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hurt(5)
“눈치가 제법 늘었는데?”
“으악!”
그런 찬이를 놀리듯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는 우진 형과 장난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방방 뛰는 찬이.
쟤는 우리랑 똑같은 거 먹는데 어떻게 저렇게 힘이 넘치지?
급격하게 피곤해진 나는 세빈이 눈을 가리며 다시 한번 주입식 교육을 시도했다.
“세빈아, 형이 찬이 닮으면 된다고 했어요, 안된다고 했어요?”
“안된다고 했어요. 큰일 난다고 했어!”
“옳지, 우리 세빈이 똑똑하다.”
“저기도 여기도 왜 죄다….”
주거니 받거니 시시덕거리는 나와 세빈이. 그리고 우진 형과 아직도 장난치고 있는 찬이 모습에 영빈 형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그 신세 한탄은 못 들은 걸로 하기로 했다.
“슬슬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래야지. 가자 얘들아. 비싸게 팔리길 기도해.”
“너무하네!”
낯선 현장에 대한 불안감이 우진 형의 장난 덕에 풀어져 있었다.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우리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안은 이상한 나라였다.
창고 안은 밖에서 봤을 때와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많은 스태프가 바쁘게 오가며 각자 맡은 일을 소화 중이었다.
“아, 언래블 왔어요?”
“안녕하세요!”
이미 몇 번의 촬영을 함께해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자 멤버들은 금방 경계심을 내려놓고 씩씩하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 애들은 아무래도 수사물을 덜 본 게 틀림없었다.
보통 납치 사건은 제삼자보다 얼굴을 아는 사람이 범인일 확률이 높다던데.
쓸데없는 생각으로 몸의 긴장을 조금 푼 나는 안에 준비된 세트를 슬쩍슬쩍 살폈다.
가벽 뒤의 세트를 최대한 열심히 들여다봤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오늘 촬영은 추석맞이 운동회에요.”
역시.
“몸 쓰는 거 못하는 사람은 어떡해요?”
“벌칙 받으면 되죠. 하하.”
세빈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어느새 옆에 온 FD가 짓궂은 얼굴로 답했다.
“어우, 너무해요.”
“너무하긴. 이기면 돼요. 참 쉽죠?”
“와, 형님. 그 말 진짜 꼭 돌려드릴 겁니다.”
“기대할게, 경환아.”
“애들 그만 놀리고, 얼른 촬영 준비합시다.”
서포트 팀의 도움으로 단장을 마친 우리는 가벽으로 막힌 세트장 앞의 오프닝 장소에 모였다.
“안녕하세요, 언래블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도 씩씩한 인사로 포문을 연 우리는 촬영 전 대략적인 설명을 머릿속에 잘 저장하려 애쓰며 활짝 웃었다.
몇 번의 촬영을 함께했고, 그때마다 제작진의 커다란 음모를 피해가느라 멤버들이 고생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만만한 PD와 카메라 감독님, 장난치던 FD 등 스태프들의 시선이 평소보다 반짝거리는 것이 왠지 불길했다.
그걸 느낀 건 나만이 아닌지 멤버들도 주변을 열심히 훑었다.
“자, 오늘은 민족의 대명절인 한가위를 맞이한 솜뭉치들을 위해 체육대회를 열 생각입니다.”
“질문이요!”
“네, 지환 군 말씀하세요.”
“한가위랑 체육대회가 무슨 연관인가요! 추석이면 송편을 만들거나 재밌는 게임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환이 말이 맞아요!”
“왜 체육대회인지 모르겠어요!”
“체육대회가 어떻게 솜뭉치들을 위한다는 거죠?”
몸을 움직이는 데 자신 있는 찬이랑 세빈이는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맏형들과 나는 반항을 시도했다.
체육대회라고 하고 이상한 걸 시킬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떠나지 않은 탓이었다.
포잉에게 현장을 둘러봐달라고 말했지만, 어째서인지 포잉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냥요.”
“네…?”
“그냥 하는 겁니다. 맛있는 걸 먹으려면 그만큼 움직여야죠.”
인자하게 웃는 FD의 대답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마냥 우리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냥이라고 하는데 거기다 뭐라고 해….
우리의 소소한 반항은 그렇게 불타오르기도 전에 얼어버렸고,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하준 형을 껴안았다.
“그래그래. 포기하면 편해, 환아.”
무어라 하소연하고 싶은데 말문이 막혀서 눈빛으로 억울함을 토로하자, 준이 형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었다.
물론 우리 애들은 그런 상황을 순순히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나도!”
“왜 또 둘이서만 친한 척해요!”
내 등짝에 찬이가 매달리고, 준이 형 허리에 세빈이가 매달리면서 주렁주렁 동생들을 달고 흉한 꼴이 돼버렸다.
우리랑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영빈 형과 경환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자, 진정하시고. 오늘도 팀전으로 진행될 겁니다. 팀을 나눠야겠죠?”
“네에….”
“나눠드린 종이를 한 장씩 뽑아주시고, 펼치지 말고 잠시 가지고 있어 주세요.”
간신히 찬이와 세빈이를 떼어낸 후 경환 형 뒤로 도망쳤지만, 영빈 형이 앞으로 끌고 나와서 결국 얌전히 서 있었다.
아, 진짜 몸 움직이는 거 싫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우리 앞으로 접힌 종이가 꽂혀있는 작은 병이 등장했다.
“자, 이제 종이를 펼쳐 보세요. 종이 안에 ‘추(秋)’자와 ‘석(夕)’자가 적혀있을 거예요. 같은 글자를 뽑은 분들이 한 팀입니다.”
“이게 추(秋) 맞지?”
“창피하니까 물어보지 마요….”
종이 한가운데 적힌 한자에 찬이가 세빈이한테 소곤거리는 게 들렸지만,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우리 애가 한문 모를 수도 있지, 그럼.
우여곡절을 거쳐 팀이 나뉘었고, 묘하게 또 밸런스가 맞는 터라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간질간질한 웃음이 담겨있었다.
“질문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힘찬 군.”
“팀명은 따로 안 지어요?”
또랑또랑한 눈으로 질문하는 찬이 모습이 낯설었다.
우리 찬이가 저렇게 적극적인 일이 몇 번 없었는데.
“팀을 나눴으니 팀명도 지어야겠죠? 각 팀의 주장 선발 후 팀명을 지어주세요.”
“네!”
하준 형, 경환 형, 내가 한 팀이었고, 영빈 형, 찬이, 세빈이가 한 팀이었다.
몸 쓰는 거면 저 쪽팀이 더 유리해 보였지만, 둘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 같은 게 걱정이었다.
영빈 형이 일찍 뻗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든든한 우리 팀을 바라보았다.
“팀명은 뭐로 하지?”
“추석은 보름달 아닙니까, 보름달로 하죠.”
“보름달도 좋은데 뭔가 우리 특색을 나타내는 이름이 좋지 않을까?”
준이 형이 고심하는 사이 경환 형이 보름달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무언가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던 준이 형의 안쓰러운 방어가 있었다.
이름이야 뭐가 되든 상관없었기에 형들 말을 듣는 척하며, 조금 떨어진 영빈 형 팀을 바라봤다.
“환아, 다른 팀에 관심 둘 때가 아니야. 이겨야지.”
“이기면 상품 있댔어.”
“상품!”
자꾸만 고개가 돌아가던 나를 빙그르르 돌려놓은 하준 형과 상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온 경환 형이 내 팔을 한쪽씩 잡았다.
“근데 팔은 왜 잡아요…?”
“너 자꾸 저쪽에 신경 쓰는 것 같아서.”
“하준 형이 잡길래?”
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결국 우리도 저 쪽팀도 팀명과 주장이 정해졌고, 주장이 된 나와 세빈이가 나란히 제일 앞에 섰다.
“각 팀 막내들이 주장이 됐네요. 팀명과 각오 한마디씩 해주세요.”
눈을 반짝이며 날 보는 세빈이를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주장이 된 환입니다…. 저희 팀명은 보름달이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주장님, 왜 보름달인지도 설명해야죠!”
“상대 팀 질문은 안 받습니다!”
우리 팀도 아닌 상대 팀에서 팀명을 설명해달라는 요청이 나왔다.
예상한 대로 찬이었고, 나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이야, 보름달 팀 주장은 칼 같네요. 좋아요. 역시 승부의 세계는 냉정해야죠.”
“저도 본받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송편 팀 주장 세빈입니다~!”
“두 팀 모두 추석과 가장 어울리는 단어로 팀명을 지었네요. 확실히 추석을 기다리고 있다는 마음이 느껴지네요. 자, 지금부터 이번 게임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총 5가지 경기가 진행되고, 3판을 이긴 팀에는 우승 상품이, 진 팀에는 벌칙이 주어진다는 간단한 내용이 이어졌다.
우승 상품은 푸짐하게 차려진 추석 음식 한 상과 조기 퇴근권이었다.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한 일찍 숙소로 돌아갈 수 있는.
조기 퇴근권에는 푸근하게 웃고 있는 대표님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어서 조금 무서웠다.
경기는 지구력, 협동심, 순발력을 살필 수 있는 종목으로 정했다며, 함께 달리기, 축구, 양궁, 씨름, 배드민턴 이렇게 다섯 가지를 소개했다.
저 싱글벙글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아는 그 스포츠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팀별로 색이 다른 조끼까지 주어지자 멤버들의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고,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승 상품이 탐나기보다는 아직 알려주지 않은 벌칙이 무서워서였다.
그 후 가벽으로 가려졌던 첫 번째 스테이지로 향한 우리는 주어진 운동화와 트랙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걸… 신고 저길 뛰라고요…?”
“네. 팀원이 모두 먼저 도착한 팀이 이기는 겁니다.”
더듬거리며 입을 연 영빈 형의 얼굴이 평소보다 허연색이 돼버렸다.
운동화와 트랙에 붙어있는 건 소위 찍찍이, 그러니까 벨크로였다.
“여러분을 위해서 최대한 접착력 좋은 거로 특별히 준비했어요.”
“그, 허. 아니, 그… 한번 발붙여봐도 돼요?”
“안됩니다. 모두 공평하게 한 번에 하셔야 해요.”
당황해서 말이 꼬인 내가 겨우 질문했지만, 웃는 얼굴로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냥 달리기를 시키진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러면 달릴 수가 없는데. 이게 과연 달리기인가.
혼란스러운 멤버들의 얼굴이 여과 없이 카메라에 담기고 있었다. 평소처럼 어떻게 수습해보려다, 운동화 밑창을 만지는 찬이 모습에 포기했다.
“이거 잘 안 떨어질 텐데 어떡하죠?.”
“굴러가는 게 더 빠른 거 아냐?”
“굴러가면 반칙일걸? 물어볼까?”
“얘들아, 안 다치게 조심해야 한다.”
진지하게 이 경기에서 우승하겠다고 전략을 짜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할 말이 없어졌다.
영빈 형은 둘을 포기한 듯 다치지만 말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고 있었다.
“주장, 어떻게 할 거야?”
이런 풍경과 관계없다는 듯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을 한 경환 형이 물어왔고, 멍하니 운동화만 바라보던 준이 형의 시선도 나를 향했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내가 어지러운 머릿속 정리를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이번 판은 몸풀기로 생각해요, 우리. 다음 판에서 잘하면 되죠.”
“아무래도 이기긴 힘들겠지?”
“그래도 형들이 다리가 기니까 보폭을 크게 걸으면….”
나름대로 팀별로 작전 회의까지 마치고 나니 이제 달려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달릴 수 없는 달리기라니, 이게 무슨….
그리고 시작된 경기는 우리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예상보다 더 못 볼 꼴을 많이 만들어냈다.
용의주도한 제작진이 우리가 입은 팀별 조끼까지도 들러붙는 재질로 만든 터라 넘어지기라도 하면 온몸으로 발버둥 쳐야 했다.
게다가 달리기 직전 주어진 목장갑에도 찍찍이가 붙어있었다.
“이게 어디가 달리기야!”
“형, 참아! 안돼!”
“으갸갸아아!”
잘 안 떨어질 테니 아예 멀리 뛰어 거리를 벌리겠다는 야심 찬 찬이 계획도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팀원들과 시작부터 멀어진 탓에 혼자 바닥에 붙어 버둥거리며 세빈이와 영빈 형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애타게 불리는 두 명의 상황도 크게 좋지 못했다는 게 슬플 뿐.
우리 팀이라고 멀쩡하진 않았다.
평소에 목소리를 잘 높이지 않는 준이 형이 울컥해서 소리 지를 정도면 말 다 했지.
한 걸음씩 떼는 것도 힘든데, 균형을 잘못 잡아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지옥문이 열렸다.
개인전이 아닌 팀전이기에 뒤처진 멤버를 버리고 갈 수도 없었다.
이런 곳에서 전우애를 다지고 싶지는 않았는데.
궁상맞게 쩍 하는 소리를 내며 붙었다 떨어지는 찍찍이가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