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82)화 (182/456)

182. hurt(2)

1차 의상의 워킹이 끝났다.

모델들에게는 의상을 갈아입고 숨돌릴 시간을, 쇼에 방문해준 손님들에게는 분위기를 전환해줄 시간이 다가왔다.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새벽 형들의 노래 전주가 흘러나오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객석에서 들려왔다.

어둠을 틈타 무대에 오른 우리는 가영 형, 키스 형, 세비 형과 차례대로 눈을 맞추고 슬그머니 웃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형들이랑 언래블 모두가 함께 무대에 오르는 날도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긴장감을 조금 달래주었다.

느릿하게 흐르던 피아노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심장을 두드리는 베이스기타 소리와 함께 가영 형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무대를 갈랐다.

그와 함께 우리가 서 있는 무대에 눈부신 조명이 켜지고 그 아래 못된 장난을 꾸미는 악동 같은 미소의 가영 형이 있었다.

원래는 안무가 없는 노래였다.

새벽은 밴드 그룹이어서 기존 아이돌과 같은 댄스가 들어간 곡이 없었다.

그러나 가영 형이 편곡하면서 우리에게 간단하게라도 안무를 넣어달라고 요청했고, 덕분에 우리가 무대에 있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다.

새벽 형들이 우리를 위해 일부러 춤을 출 수 있도록 편곡했다는 걸 알기에 모두 머리를 싸매고 알고 있는 안무들 중 간단한 것들만 뽑아냈다.

세비 형과 키스 형이 각각 베이스기타와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런웨이를 걸으며 가영 형의 노래를 받쳤다.

그런 가영 형 옆에는 영빈 형이 있었다.

“우아한 손길에 맥없이 흩어지는 내 숨결이 죄라면, 순결한 내게 목줄 채운 너는 뭐야.”

키스 형의 평소 말투보다 열 배쯤 낮고 끈적한 목소리를 내는 가영 형의 모습에 춤을 추는 내내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속삭이듯 내 귓가에 말하는 단어. heaven. 그래, heaven. 상냥한 짐승이 속삭인 heaven.”

하지만 그 곁에 나란히 서서 노래하는 영빈 형의 모습도 가영 형에게 꿀리지 않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우리 메보가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이라고, 모든 사람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은 잠시 접어두었다.

지금은 무대 위니까.

미끄러지듯 손안에서 쥔 스탠딩 마이크를 굴려 맞은 편에 있는 찬이와 바꿔 쥐며, 우리는 마이크를 축으로 몸을 각자 위치로 돌렸다.

좁은 무대에선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없기에 생각해 낸 방법이 시선을 분산시키자는 것이었다.

화려한 손놀림으로 기타의 현 위를 춤추는 키스 형과 세비 형의 손. 그들이 런웨이를 오가며 사람들의 시선을 잡고, 메보들이 귀를 사로잡고.

너무 붕 뜨지 않도록 우리가 무게추가 되어 무대를 툭툭 눌렀다.

나와 멤버들의 움직임에 따라 무대 위로 구두 굽이 무대에 부딪히는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드럼 스틱을 부딪쳐 리듬을 만드는 것처럼, 기타 현이 진동해서 만들어내는 음들 사이로 하나의 악기처럼.

절정을 향해 내질러진 가영 형의 목소리는 어느새 객석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 직후 늘 장난기 가득했던 그 얼굴에 진득한 느낌의 미소가 걸리고, 우리가 런웨이로 향했다.

‘ㅂ’형 무대 가운데에 선 키스 형과 세비 형의 얼굴에도 즐거운 듯한 미소가 걸렸고, 곧 가영 형이 그사이에 섰다.

익숙하다 못해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Confusion의 반주가 녹아내리듯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원래 랩 파트였던 가사를 가영 형이 시작을 알리는 전주처럼 읊었다.

“그만해, 어차피 그 앞은 절벽.

날개를 뺏긴 너희에게 남은 건 추락뿐.”

기존의 가사를 조금 바꿔 부르는 가영 형의 노래가 마치 악당들에게 보내는 경고 같았다.

평소 무대 의상이 아닌 쇼 의상을 입은 우리이기에 안무를 최대한 빼고 워킹하듯 런웨이를 누비며 노래했다.

“날 수 없다면, 기어 올라가면 돼. 어차피 한 번 더 떨어지는 것뿐이야.”

올백으로 넘겨놓은 머리가 어느 순간 땀에 젖어 흘러내렸다. 그게 못내 거추장스러웠던 나는, 안무인 것처럼 머리를 쓱 쓸어넘기며 객석을 향해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반대편 라인에서는 찬이가 프린팅 티가 아닌 올블랙 수트 차림으로 불량하게 걸었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짓궂은 미소를 머금고.

“붉은 꽃잎 위 떨어진 너를 기억해.

나보다 먼저 그 아래로 가버린 너희를 어떻게 잊겠어?”

검은 가죽 재킷 안에 입은 목 폴라티가 운동으로 다져진 경환 형의 몸 윤곽을 드러냈다.

무표정한 얼굴로 새벽 형들이 서 있는 중간 무대를 스치듯 지나며 노래하는 그 모습은 영웅을 자처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비아냥 같았다.

원곡의 가사를 조금 바꿨을 뿐이고, 우리가 하는 퍼포먼스가 달라졌을 뿐인데 전혀 다른 곡이 돼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보일 수 있도록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건 누가 뭐래도 새벽 형들의 연주였다.

광고 현장의 감독님이 본부장 같다고 평했던 영빈 형이 흰색 블레이저의 깃을 빳빳하게 세운 채 런웨이를 걸었다.

다른 멤버들은 엄두도 못 내는 고음 파트를 저렇게 태연하게 걸으면서 부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 영빈 형의 맞은편에선 봄바람처럼 다정한 웃음을 머금은 하준 형이 베이지색의 기다란 카디건을 로브처럼 휘날리며 걸었다.

“A revolution has begun, 기대되지 않아?”

아무래도 좋았다.

몸을 울리는 커다란 악기들의 소리도 그만큼 신나있는 멤버들의 얼굴도.

그저 무대에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퍼포먼스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즐거웠다.

그렇게 무대는 끝을 향해 달려갔고, 마지막은 가영 형과 세빈이가 함께 불렀다.

“Are you ready to be surprised?”

“기억해, 혁명은 가장 밑에서 시작되는걸.”

노래의 마지막 구절과 함께 일제히 꺼지는 조명.

그사이 우리는 가쁜 호흡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후다닥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조명이 다시 켜지기 전에 모습을 감춰야 했기에 마음이 급했다.

제일 앞줄에 앉아있는 연예계 선배님들과 관계자들, 기자들의 시선이 우리 등 뒤에 들러붙었다.

그들이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워졌다. 좋아해 줬으면 좋겠는데.

우리가 준비했던 MR이 끝나는 시점에 맞춰 다시 쇼 음악이 흘러나왔다. 두 곡이 퍽 자연스럽게 이어져 마치 하나의 곡 같았다.

대기실에 도착한 우리는 등 뒤로 울리는 음악 소리를 흘려들으며 모두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죽겠다….”

“끙….

“눕고 싶다. 진짜로.”

사방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기다리던 서포트 팀 직원분들이 달라붙어 땀을 닦아주었다.

애당초 새벽 형들은 악기 보관 외에 별도로 챙겨줄 매니저나 다른 직원들이 따라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ON 엔터에서 함께 케어하기로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축 늘어진 파김치 같던 사람들이 흐물거리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무대 의상이 망가질까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불편했다. 빨리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기에 우리는 쉬기보다는 탈의를 택했다.

벗어놓은 옷가지를 한쪽에 잘 챙긴 나는 멤버들을 바라보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밖에서도 집에서처럼 막 그러지 말라고, 응?”

“힘들어서 그러지…. 왜 오늘도 잔소리냐.”

우리 땀으로 범벅이 된 의상을 챙겨야 하는 누님들에게 괜히 미안해진 나는 곱게 벗지 못한 찬이를 구박하며 의상을 챙겼다.

“꼭 저런 애 있어. 양말 벗으면 그 뒤집어진 채로 걍 빨래 바구니에 넣는 애들.”

“아 진짜 극혐.”

“그걸 지가 다 빨면 모르겠는데, 꼭 그런 애들이 빨래도 안 해요.”

“와, 완전 찬이 형인데.”

“그 정도는 아니거든?!”

혹시라도 의상이 섞일까 각각 다른 쇼핑백에 잘 넣어둔 나는 갑자기 양말과 빨래로 설전이 벌어진 상황은 무시하기로 했다.

잠도 설친 데다 아침부터 쭉 연습하고 무대에 올라 몸도 정신도 피곤했다.

하지만, 호텔에서 하루 더 자고 가자는 새벽 형들의 꼬심에도 우리는 바로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아무래도 숙소가 제일 편했기 때문이었다.

우진 형과 팀장님이 우리에게 잠깐 쉬고 있으라고 이야기하고 나간 터라 대기실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아, 기사 떴네.”

“벌써요?”

세빈이와 찬이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한참 동안 인터넷에는 손도 대지 않았던 멤버들이 최근에는 슬금슬금 기사를 찾아보는 것 같았다.

팬들이 우리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지, 기사는 어떻게 뜰지 궁금한 건 당연했다.

다만, 회사에서도 맏형들도 인터넷을 하지 말라고 하니 최대한 꾹 눌러 참고 여태까지 버텼던 것.

사실 지금까지 참고 버틴 것만 해도 멤버들을 칭찬해야 할 만큼 잘한 일이긴 했다.

시작부터 너무 요란한 사고에 휘말린 탓에 회사가 한참 단속하던 시기에는 무서워서라도 다 같이 멀리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회사에서 보여준 지표도 나날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다 보니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가영 형이 내민 화면에 다양한 기사 제목들이 매운맛이 날 것 같은 자극적인 단어들과 함께 주르륵 떠올랐다.

[런웨이를 빛낸 숨 막히는 뒤태, 최강 주인공은 누구?]

[재능 기부의 순기능을 보여주마, 남심 여심 저격한 최대 판매량은 누구 몫?]

[여태껏 보지 못한 악당의 은밀한 사생활, 여기가 런웨이야 스튜디오야]

[유쾌한 선한 영향력을 보이고 싶었다던 미리내 예나, 섹시 도발 악당으로 변해]

“뭔가 기사들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 같은데요.”

“내 말이. 아, 그래도 이건 좀 괜찮더라.”

좋은 일을 하자고 모인 사람들인데 제목부터 영 클릭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때, 떨떠름한 얼굴을 한 나에게 키스 형이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아, 형!”

“왜. 내용 괜찮고 사진도 괜찮은데.”

내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지르자 경환 형과 영빈 형이 궁금한 표정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키스 형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런웨이에서 웃고 있던 내 사진이 꽤 좋은 내용과 함께 떠올라 있었다.

물론 다른 분들의 사진과 내용도 있었지만, 키스 형이 일부러 그 부분을 나에게 보여줬다는 건 모를 수 없었다.

“환이 얼굴 터질 것 같아. 바늘로 콕 찔러보고 싶다.”

“콕 찌르기 전에 니가 퍽하고 터질 것 같으니까 하지 마.”

“헐. 잔인해….”

열이 오른 얼굴을 부채질로 식히던 나는 옆에서 깐족거리는 찬이와 가영 형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환이 사진 진짜 잘 나왔다. 누구야?”

“뉴데일리 이진아 기자님이네.”

“처음 보는 이름인데 괜찮게 풀어주셨네.”

“어? 방금 또 올라왔는데, 사진.”

덤덤한 목소리로 내 사진이 잘 나왔다고 말하는 키스 형을 보는 건 게임 벌칙을 받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가영 형처럼 놀리는 거면 드잡이질이라도 해볼 텐데, 저 형은 정말 칭찬해주는 거라 뭐라 대꾸할 방법이 없었다.

다들 슬그머니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키스 형이 방금 올라왔다는 사진을 꾹 눌러 크기를 키운 채 우리에게 보여줬다.

우리가 뛰어놀았던 그 무대의 사진이었다.

“와…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까 형들도 되게 멋있다.”

“잠깐, ‘사진으로 보니까’가 매우 거슬리는데?”

“알았어요, 정정해줄게요. 가영 형도 이렇게 보니까 멋있네요!”

“이렇게 또 우리 병아리가 솔직하지 못하고.”

눈을 살짝 내리깔고 기타 넥을 움켜쥔 세비 형, 고개를 비스듬히 들고 들뜬 눈을 한 키스 형, 누가 봐도 악당 같은 웃음을 머금고 마이크를 든 가영 형은 정말로 멋있었다.

사진 속 형들의 모습이 감탄이 나올 만큼 잘 찍혔지만, 사실은 무대 위에서 생명력을 뿜어내던 그 모습에는 비할 수 없었다.

다만 그런 사실을 입 밖으로 내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던 터라 괜히 투덜거렸다.

“너희 사진도 있다. 누구 동생들인지 잘생겼네.”

세비 형이 고개를 빼꼼 내민 세빈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주자 경환 형이 순하게 눈을 껌벅이며 자기 머리도 들이밀었다.

그 모습에 이마를 부여잡은 준이 형, 낄낄대고 웃으며 찬이 등짝을 때리는 가영 형.

왜 이 멤버로 있을 때는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경환 형의 머리를 세비 형이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경환 형, 앞으로 더 많이 칭찬해줘야겠다….

“잘생긴 건 맞는데, 너희 표정 왜 이렇게 야하냐?”

이 난장판에서 홀로 여유로웠던 키스 형까지 우리 표정이 너무 야하다며 웃고 있었다.

야하다는 말에 순진하게 눈을 끔벅거리는 찬이와 세빈이가 있었고, 목덜미가 붉어진 준이 형과 경환 형이 있었다.

그런 멤버들 반응과는 상관없다는 듯, 내 옆에 온 영빈 형이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에, 나도 진심을 듬뿍 담아 답했다.

“집에 가고 싶다….”

“저도요….”

우진 형, 빨리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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