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84)화 (184/456)

184. hurt(4)

“뭐, 우리 손발이 없어져도 광고만 잘 됐으면 좋겠다.”

“우리 첫 광고니까 진짜 잘됐으면….”

“우리 손발보다는 찬이 손발이 먼저 없어질 듯.”

실컷 놀림 받아 터질 것 같이 잘 익은 찬이를 두고, 세빈이와 경환 형은 후련한 얼굴로 연습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악독한 인간들….”

“와, 우리 차니 악독한 이란 표현도 알아?”

“힘찬이 그만 놀려, 얘들아.”

이를 득득 갈면서 경환 형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굴던 찬이도, 싱글벙글하던 경환 형도 모두가 준이 형 한마디에 얌전해졌다.

허구한 날 팔랑팔랑 장난칠 거리를 찾아 헤매는 이 말썽꾸러기들을 잘 관리하는 준이 형을 보고 있노라면, 형이 집에서는 막내라는 게 신기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영빈 형을 빼면 모두 막내거나 외동이었다.

정작 여동생이 있는 영빈 형은 동생들에게 매번 휘둘려 이리저리 흔들리기 바빴다.

문득 영빈 형이 집에서도 여동생에게 휘둘리려나 궁금해졌다.

우리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각자의 가정사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일상적인 대화에서 나오는 몇 마디 단어, 뉘앙스에서 ‘그렇구나’하고 넘어갈 뿐.

언제 한 번쯤은 멤버들의 과거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을 통해 하준 형, 영빈 형, 경환 형, 세빈이의 공개된 가족사는 조금 알고 있었지만, 이들이 전생의 언래블이 아닌 만큼 내 기억과 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가족 구성원이 같다고 해서 내용까지 같을 수는 없으니까.

더군다나 힘찬이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게 없었다.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냐, 계약자야.’

‘꿍꿍이라니. 그저 우리 애들의 과거에 대해 궁금해할 뿐인데.’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너무 악당 같아서 너희 막내가 무서워하고 있음.’

‘아, 진짜?’

서둘러 표정을 잘 갈무리하고 고개를 돌리자 세빈이가 눈을 껌벅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막둥이 왜?”

“갑자기 형 표정이 예전처럼 보여서 놀랐어.”

“예전처럼?”

“어… 좀 차가워졌다고 해야 하나? 여튼 그랬어요.”

전생의 마지막과 현생의 시작을 함께한 세빈이는 여러모로 내게 큰 의미였다.

혼자 생각에 빠지느라 표정이 없어졌을 뿐인데, 세빈이한테는 좀 다르게 보였나 보다.

연습생 때의 일들이야 나에겐 남의 기억처럼 남아 있어 별 감흥 없었지만, 멤버들은 자신의 기억인 만큼 무언가 다를 터였다.

“잠깐 뭐 좀 생각하느라. 아직도 형이 무서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안 좋은 일이 있나 했죠.”

“환이는 정색하면 인상이 좀….”

“인상이 좀 나빠도 인성은 제일 괜찮은 듯.”

“왜 자꾸 랩에 욕심내냐.”

“너 어디 가서 랩 하지 마라, 진짜. 우리 팀 수준 의심받는다.”

세빈이의 근심, 걱정을 덜어주려고 시작한 대화가 갑자기 내 랩 실력의 비난으로 이어졌다.

“아니, 내가 각 잡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말한 건데!”

“너 은근히 라임 맞추려고 하는 게 있다니까.”

“각 잡고 해도 랩은 아냐. 아창 때 네가 쓴 랩 파트를 난 잊을 수가 없다.”

“우리 화니는 노래랑 요리가 딱이야.”

“아니, 노래는 그렇다 치는데 요리는 또 왜….”

경환 형과 찬이의 근본 없는 디스에서 나를 구제해 준 건 팀장님이었다.

“병아리들!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본업 하러 갑시다.”

“근데 저희 언제까지 병아리예요?”

“병아리가 커봤자 닭이잖아. 닭에서 더 자라면 뭐야?”

“그럼 치킨 되지 않을까요.”

“이 꿈도 희망도 없는 것들아….”

팀장님이 와서 랩 논란은 사라졌지만, 우리의 무근본 대화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팀장님 뒤를 따라 걸으며 치킨이냐 백숙이냐를 쑥덕거리는 멤버들의 뒤에서 하준 형의 포기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리더의 짐이 참 무거운 것 같았다.

나라도 우리 준이 형 말을 잘 들어줘야지.

어미 오리를 따라 걷는 새끼오리들마냥 졸졸 팀장님을 따라 걷다가, 익숙한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이루어진 대화는 회의라기보다 여태까지 우리 성과에 대한 전반적인 피드백이었다.

데뷔 앨범 때도 활동 중간과 활동 마무리에 진행 상황에 대해,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우리 의견을 묻기도 하고 회사 방침을 전달해 주기도 했었다.

첫 앨범 땐 몇 번 무대에 못 서보고 그대로 활동을 종료해서 정확한 비교가 어렵지만, 여러 면에서 더 나아졌다는 걸 객관적인 평가로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짧게라도 출연했던 프로그램도 더 많아졌고, 앨범의 판매 추이, 음원 사이트의 순위 변동 등 모든 면에서 더 나아졌다고.

너희가 잘하고 있다고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우리를 인정해준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해졌다.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게 나만이 아니었는지, 하준 형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다른 멤버들도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자꾸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걸 보아하니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리패키지 앨범에 대해서는 이전에 설명해줬지? 편곡되는 대로 재녹음해야 하니까 한동안 목 관리 더 신경 쓰고.”

“네. 꿀물 열심히 마실게요.”

“신경 쓸게요!”

“그리고 발렌느에서 이번 패션쇼에 크게 흥미를 느낀 것 같아. 너희가 촬영할 화보에 대해서도 신경 많이 써줬으면 하는 얘기가 있었어.”

“아….”

생각보다 이번 패션쇼가 꽤 이슈가 된 것 같았다.

도시별 텀이 있는 데도 그사이에 끊임없이 관련 기사들이 올라오고 있는 편이라고.

“이번 화보 주제를 서울 쇼에서의 주제를 따와서 쓸 거라고 했어. 기부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판매 금액의 일정 부분을 기부한다고 하더라고.”

“저희가 잘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일에 함께할 수 있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했고, 노래할 무대를 준다고 해서 기쁘게 준비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판이 커지는 것 같아서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쭈뼛거리며 우려를 표하는 세빈이의 질문이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잠깐 봤던 기사에서 어떤 사람이 남긴 댓글이 눈에 아른거렸다.

괜히 물타기 해서 인지도 높여보려 한다고, 수준 알만하다고 하던 글이.

이래서 회사 사람들이 기사는 봐도 댓글은 보지 말라고 했구나.

“뭐래. 너희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물론 앞으로는 더 잘해야지. 정확히는 신인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평이지만.”

여태까지 팀장님은 공적인 부분에서는 당근보다 채찍이었다.

언제나 우리에게 냉정한 현실을 짚어주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채근하는 역할을 도맡아 하셨다.

우리가 확신을 잃고 불안해서 우울해질 때면, 그걸 품어주는 건 우진 형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석환 형이 우리 일을 함께 봐주고 있는 상황에서도 연습생 때부터 부대껴온 우진 형에게 훨씬 더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냉정하게 지적하던 팀장님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말을 해주니, 이 상황이 너무 낯설어서 손가락이 절로 꼼지락거리는 것 같았다.

“얘들아, 봐봐. 숫자는 거짓말을 안 해. 너희는 정말로 조금씩 잘 크고 있어. 물론 여기에 만족하면 안 되겠지. 앞으로 훨씬 더 많이 노력해야 하고.”

산만한 덩치의 남자애들이 눈만 깜박거리면서 팀장님의 말을 기다리는 상황이 웃겼는지, 팀장님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누가 뽑은 애들인데. 부지런히 자라자, 우리 병아리들.”

“팀장님…!”

좀처럼 듣기 힘든 귀한 칭찬에 찬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팀장님을 와락 껴안았다.

“아이고, 놔, 이놈아! 아파!”

찬이를 시작으로 우리는 하나둘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다 같이 팀장님을 얼싸안았다.

그 와중에 우리 세빈이는 우진 형까지 챙겨와서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껴안고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그만해! 나 죽는다, 이것들아!”

“좋아서 그러져! 평소에 칭찬하면 죽는 병 걸린 우리 팀장님이!”

“뭐라고?”

“으하하하!”

우리는 누가 보면 음방 1위라도 한 줄 알만큼 오랫동안 즐거움을 만끽했다.

우리 사이에서 짜부라진 팀장님이 참지 못하고 등짝을 내리칠 때까지.

여태까지 회사 사람들과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우리와는 공적인 관계라는 느낌이 컸다.

우리는 ON 엔터의 대표적인 캐시카우 배우들처럼 막대한 계약을 따오는 것도 아니었고, 연수 선배님처럼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것도 아니었다.

그에 비해 회사에서 투자하는 비용은 또 압도적이어서, 가끔 다른 부서의 사람들이 투덜거리는 걸 못 들어본 멤버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멤버들은 늘 회사에 대해 작은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건지, 우리가 의견을 내서 만든 앨범들인데 투자 비용 대비 결과가 초라한 건 아닌지…. 온갖 눈치 보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멤버들은 그래서 늘 칭찬이 고팠다.

이제 첫걸음을 뗀 상황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인정받고 싶어 했다.

매일 밤,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러그 위 대화에는 멤버들의 그런 마음이 녹아들어 있었다.

“어휴, 진짜…. 너희가 이러니까 내가 칭찬을 못 하는 거야. 조금 칭찬해 줬다고 이렇게 들떠가지고!”

“헤헤.”

“팀장님도 좋으시면서.”

사석이 아닌 회의실이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그 자체로 인정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는지 멤버들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흐물흐물하게 녹아있었다.

팀장님도 그런 멤버들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빙구처럼 웃고 있는 우리에게 잔소리할지언정 평소처럼 엄하게 대하진 않았다.

“빨리 우진이랑 촬영이나 하러 가!”

“니엡!”

“다녀오겠습니다~.”

“잘하고 올게요, 팀장님!”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 팀장님을 뒤로하고 우리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우진 형을 따라갔다.

오늘은 외부 스케줄이 아닌 언래블 스토리의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얼굴이 활짝 핀 멤버들을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들 보듯 기특한 얼굴로 바라보던 우진 형이 차 안에서 입을 열었다.

“팀장님이 이번 앨범 활동에 공을 많이 들이고 계셔. 실장님이랑 두 분이 영업도 엄청 열심히 다니고 계시고.”

평소 우진 형은 우리에게 회사 내부의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았다.

우리 일상을 챙겨주고, 해야 하는 일정에 대해 꼼꼼하게 챙겨주는 것과는 별개로 굳이 알아서 머리 아플 일은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는 편이었다.

너희는 아티스트니까 너희가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하면서.

그런 우진 형이 먼저 말을 꺼낼 정도면 다른 분들도 우리를 위해 무척이나 노력하고 있다는 것 같아서 멤버들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저희가 더 열심히 할게요.”

“맞아요. 연습도 더 많이 하고 노력할게요.”

“그래. 지금처럼 부지런히 움직이고 노력하면 되는 거야.”

기합을 넣는 멤버들을 룸미러를 통해 슬쩍 바라본 우진 형이 평소처럼 웃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든든한 이 사람이 우리 매니저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득, 이전 생 언래블의 매니저가 누구였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마지막에 세빈이와 함께 있던 사람은 석환 형이었다.

보통 연예인과 오랜 시간 함께하는 매니저는 팬들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매니저에게 별명이 붙기도 하니까.

전생의 언래블을 떠올려봐도, 매니저인 우진 형에 대한 기억이 이상하리만큼 가물가물해서 괜히 불안해졌다.

나중에 조금 더 진지하게 기억을 더듬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덜컹하는 흔들림에 정신을 차렸다.

“내리자, 얘들아.”

오늘 언래블 스토리를 촬영할 현장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어? 여기에서 촬영한다고요?”

생각에 빠져있느라 주변 풍경을 보지 못했던 나는 차에서 내린 후에 보이는 풍경에 눈만 꿈벅거렸다.

어떤 내용으로 촬영할 건지는 현장에 가면 알 수 있다는 말만 듣고 왔는데, 우리 눈앞에 있는 건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이었다.

댕그래진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찬이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우진 형의 소매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태까지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였기에, 마치 우진 형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찬이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형, 우리 팔려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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