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Odd Sense(6)
세빈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분장을 하고 있었고, 의상을 갈아입은 우리는 그 주변을 둘러싸고 한마디씩 보태고 있었다.
“우리 막내 귀엽다! 잘할 수 있어!”
“…하지 마요.”
“이때 아니면 네가 언제 형들한테 막말해 보냐, 힘내.”
“그냥 막말 듣고 싶어요?”
“하준 형, 세빈이가 삐뚤어지려고 한다!”
“애 좀 그만 놀려, 이것들아.”
응원인지 놀리는 건지 구분은 잘 안 되지만.
결국 감독님은 소현 팀장님이 즉석에서 의견을 냈던 것처럼 세빈이에게 부장역을 맡겼다.
다만, 준이 형이 아닌 영빈 형이 신입 사원 역을 하기로 했다.
차라리 무표정한 얼굴로 혼나고 우울해하고 기뻐하는 캐릭터가 더 재밌지 않겠냐는 말을 하면서 웃는데…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이 감독님 정말 괜찮은 걸까…?
반면, 세빈이는 형들에게 호통을 쳐야 한다니까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형들한테 어떻게 그러냐고 울상이었는데, 우리가 열심히 절대 촬영 중 일로 괴롭히지 않는다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후 처음 몇 번은 좀 헤매는가 싶었는데, 세빈이가 각성하면서 점점 그럴싸한 그림을 만들어 갔다.
다홍색 쓰리피스 정장을 챙겨입은 찬이나 무표정한 얼굴로 정말 기쁘다고 말하는 영빈 형을 보면서 웃지 않는 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건, 모 과자 캐릭터 같은 콧수염을 붙이고 ‘에잉!’, ‘그걸 말이라고 하나!’하고 외치는 세빈이였다.
쓸데없이 디테일하게 진한 갈색의 머리칼에 맞춰서 갈색 수염을 붙여준 스태프를 원망스럽게 보던 건 모두 잊었는지, 서류 뭉치를 둥글게 말아쥐고 찬이한테 삿대질하는 모습이 꽤 진심 같았다.
“…우리 막내가 찬이한테 쌓인 게 많아 보이는데요.”
“쉿…. 우리 모른 척하자. 지금 세빈이 엄청 신나 보여.”
“세빈 군, 좀 더 격정적으로!”
“네!”
감독님을 무서워하던 세빈이가 어느샌가 감독님과 열성적으로 의견을 나누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번 컷에는 나오지 않는 나와 준이 형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열연을 펼치는 막둥이와 잔뜩 혼나고 있는 찬이 모습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구경했다.
“자네는! 옷을 그따위로! 입을 거면! 일이라도! 잘! 하든가!”
“부장님! 그게 아니라! 신입이 이해를 잘 못한 것 같습니다!”
세빈이는 신나게 찬이를 타박하며 대사에 악센트를 줄 때마다 서류 뭉치를 한 움큼씩 집어던지고 있었다.
세빈이가 던지는 서류 뭉치를 샤샥하고 피하며 자기 잘못을 영빈 형에게 떠넘기는 찬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종이 더미 사이에서 조금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영빈 형.
그리고 그 광경과 무관하다는 듯 여유롭게 우리가 광고해야 할 영양제를 한 알 입에 넣는 경환 형.
영양제를 먹는 순간, 경환 형의 주변으로 이펙트가 들어갈 거라고 했다.
반원의 둥근 보호막이 경환 형을 보호하고, 세빈이가 던지는 종이 뭉치들을 다 튕겨내는.
이 장면 후 경환 형은 탕비실에서 신입 사원 역인 영빈 형에게 영양제를 건네고 결국 사표를 집어던지며 창문 밖으로 날아간다.
감독님의 컷 소리와 함께 세빈이가 방긋 웃으며 던졌던 종이 뭉치를 다시 챙기기 시작했다.
스태프들이 쫓아와 괜찮다고 했지만, 멤버들이 ‘주워만 놓을게요!’라고 외치자 결국 고맙다며 웃었다.
옆에 있던 찬이와 영빈 형도 함께 종이를 주워서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우리 쪽으로 우르르 달려왔다.
여러 모습을 짧게 짧게 촬영해서 연결할 거라는 설명도 들었고, 콘티도 열심히 확인했다. 하지만 이 영상이 정말 홍보가 될까 하는 걱정이 남아있었다.
멤버들도 나도 최대한 열심히 촬영에 임하고 있지만, 짧게 끊기는 장면이 워낙 많은 터라 최종 그림을 상상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해해야 우리도 주어진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감독님께 말씀드리기도 했지만, 씩 웃으며 쓰여있는 내용대로만 하면 된다고 할 뿐 이렇다 할 말씀이 없으셨다.
그래, 감독님만 믿자. 유명한 분이라고 팀장님도 놀랐었잖아.
전생에 광고는 보이는 족족 죄다 스킵 버튼을 눌렀던 나를 원망하며 이 촬영의 최종 영상이 부디 사랑받기를 빌었다.
* * *
멤버들이 촬영장에서 이리저리 허우적거리는 동안 정윤 실장은 박정균 대표를 만나고 있었다.
“그래, 애들은 잘하고 있고?”
“첫 촬영이라 걱정이 많은 것 치고는 잘 따라와 주고 있다고 연락받았습니다.”
“다행이네. 리팩 앨범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
“예정대로 차근차근 준비되어 가고 있어요. 소현 팀장의 의견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득 정윤 실장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설득하던 소현 팀장의 얼굴이 떠올라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느라 언래블의 앨범은 내내 무거운 주제와 멜로디를 담고 있었고, 이로 대중에 다가가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는 A&R팀과 홍보팀의 지속적인 의견이 있었다.
각 실과 팀의 관리자들을 모아 회의한 결과, 기존 앨범에서 한결 가벼운 곡을 뽑아 리패키지 앨범을 발매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거의 쉴 틈 없이 앨범을 내는 건 멤버들에게 무리일 수 있다는 의견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이번 활동기에 언래블이 출연했던 프로그램이나 쇼, 잡지 등의 반응이 좋아 이대로 보내긴 아깝다는 게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바로 앨범을 내는 건 무리지만, 두 달 정도를 목표를 잡고 새로운 곡과 기존 곡을 편곡하면 가능한 작업이었다.
멤버들도 인지는 하고 있지만, 회사 차원에서의 준비는 멤버들 활동과 별개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정윤 실장은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과 앞으로 남은 것들을 간략히 보고하고 박 대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생긴 건 에스프레소만 마시게 생겨서는 쓴 건 절대 마시지 않는 박정균 대표의 손에는 다디단 핫초코가 들려있었다.
사무실 안에는 초콜릿의 달콤한 향이 가득해서 정윤 실장은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단 음식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음?”
“에단 선생님이 새 곡을 언래블에 주고 싶다는 의견을 전해오셨어요.”
“어떤 곡인데?”
본격적으로 회사에 들어온 후 여러 작업을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사이에 또 뭔가 하나를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졸업식을 듣다가 떠올랐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애들이 부르면 좋을 것 같다고 하시는데 나중에 대표님께 직접 말씀드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괜찮으면 다음 앨범에 같이 넣는 것도 고려해봅시다.”
이 사람은 뭘 믿고 이렇게 느긋할까 싶을 때가 한두 번은 아니지만, 회사가 반 토막이 날뻔했던 상황에서도 저렇게 웃던 사람이니 정윤은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 시기에는 깊게 자는 날이 손에 꼽을 만큼 바빴지만, 결국은 박 대표가 말했던 대로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었다.
만사 느긋하고 대충하는 것 같아 보여도 저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까.
* * *
길었던 광고 촬영이 끝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우진 형과 팀장님의 뒤를 졸졸 쫓아 차로 향했다.
“대전 쇼에는 안 올라가서 아쉬웠는데 무대에 설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지?”
“넵!”
“다른 것들도 신기하고 재밌지만, 역시 무대에서 노래하는 게 제일 좋아요.”
“맞아, 노래 부를 수 있는 무대가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조금 전까지는 골골거리며 피곤하다고 하품하던 멤버들이 무대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바뀌면서 생기가 돌았다.
예능에 얼굴을 조금씩 비추고 있었지만, 멤버들과 내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건 노래할 수 있는 무대들이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고, 그저 우리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소면 어디든 좋았다.
그래서 서울 쇼에서 런웨이를 걸었던 것도 좋았지만, 본업으로 무대에 서는 대전 쇼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진행한 패션쇼에서는 미리내의 예나 선배님과 김진수 형님이 듀엣으로 쇼의 축하 무대를 진행했다. 그리고 대전 쇼에서는 새벽 형들과 우리가 함께 무대를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동안 꽤 여러 번 합을 맞춰본 덕분에 새벽 형들과 함께하는 무대는 걱정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처음 합을 맞출 때만 해도 형들이 우리를 잘 이끌어서 데려간다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함께 무대에서 어우러지는 분위기까지는 만들 수 있었다.
멤버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연습에 쏟았는지, 노래와 무대가 얼마나 늘었는지가 떠올라 뿌듯해졌다.
우리 애들이 이렇게 무럭무럭 잘 크고 있는데 나도 뒤처질 수 없지.
대전에 도착한 우리는 내일 쇼가 있을 행사장에 도착해 스테이지를 확인했다.
서울에서처럼 ‘U’자형 무대일까 했는데 이번 무대는 ‘ㅂ’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언래블입니다!”
“어서 와요. 서울 무대는 잘 봤습니다. 잘하던데요?”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소현 팀장님을 따라다니며 현장에 있는 모든 스태프에게 열심히 인사를 했다.
서울에서 이미 뵌 분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분들도 있었다.
연출 감독님과 현장 스태프들이 내일 리허설과 본무대를 위해 최종 점검을 하는 동안, 우리는 오늘 새벽 형들과 함께 무대 동선을 맞춰보기로 사전에 양해를 구한 터라 다들 호의적이었다.
아무래도 악기가 올라오는 무대는 처음이다 보니 걱정이 많았던 우리는 사전에 의견을 맞춘 순서를 떠올리며 형들을 기다렸다.
“병아리들, 먼저 왔네? 늦는다더니.”
“최대한 빨리 오려고 우진 형이 열심히 밟더라고요.”
“아, 진짜? 우진 형님 미안해요.”
“미안하긴요. 우리 애들이 기다리는 게 맞죠.”
하도 자주 봤더니 우진 형이랑도 친해진 가영 형은 기운차게 인사하며 들어오더니 우리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형들이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우리가 인사하는 모습과는 또 달랐다.
예의 바르지만 과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자리를 잘 지켜낸 사람 특유의 여유로움이 있었다.
그렇게 무대 아래서 낄낄거리며 장난치던 가영 형은 무대 위에 오르자 다른 사람이 되었다.
키스 형이나 세비 형보다 더 꼼꼼했다.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동선, 간격, 각 파트 별 대형을 하나씩 전부 확인하고 나서야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빨리 현장에서 사라져줘야 이분들도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만 급했던 우리와 달리 새벽 형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현장을 주도했다.
그 연차와 경험이 주는 여유에 감탄하며 현장을 빠져나왔다.
“너희도 아직 저녁 못 먹었지?”
“당연히 소현 팀장님이랑 먹으려고 안 먹고 왔죠.”
“얘네 좀 봐.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
“팀장님은 나를 너무 잘 아는 게 문제라니까요?”
소현 팀장님에게 가볍게 장난을 치는 가영 형의 모습에 세비 형은 난처한 듯 웃었다. 팀장님도 따라 가영 형을 코끝으로 비웃었다.
늦은 시간이라 밥집을 찾는 건 어려울 거라 중얼거리던 소현 팀장님은 숙소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건네더니 석환 형을 끌고 사라져버렸다.
“음… 일단 숙소에 가 있을까?”
“어, 음, 넹.”
이미 멀리 사라진 팀장님의 뒷모습에 잠시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던 우리는 소현 팀장님이니까 뭐, 하고 금방 납득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종일 바쁘게 움직인 탓에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경환 형과 세빈이는 졸렸는지 눈을 깜박이는 속도가 느릿했다.
“씻다 잠들지 말고.”
“언제적 얘기를!”
딱 한 번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잠들었던 이야기를 아직 우려먹는 가영 형을 노려보다, 나는 이번에도 혼자 쓰게 된 방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아직 1인 1실은 여러모로 부담스러워 보통 둘이 한방을 사용했지만, 우진 형이 힘찬이를 챙기겠다며 나를 두고 가버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 둬도 괜찮을 것 같다면서.
같은 곳을 숙소로 잡은 터라 한 번에 움직이고 잘 흩어지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아무래도 가영 형을 상대하는 건 여러모로 힘들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 후 따뜻한 물에 몸을 풀고 기분이 좋아졌던 나는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 이마를 부여잡았다.
“밥 먹자!”
“…그러니까 왜 내 방에서….”
족발&보쌈 세트를 양손에 든 새벽 형들과 우리 애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잉은 틈으로 슬쩍 멤버들을 바라보더니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고, 난 집에 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