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hurt(6)
“지환아, 조심해!”
“악! 야, 이거 안 놔?!”
“차라리 날 밟고 가라!”
처음 봤을 때는 그리 길지 않은 길이였건만, 직접 이 길을 지나려니 42.195km의 마라톤 풀코스만큼이나 길어 보였다.
비명과 환장이 가득했던 이 고난의 길의 끝에 빛나는 승자는 없었다.
이미 처음 입었던 조끼도 장갑도 너덜너덜해진, 만신창이가 된 우리가 있었을 뿐.
연습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늘 단정한 모습이었던 준이 형조차 엉망진창이 되어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결승선에 주저앉아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 외에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서로의 팀을 견제하기도 하고 방해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데 방해는 무슨 방해.
그 시간에 차라리 우리 팀이 한걸음이라도 더 걷는 게 이득이었다.
준이 형과 경환 형, 나는 몇 번의 구름과 발버둥 끝에 최대한 바닥에 붙는 면적을 줄이려고 트랙 위를 기었다.
신발과 장갑, 조끼가 트랙에 들러붙으니 무릎과 팔로 엉금엉금 기었는데 그 장면을 솜뭉치들이 볼 걸 생각하면 암담해졌다.
이렇게 내 손으로 흑역사를 생성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갈 곳 잃은 분노가 차올라 답답한 가슴 대신 트랙을 팡팡 두드렸지만, 그때마다 쩍 하고 달라붙는 장갑 때문에 울화만 더 쌓였다.
이거 기획 누가 했어!!
힘으로 찍찍이를 뜯어내며 걸어간 찬이는 우리 중 가장 일찍 도착했지만, 그들이 간과한 게 있었다.
오늘 경기는 모두 팀플레이였고, 찬이가 가장 빨랐지만 같은 팀의 영빈 형이 가장 늦게 도착해버린 것.
같이 구르고 같이 기어 온 우리는 셋이 나란히 도착했고.
“이런 게 어딨어! 달리기잖아!”
“애당초 너도 달린 게 아니라 걸었잖아. 걷는 거나, 기는 거나!”
“감독님 이거 반칙 아니에요?”
“그렇게 따지면 구르는 것도 반칙이지!”
“최소한 걷기라도 하던가! 솜뭉치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냐?!”
“우승 트로피를 솜뭉치들에게 바칠 거니까 괜찮아!”
그 고생을 하고도 져서 분했는지 찬이는 우리 팀이 반칙했다고 하소연을 했지만, 나는 코웃음을 치며 피차일반이라고 일축했다.
본 경기가 이 정도인데 벌칙은 어느 정도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벌칙은 꼭 피해야 해…!
이런 우리를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바라보던 연출 감독님은 보름달 팀의 손을 들어주었다.
“보름달 팀은 룰의 빈틈을 잘 파악하고 파고든 거지 반칙은 아닙니다. 애초에 결승선까지 먼저 모두 도착하는 팀이 이기는 거라고 했으니까요.”
“너무해….”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거야, 세빈아.”
어떤 행동을 하지 말라고 제한하지 않았으니 반칙이 될 수 없었다.
세상 울적해진 우리 막내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한숨을 폭 내쉬었지만, 옆에 있던 경환 형은 팔짱을 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경환 형이 얄미웠는지 주먹을 말아쥐고 흔들었지만, 그런 모습에 굴할 형이 아니었다.
찬이는 금세 다음 경기는 꼭 이길 거라고 투지를 불태웠다.
다만, 준이 형과 영빈 형은 이 경기만으로 이미 모든 체력을 소진한 것처럼 보였다.
“자, 이어서 다음 경기장으로 이동합시다!”
“와아….”
감독님 말에 영혼 없는 리액션을 하며 각 팀의 멤버들에게 끌려가는 뒷모습이 형들의 현 상태를 말해주는 것 같았달까.
그렇게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또 다른 가벽 너머로 이동한 우리는 미니 골대의 모습에 이번에는 제대로 된 경기이려나 하는 기대를 품었다.
실제 축구 경기장보다는 훨씬 작은 크기였지만, 골대도 있었고 바닥에 선도 그어져 있었다.
카메라가 경기장을 잡는 사이 초췌한 몰골을 최대한 멀쩡하게 정리한 우리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외면했다.
어차피 방금 굴렀던 애들이 멀쩡해져서 돌아오면 영상 편집이 매끄럽지 않을 테니 포기하기로 했다.
“이번 경기는 다들 한 번쯤 해보셨을 텐데요, 축구입니다. 3점을 먼저 얻는 팀이 우승하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경기 룰은 국제축구평의회(IFAB)에서 정한 규칙을 기반으로 합니다.”
“갑자기 이렇게 구체적이 된다고요?”
“우리 감독님이 이럴 리 없는데?”
“크흠, 여러분이 평소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멀쩡한 얼굴로 멀쩡한 대사를 읊는 모습에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우리를 감독님이 슬쩍 외면했다.
솔직히 자기도 양심이 있으면 그동안 촬영하면서 우리 괴롭힌 거 생각해야 된다….
오죽하면 내가 무인도에 우리를 버려둔 PD님이랑 이분이랑 친구 아니냐고 했을까.
FIFA는 들어봤어도 IFAB, 국제축구평의회라는 곳이 있다는 건 처음 듣는 터라 멤버들도 나도 아리송한 얼굴을 했지만, 생각할 시간은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정규 경기처럼 오랜 시간을 드릴 수는 없으니 전반 15분 후반 15분으로 할게요. 그 전에 3점을 먼저 취득하는 팀이 있으면 그 팀이 우승입니다.”
“또 이상한 함정 넣어두신 거 아니죠?”
“이상한 함정이라뇨. 언제나 언래블이 즐겁게 게임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한 건데.”
“…예에….”
다시 한번 영혼 없는 대답이 이어졌고, 민망했는지 우리에게 각각 포지션을 정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골키퍼를 누가 하는 게 좋을까요?”
“경환이는 공격에 들어가는 게 맞을 거 같고, 몸으로라도 공을 막는 거니까 내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형은 멍 잘 들잖아요. 제가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상대 팀도 꽤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었고, 우리도 고심 끝에 포지션을 결정했다.
결국 골대 앞에는 각각 준이 형과 영빈 형이 서 있었다.
작은 골대에 선 형들을 보니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지만, 내 앞에 이글이글 불타는 눈을 한 찬이가 있어서 계속 웃을 수 없었다.
얘는 또 왜 이렇게 불타는 걸까…. 무서워.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건지 세빈이까지 눈을 빛내고 있어서 적당히 하자는 말이 목구멍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릴 지경이었다.
“얘들아, 절대 다치지 않게. 조심히. 그게 제일 중요하다. 알았지?”
“네! 이기고 올게요!”
“순순히 져줄 수는 없지!”
“살살하자….”
우진 형은 우리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는지 찬이와 세빈이에게 다시 한번 신신당부를 하고 갔다.
하지만, 이미 활활 불타고 있던 둘에게는 응원으로 들렸는지 의기양양하게 외쳤고, 경환 형은 그런 둘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형, 도발하지 말라고요!
그렇게 어느 때보다 뜨거운 경기를 할 준비가 끝난 경기장에 주심 복장을 한 분이 근엄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런 엄숙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감독님에게 물었다.
“저걸로 축구를 한다고요?”
“네. 저게 여러분의 축구공입니다.”
“…저게 어디가 공이에요!”
주심의 품에 안긴 것은 물을 빵빵하게 채워 포동포동해진 물풍선이었다.
툭 차는 순간 펑 하고 터지면서 물벼락을 내릴 것 같은 그 물풍선.
당황해서 어버버 거리는 우리 모습과는 상관없다는 듯 물풍선을 중앙선에 내려놓은 주심과 손을 흔드는 감독님.
그렇게 물풍선 축구가 시작되었고, 그 후 풍경도 달리기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형, 살살해요!”
“악! 안돼!”
“막아! 저거 걍 터트려!”
처음에 어느 정도 힘으로 차야 터지는지 가늠하려는 찬이와 경환 형의 시도 덕에 물풍선 공이 13개쯤 터졌다.
그리고 간신이 터지지 않게 골대까지 가져갔어도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정말 온몸으로 공을 막은 두 맏형은 쫄딱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버렸다.
날이 춥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추웠으면 전원 감기 걸려서 앓아누울 뻔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물풍선이 터질 때마다 공을 차는 사람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는 사람까지 물이 튀는 바람에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조심조심 물풍선을 굴려 가며 서로 골대에 풍선을 넣기 위해 애쓰던 우리는 결국 전반전은 무승부로 끝내야 했다.
“환아! 그냥 차버려!”
“야! 거기 서!”
그리고 후반전 경기 종료를 눈앞에 둔 시점, 내게도 기회가 왔고 준이 형의 외침에 힘입어 눈을 질끈 감고 물풍선을 발끝으로 톡 굴렸다.
사실 이걸 찼다고 부르기엔 너무 민망했지만, 힘을 주면 터져버리는 통에 별수 없었다.
물풍선은 완벽한 원형이 아니다 보니 굴러가는 게 자기 멋대로였다.
그렇게 마음대로 바닥을 구르던 물풍선은 진지하게 막으려던 영빈 형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리 사이로 쏙 빠져버렸다.
“골!”
“우와!!”
“환아!”
보는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너무 긴박한 30분이었고 너무 간절한 한 골이었다.
“형!”
국가대표로 출전해 골을 넣어도 이보다 기쁠까.
골이 들어간 순간, 나는 경환 형과 준이 형에게 달려가 서로를 얼싸안았다.
드디어 이 말도 안 되는 축구를 끝낼 수 있다는 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팀원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커다란 수건을 들고 온 우진 형에게 끌려가 몸을 닦아야 했다.
아무리 날이 춥지 않다고 해도 땀을 흘리고 젖고 하면 감기에 걸린다며 우진 형은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걱정이 좋았던지 찬이는 경기는 잊은 듯 해맑게 웃으며 우진 형의 등에 매달렸다.
쟤는 좋으면 사람한테 매달리는 버릇 좀 고쳐야 할 텐데.
그 후 이어진 경기들도 모두 정상은 아니었다.
다음 경기는 씨름이었는데 샅바를 가져다주길래 당연히 정말 씨름을 하는 줄 알았다.
씨름하는 모래판이 없어서 우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샅바를 매자, 스태프분이 들고 온 건 웬 손잡이가 달린 조그만 링이었다.
“여러분이 할 씨름은 손가락 씨름인데요, 해외에선 엄지 레슬링이라고 불리는 게임입니다.”
“네? 뭐요?”
“세계 챔피언을 겨루는 공식 경기가 있을 만큼 유명한 씨름이죠. 다들 아시죠? 경기 시간은 60초, 상대편 엄지손가락을 누르면 승리합니다.”
“저기, 그럼 샅바는 왜…?”
우리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든 말든 감독님은 줄곧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친절하게 경기 룰을 설명해주셨다.
앞에 경기하면서 힘들었을 테니 몸에 최대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선정했다고 했지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기는 토너먼트식으로 이뤄졌는데 놀랍게도 최종 우승자는 세빈이였다.
무용하며 기른 유연성이 손가락 씨름에도 좋은 영향을 준 걸까…?
단순히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경기가 아니었던 만큼 가장 재빠르고 유연한 세빈이가 우승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하나씩 경기가 공개될 때마다 어처구니없어하는 것도 잠시, 실제로 경기가 시작하면 멤버들은 모두 진지하게 경기에 임했다.
팀이 갈려있어서인지 이상하게 승부욕에 불타서는 질 수 없다고 이 악물고 덤비는 통에 상대하는 나까지 기운이 쪽쪽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손가락 씨름은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게 해주었달까.
그 후 이어진 경기는 양궁이었다.
그나마 양궁은 아이들용 장난감 활을 줬고, 인당 3발씩 쏴서 팀의 총 점수가 가장 높은 쪽이 이기는 간단한 경기였다.
처음에는 따로 연습 시간을 주지 않으려 했던 감독님은 우리 실력을 보더니 10분간 팀별로 연습하라고 시간을 주셨다.
놀라울 만큼 아무도 과녁을 맞히지 못해서 0:0으로 승부를 나눌 수 없었던 탓이었다.
연습을 끝낸 후에도 대부분의 멤버들은 실력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맏형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과녁을 하나둘 맞추기 시작했다.
뾱! 하는 소리와 함께 과녁에 들러붙는 화살을 보느라 세빈이는 가뜩이나 커다란 눈이 더 커졌고, 찬이는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맏형들은 모처럼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양궁 시합은 근소한 점수 차이로 영빈 형의 승리로 돌아갔다.
덕분에 최종 스코어는 2:2 동점.
“둘 다 전생에 엘프였어요?”
“엘프?”
“그 판타지에 나오는 활쟁이들….”
찬이가 엉뚱한 소리를 하긴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승리를 거머쥔 영빈 형의 뺨은 기쁨 때문인지 부끄러운 건지 발그레해졌다.
그걸로 영빈 형을 놀리던 준이 형은 결국 한대 얻어맞았지만.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경기, 배드민턴 시간이 돌아왔다.
가벽 너머 마지막 경기 공간으로 이동하던 우리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놀라지 말자고 우리끼리 다짐했다.
앞에 지나온 경기에서 너무 시달려 더는 놀랄 거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경기 시작과 함께 다시 한번 우리의 섣부른 다짐을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