹 중급 요정 시험을 포기하는 요정들이 있었다.
인간들의 악의를 견디지 못한 너무나 가여운 아기 요정들이었다.
포잉은 지금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철천지원수도 아닌 사람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을 웃으면서 쏟아내는 것이 사람이라는 생물이었다.
포잉이 보아온 악플들은 단순히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이 보아도 트라우마가 남을 것 같은, 악의가 절절 넘치는 말들이었다.
포잉은 그런 댓글을 남긴 이들이 너무 궁금해서 직접 찾아가 보기까지 했었다.
어떤 삶을 사는 이들이길래 그런 무시무시한 말들을 진실인 것처럼 외치고 있는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실제 모습을 보았을 때는 더없이 충격받았다.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친구와 웃으면서 수다를 떠는 학생이기도 했고, 가족들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웃으며 저녁 시간을 즐기는 성인이기도 했다.
가끔은 가까이 가기 싫을 만큼 비틀린 마음을 가진 이들도 있었고, 온 마음이 악의로 가득 차 세상 모두가 불행하길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체 인원에 비하면 소수였다.
계약자처럼 보통의 인간인 사람들이 핸드폰 안에서, PC 앞에서는 인격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실장이라는 인간이 계약자와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아이들이 대꾸하는 모습을 보았다.
포잉은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후의 결과는 흐름에 맡기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
흐물거리던 꼬리가 바짝 서고 쉼 없이 쫑긋거리던 귀도 꼿꼿해졌다.
키보드 앞에 앉아 무수한 고민을 하던 포잉은 결정을 내린 듯 키보드 위에 양발의 발톱을 하나씩 꺼냈다.
그리고 발톱으로 조심스럽게 토독토독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얗게 반짝이던 화면이 천천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 * *
소현와 정윤은 멤버들의 결단을 반겼다.
혹시나 여린 애들이 겁을 먹을까 걱정됐지만, 다행히 병아리처럼 무해한 아이들도 용기를 내주었다.
그렇다면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돕는 것.
이미 법무팀에서는 정윤의 요청과 함께 발 빠르게 모든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 피자는 어디가 맛있어요?”
“음. 저도 브랜드 피자를 시켜본 게 꽤 오래전이라. 찾아볼까요?”
멤버들에게 맛있는 피자를 시켜주기로 했으니 최대한 좋은 거로 해주고 싶었다.
회식이라도 시켜줄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외출은 그렇게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실장님, 이게 제일 맛있어 보이는데요? 고기가 많이 올라갔잖아요.”
“이 사진 그대로 배달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소현 팀도 은근히 허당이라니까.”
“아니, 제가 어디 가요! 여기 사람들 후기 사진도 있잖아요!”
정윤 실장은 고기보다 랍스터 같은 게 올라간 피자가 더 비싸니 맛있을 거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하지만 소현 팀장은 멤버들이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지켜봐 왔다며 고기 최고를 외쳤다.
결국 정윤 실장은 둘 다 시키고 어느 쪽을 애들이 더 좋아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자, 우린 일이나 합시다. 할 일이 아주 많아요.”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그때 대표님한테 속은 것 같아요. 하….”
“아, 그 이재영 씨에 대한 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그거요? 제작사에 의견 전달해놨어요. 배우실 실장님도 동의하셨고, 제명 씨도 동의했어요. 한 식구를 대놓고 욕하는 사람이랑은 일 못 한다고 하시던데요.”
ON 엔터는 아직 가수 층은 탄탄하지 않았지만, 배우층은 타 엔터에 비해 굉장히 탄탄했다.
덕분에 이번 일의 도화선이 된 이재영의 발언을 회사 차원에서 대응하기로 했을 때, 정윤은 배우실 실장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찌 되었든 이재영이 공식적인 인터뷰 자리에서 ON 엔터 소속의 연예인을 인성을 운운하며 비난한 건 사실이었다.
ON 엔터의 배우들은 하나같이 사생활이 깨끗하고 안정적인 연기력을 가진 것으로 평이 좋았다.
실장의 수완도 대단했던 터라 흥행작을 기가 막히게 잘 물어오기도 했으니 배우들의 신뢰 또한 말할 것 없었다.
정윤은 이재영이 차기작으로 노리고 있던 드라마와 영화에 소속 배우들이 출연 예정인지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배우실 실장에게 전후 상황을 설명했고, 그 사람이 나온다면 ON 엔터의 배우들은 출연이 어렵다는 말을 넌지시 흘려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정말 출연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감독과 작가들에게 ON 엔터를 욕하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일을 하느냐고 어필하고 싶었던 것뿐.
확인된 세 작품 모두 제작사 측에서 직접 ON 엔터로 대본을 보내고 영업을 제안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구설 외에도 과거 몇 차례 안 좋은 말이 돌았던 배우를 선택하느라 ON 엔터와 척을 질 감독은 없었다.
“홍 팀장님은요?”
“홍보팀은 준비 끝났다고 걱정 말라고 하셨어요. 최로운 기자랑도 이야기 끝냈어요.”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만, 가만히 있으면 호구가 될 뿐이었다.
특히나 정윤은 상대방이 뺨을 때린다면 반대쪽 뺨도 때리라고 내미는 성격이 아니었다.
뺨을 때린 상대방의 다리를 몽땅 부러트렸으면 부러트렸지.
“실장님 성격 되게 나쁜 거 아시죠?”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요.”
조용히 웃는 정윤 실장의 모습에 부르르 어깨를 떨던 소현 팀장은 자기가 노처녀로 늙어 죽으면 전부 대표와 실장 탓이라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정윤을 바라보는 그 두 눈은 기대로 빛나고 있었다.
대부분의 준비가 끝났다.
이제는 제갈공명처럼 동남풍이 불기를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 * *
“얘들아, 먹어보고 어떤 게 더 맛있는지 말해줘.”
“엥? 당연히 피자는 다 맛있죠.”
“형 파인애플 올라간 피자는 안 먹잖아.”
“그건 피자가 아니니까!”
“진짜 찬이 넌 맛알못인듯.”
“뭐래, 미각이 집 나갔어?”
“요새 너 은근슬쩍 반말한다, 형한테?”
우진 형은 실장님이 직접 시켰다는 커다란 피자 두 판과 다양한 간식거리를 들고 우리 연습실에 찾아왔다.
작정하고 시켰던 건지 피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이드 메뉴들까지 가득했다.
영빈 형과 내가 피자를 펼치는 동안 준이 형과 세빈이는 주변 정리와 음료를 챙겼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사이드 메뉴를 펼쳐놓던 찬이가 파인애플이 올라간 피자 이야기가 나오자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편, 하와이안 피자를 좋아하던 경환 형이 그런 찬이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결국 둘은 또 한참을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왜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메뉴로 시끄럽게 구냐, 진짜.”
피곤해 보이는 하준 형의 얼굴에 둘 다 입은 다물지언정 불만은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세빈이가 둘 입에 피자를 한 조각씩 쑤셔 넣자 상황은 정리되었다.
어쩌면 준이 형보다 세빈이가 형들을 다루는 법을 더 잘 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둘은 언제 싸웠냐는 듯 빠르게 피자와 사이드 메뉴들을 해치우기 시작했고, 영빈 형의 눈짓에 모두 피자에 집중했다.
스파게티도, 텐더도, 윙도 무엇 하나 가릴 것 없이 맛있었다.
악플러들의 고소 때문에 걱정하고 마음이 무거워 보였던 멤버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은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이 힘들 때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정답인 것 같아서, 웃으며 세빈이 입에 윙 한 조각을 물렸다.
“아, 너희 새 광고 영상 공개된 거 봤어?”
“아뇨, 아직요. 잘 나왔어요?”
같이 피자를 먹자는 우리 권유에도 사무실 분들이랑 저녁 먹어야 한다며 연습실을 나서던 우진 형이 갑자기 생각난 듯 우리에게 물어왔다.
마지막에 찍은 영상이 공개된 모양이었다.
“음, 잘 나왔지. 직접 확인해봐.”
무언가를 떠올리다 씩 웃은 우진 형의 말에 우리는 서로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광고는 숙소 가면 조용히 보는 것으로 암묵적인 약속이 끝났다.
회사에서 보면 마음껏 소리 지르고 구를 수가 없으니 안전한 숙소에서 보자는 것.
그렇게 피자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우리는 다시 연습을 위해 흩어졌다.
그리고 작업실에 돌아온 나는 환한 빛을 내는 모니터를 멍하니 들여다봤다.
꿈에 나왔던 멜로디가 잊히질 않아서였다.
어디서 들어본 건가 하는 생각에 이런저런 노래를 들어도 봤지만, 이거다 싶은 멜로디가 나오질 않았다.
그렇지만 형들이 말했던 것처럼 대박 작품을 꿈에서 들은 건지 어떤 건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소리가 너무 커서 귀를 틀어막고 싶었던 터라 썩 유쾌한 꿈으로 남지 않은 탓이었다.
준이 형이 녹음했던 파일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귀에 박힌 것 같았던 그 멜로디는 매우 단순했다.
건반을 톡톡 두드리며 멜로디를 생각하자 꿈의 광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새까만 어둠과 우주 같았던 공간.
녹을 것 같았던 빛들과 홀로 세상에 남은 듯한 외로움.
“응?”
꿈을 생각하며 가만히 건반을 누르던 나는 어느 순간 멜로디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냐, 이 순서가 아닌데.”
귀를 울리던 단순한 멜로디는 처음에 올 멜로디가 아니었다.
새까만 우주와 외로움이 먼저였다.
그 후 멜로디는 싸비처럼 흘러가야 했고….
“지환아?”
“네?”
한참을 홀린 것처럼 건반과 시퀀서를 만지던 나는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기 전까지 작업실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파드득 놀라 고개를 돌리자 경환 형이 당황한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으면 사람이 온 것도 몰라.”
“아, 그러게요….”
뭔가 더 진도가 나가지 않고 흐릿했던 순간이라 집중이 깨진 게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무언가 여기서 끝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이거 한번 들어봐 줄 수 있어요?”
방금까지 얼기설기 만들었던 흐름을 누군가 들어준다면 조금 더 명확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건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멤버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신에 가깝게 나를 움직였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던 경환 형은 순순히 내 손짓에 따라 곁에 앉았고, 재생된 멜로디를 듣더니 금방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이거 그때 그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