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hurt(1)
신기한 경험이었다.
꿈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꿈, 그런 걸 자각몽이라고 한다고 했던가?
꿈속에 나는 에단 선생님과 작곡 수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생님과 내가 마주 보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또 다른 내가 허공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그런 이상한 상황.
키보드 건반을 의미 없이 몇 번 통통 튕기듯 두드리는 에단 선생님의 손가락이 선명하게 보였다.
“지환아, 작곡이 뭐라고 생각하니?”
“네?”
“말 그대로야. 작곡은 뭘까.”
에단 선생님은 평소에도 뜬구름 잡는 질문을 곧잘 던졌다. 뜬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질문에는 진지하게 고민 후 답하곤 했다.
그날의 나도 미간을 찌푸려가며 열심히 고민하다 겨우 한마디를 입 밖으로 꺼냈다.
“하고 싶은 말을 노래로 만드는 게 작곡 아닐까요?”
“그래, 그게 지환이 네가 만드는 곡의 정체성인 거야. 그런데 그게 한쪽으로 치우치는 건, 네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거라는 뜻이겠지?”
“그… 렇겠죠?”
“그러면 언래블의 환이 아닌 지환으로 곡을 만들어 보는 건 어때?”
“네?”
의미 없다는 듯 무성의하게 통통 두드리던 피아노 건반이 어느 순간부터 하나의 멜로디를 이루기 시작했다.
여전히 에단 선생님과 나는 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점점 둘의 목소리는 뭉개지고 섞이며 이상하게 들리기 시작했고, 건반 소리만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윽고 귀가 울릴 정도로 소리가 커졌다. 버티기 힘들어져 그 장소를 벗어나려 했지만 허공에 멈춘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이게 뭐야….’
차라리 빨리 꿈에서 깨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한참 동안 귀를 틀어막고 발버둥 치던 몸이 갑작스레 위로 올라갔다.
작업실 천장을 뚫고 위로, 위로 하염없이 소리를 피해 도망가던 나는 어느 순간 눈에 보이는 풍경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가 어디야…?’
새까만 공간 안.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겁이 많은 평소의 나라면 무서워해야 마땅한 공간이었지만, 이상할 만큼 마음이 편했다.
복잡한 것들을 모두 다 잊고 이대로 그냥 여기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새까만 공간이 주는 편안함에 눈이 조금씩 감기고 있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이대로 잠들어도 괜찮은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마저도 금세 녹아내렸다.
그렇게 눈이 감기려던 순간, 갑자기 사방에서 빛이 들이쳤다.
아니, 그게 빛이었는지 소리였는지 그도 아니면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혼란스러운 순간이었다.
무언가 가득 나에게 쏟아진 것 같기도 했고, 우주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비명을 질렀던 것 같았지만 입 밖으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 것 같다는 공포에 질려 발버둥 치던 나를 구해준 건 하준 형이었다.
“환아, 정신 차려봐!”
“…!”
“얘 좀 봐, 무슨 꿈을 꿨길래 얼굴이 질렸어.”
급히 숨을 들이켜고 내뱉는 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간신히 정신을 차리자 눈앞에 준이 형과 소현 팀장님이 보였다.
좀처럼 초점이 맞지 않아서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고 나서야 그들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둘의 얼굴과 등 뒤로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을 인지하고 나서야 지난밤 잠들었던 호텔이라는 걸 깨달았다.
“너 괜찮아?”
“네. 괜찮은 것… 같아요.”
흐리멍덩하게 대답하는 내가 못 미더웠는지 이마를 짚어보던 소현 팀장님은 해열제를 먹는 게 좋겠다는 말을 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나 늦잠 잤어요?”
“많이는 아니고. 평소에 안 깨워도 잘 일어나던 애가 연락이 안 돼서 들어온 거야. 가위라도 눌리는지 한참 끙끙대서 급히 깨웠어.”
“미안해요. 이상한 꿈을 꿔서….”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별일 없으면 그게 다행이지.”
요란한 꿈을 꾸는 바람에 아침 댓바람부터 난리를 친 것 같아 민망해졌다. 내가 뺨을 긁적이며 사과를 하자, 준이 형이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하라며.
씻고 나오라는 말에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나는 꿈속에서 내내 맴돌던 멜로디가 떠올라 머리를 부여잡았다.
귀가 아플 만큼 울리던 음이 이상하리만큼 생생했다.
걱정스럽게 보는 준이 형을 뒤로하고 포잉을 불러 같이 욕실로 들어간 나는 기계적으로 씻으며 포잉에게 꿈꿨던 내용을 이야기했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이상한 꿈을 꿀 때면, 포잉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희한하게 포잉에게 털어놓고 나면 늘 두서없이 뛰던 마음이 진정되어서 점점 더 포잉에게 의지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줘서일까.
그도 아니면 그저 이 요정님만은 세상이 무너져도 내 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까.
씻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는 중에 우진 형이 소현 팀장님이 보냈다며 약을 건네주었다.
“어휴, 악몽 꾼 거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린가 싶네요.”
“지환아, 혹시라도 스트레스받는 거 있으면 꼭 형한테 이야기 좀 해라.”
우진 형은 내가 약을 먹는지 옆에서 감시하며 몇 번이나 나에게 다짐을 받아 갔다.
아니, 내가 찬이도 아니고 약을 피하겠냐고!
회사에서 우리 건강 상태에 기민하게 대처해 주는 건 고마웠지만, 멤버들이 아닌 나에게 이런 관심이 쏟아지는 건 아직까지도 좀 거북했다.
그리고 특히나 오늘은 더.
“우리 화니, 아침부터 아팠다며?”
“아니에요, 그냥 미열이었어요.”
“무대 괜찮아? 할 수 있겠어?”
“사람은 원래 자고 일어나면 몸이 뜨끈뜨끈해요. 전 약도 먹었고 매우 멀쩡합니다….”
멤버들이 졸졸 쫓아다니면서 괜찮냐고 묻는 것까진 이제 익숙하기도 했고 괜찮았다.
하지만 새벽 형들까지 쫓아와서 병원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닦달을 해대니 정신이 쏙 빠질 것 같았다.
“목청 크기가 평소보다 좀 작은 것 같아. 원래 우리 화니는 이쯤에서 크게 버럭 하고 소리 질러야 하는데.”
“내 말이. 기운이 없는 게 맞네.”
“이 인간들아!”
걱정을 하는 건지 화병을 만들어 주려는 건지.
결국에는 옆에서 부산을 떨어대는 이 사람들을 누가 좀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남았다.
어젯밤에도 그렇게 괴롭히더니.
제발, 나 좀 그냥 둬….
* * *
“세빈아, ‘잊힌 꿈과 같던 시간’ 이 부분에서 반음 처지더라. 거기 빼면 다 좋아졌어.”
“넵. 더 신경 쓸게요.”
“힘찬이는 억지로 텐션 올리려고 하지 말고. 목소리가 평소보다 너무 가벼워.”
“으으… 주의하겠슴다!”
리허설과 쇼까지도 많은 시간이 남은 터라, 우리는 연습실을 빌려 단체 연습을 하면서 새벽 형님들의 피드백을 통해 최종 점검에 들어갔다.
아침 내내 혼이 나갈 것 같았던 것들도 연습에 열중하면서 흐려졌다.
“그런데 무슨 꿈을 꿨길래 아프기까지 해?”
“뭐, 꿈 때문에 아팠겠어? 그냥 긴장했어서 그런가 보지.”
찬이가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말을 꺼냈고, 얘가 왜 이러나 싶어 슬며시 거리를 벌리려던 차에 세빈이 손에 잡혀버렸다.
“뭐야, 갑자기 왜들 이래.”
“무서운 꿈이면… 날 밝을 때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앞으론 안 무서워질 테니까 우리한테 말해요!”
세빈이가 제법 진지한 눈을 하고는 아가같이 귀여운 말을 해서, 차마 나는 찬이한테 하듯이 닥치라고 할 수 없었다.
“진짜 별거 아닌데. 자각몽인 게 좀 신기하긴 했어요.”
“자각몽?”
“응. 내가 꿈인 걸 알고 있었거든.”
아침을 먹자마자 연습실로 직행해 여태 뛰어다닌 멤버들은 조금 지쳤는지 연습실 바닥에 각자 편한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라고 자리를 깔아주니 더 민망해졌다.
우리 애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새벽 형들까지 같이 있는 자리다 보니 민망함도 두 배가 된 것 같았다.
더듬더듬 어떤 꿈이었는지 설명하자, 멤버들 표정도 미묘해졌다.
“전부터 느낀 건데 환이 꿈은 좀, 음… 좀 그래.”
“그게 뭐예요.”
가영 형이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알맞은 단어를 찾아 고민하는 것 같더니 금방 포기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좀, 뭐가 그런데요….
“근데 피아노 소리가 계속 들렸다고? 요새 곡 작업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글쎄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뭐, 어차피 꿈인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는 내 모습에 키스 형이 입을 열었다.
“그 멜로디 아직도 기억나?”
“네. 단순한 음이었는데, 음….”
괴로울 만큼 큰 소리로 귓가를 울리던 멜로디와 에단 쌤의 손가락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 음을 허밍으로 부르자 가영 형과 세비 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묘하게 귀에 착착 감기는데?”
“준아, 이거….”
“녹음 기능 켰어요. 환아, 다시 해봐.”
“역시 하준이가 뭘 안다니까.”
“아니, 무슨 녹음까지.”
“야, 빨리해봐.”
하도 성화여서 다시 한번 멜로디를 흥얼거리듯 꺼내자 톡톡 자판을 두드려 저장한 준이 형이 파일을 단체 채팅방에 보내두었다.
“나도 아는 선배님들한테 들은 건데, 미신 같은 거긴 해도 이런 경우가 있다더라.”
“이런 경우요?”
“꿈에서 누가 노래를 점지해 줘서 그걸로 작업했는데 대박 나는 거지.”
“에이, 그러기엔 전 악몽이었는데요.”
보통 그런 거라면 좀 신기하거나 좋은 꿈에 나오지 않나?
“그럼 혹시 이런 멜로디는 피하라는 걸까?”
“아이고, 이제 그만하고 연습이나 해요.”
“진짜 나중에 이 멜로디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니까!”
“네네, 알았어요. 연습하자, 연습!”
입술을 댓 발은 내밀고 투덜거리는 가영 형을 억지로 잡아 일으켰다. 이대로 놔두면 애들이랑 같이 온갖 음모론은 다 꺼낼 것 같아서.
그 후로 최종 합이 맞을 때까지 몇 번씩 연습을 반복하던 우리가 지칠 때쯤, 우진 형과 소현 팀장님이 우리를 찾아왔다.
“슬슬 이동하자.”
“넵.”
“팀장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응? 왜?”
“얼굴에서 오늘따라 빛이 나는 것 같아서?”
평소보다 조금 더 기분 좋아 보이는 팀장님의 얼굴을 정확히 캐치한 찬이가 물었지만, 팀장님은 답 대신 모호한 웃음만 흘렸다.
뭐야, 불길해.
멤버들과 나는 팀장님이 우리를 또 어딘가에 팔아버리려는 것 같다고 수군거리며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가영 형은 그런 우리 모습이 재밌는지 싱글벙글이었지만.
* * *
“역시 원래 의상이 아니라 그런가 영 어색하긴 하네.”
“그래도 그만큼 우리가 서울 쇼에서 잘했다~ 그렇게 생각해.”
새벽 형들과 우리가 준비한 곡은 새벽 앨범 곡과 우리 곡을 믹스한 것이었다.
마침 서울 쇼에서 각자 상반되는 의상을 입었던 우리에게 주최 측에서 요청을 해왔다.
대전 쇼에서의 주제는 ‘경계’이다 보니 서울 쇼에서 입었던 의상으로 무대를 해주면 더 많은 호응이 있을 것 같다며.
영웅과 악당의 경계,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 등 상반되는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난 다른 것보다 얌전한 환이 머리가 제일 어색해.”
“나도 내가 어색해.”
펌 때문에 부스스했던 내 머리가 이마를 드러낸 올백 머리가 된 건 스스로에게조차 너무 낯설었다.
“잘생겼는데 왜!”
“고마워요, 누나. 진짜 누나밖에 없다.”
“걱정 마, 서울 쇼 때보다 지금이 더 찰떡이야. 진짜 사진 백 장 찍힐 각이다.”
내 머리를 다시 한번 꼼꼼히 챙겨준 가희 누나가 우진 형에게 괜히 애 기죽이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가희 누나와 희주 누나는 무슨 일인지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멤버들을 평소보다 더 열심히 세팅해 주면서 끊임없이 애들에게 칭찬을 퍼부어주었다.
덕분에 찬이랑 세빈이는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고, 경환 형도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었다.
한결같이 칭찬에 약한 내 새끼들 같으니라고.
“준비 다 됐어? 어우, 뭐야. 너네 완전 다른 사람 같은데?”
“이상해요?”
“아냐, 옷에는 지금이 더 잘 어울려.”
가영 형의 말에 울상이 됐던 찬이는 키스 형의 한마디에 다시 활짝 웃었다.
“가자, 병아리들!”
“뭐야, 삐약삐약이라고 대답해야 될 것 같아.”
“저 인간은 그냥 내버려 둬. 왜 저렇게 혼자 텐션이 올라가서는.”
긴장을 풀기 위해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무대로 향했다.
새벽 형들도 우리도 노래하는 무대가 가장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