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Odd Sense(5)
다행히 크게 혼나는 일 없이 약간의 잔소리만 듣고 치킨 소동은 마무리되었다.
우진 형이 내민 핸드폰을 준이 형이 들고 가려 하길래 내가 낚아채서 통화한 게 변수라면 변수일까.
종일 고생했을 준이 형이 통화하는 것보다 방송에서 가장 말을 많이 했던 내가 팀장님과 통화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한 행동이었다.
팀장님은 준이 형이 아닌 내가 전화했다는 것 자체에 어리둥절해 하다 그러려니 하면서 몇 마디로 간단히 잔소리를 끝냈다.
내일 촬영이 있는데 얼굴 팅팅 부어오면 운동 시간을 늘리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이 있었지만, 잘 붓지 않는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통화가 끝나자 멤버들이 다가와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으며 걱정 가득한 눈을 했다. 나는 별일 아니라고, 부어서 오면 운동 시간이 올라갈 거라는 말을 하셨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자 우리 중 가장 잘 붓는 찬이가 울적한 얼굴이 되어 우진 형을 바라봤지만, 우진 형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방송하면서 먹느라 남았던 치킨을 마저 끝내고 양치질까지 끝낸 우리가 다시 거실에 녹아내리며 눌어붙자, 이제는 익숙한 준이 형의 한숨이 들려왔다.
“오늘은 꼭 방에 들어가서 자라, 너희.”
“봐서요….”
노곤노곤한 몸을 이끌고 방까지 다시 가는 게 꽤 힘든 일이라 뒹굴거리다 그대로 잠드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준이 형이 혹시나 해서 당부하자 찬이가 대충 대답했다.
오늘은 꽤 긴 시간 대기해야 했던 만큼 멤버들 모두 피곤해 보였다.
“근데 키스 형 괜찮겠지?”
“응?”
멍하니 이리저리 꿈틀거리던 찬이가 습관처럼 발을 까딱거리다 중얼거렸다.
“아니, 아까 우리 대신에 다른 분한테 뭐라 했잖아….”
“아아….”
“괜찮을 거야. 키스 형한테 직접적으로 뭐라 하기도 힘드니까.”
“맞아. 키스 형한테 세비 형 말고 누가 뭐라고 하는 건 사실 상상도 안 되고.”
늘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여유로운 모습을 한 키스 형이어서 누군가가 형을 곤란하게 하는 것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분도 뭔가 그냥 예민해졌던 상황에서 우리가 거슬렸던 거지, 다른 마음은 없을 거야. 괜히 마음 쓰지 말고.”
“나도 그 정도는 알아요. 우리가 만만하니까 괜히 시비 건 거잖아.”
“에이, 뭐 또 그렇게까지 우울한 이야길 하고 그래.”
뚱한 얼굴을 숨기지 않고 툴툴거리는 찬이를 보며, 준이 형은 평소처럼 부드럽게 어르는 게 아닌 그저 미묘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내일은 스케줄 없으니까 푹 자. 오후에는 또 연습실에서 살 테니까.”
“아으으….”
“하루 날 잡아서 시간 생각하지 않고 종일 자고 싶다.”
벌써부터 고된 연습이 떠오르는지 앓는 소리를 내며 애꿎은 세빈이를 쿡쿡쿡 찌르던 찬이는 영빈 형이 어깨를 툭 때린 후에나 얌전해졌다.
오늘따라 멤버들마다 각자 무언가 생각이 많은 건지 멍해 보였다.
이 작은 머리통들을 열어보지 않고도 마음을 읽을 수는 있지만, 오늘도 스킬은 사용하지 않았다.
만약 내 도움이 필요했다면, 다들 나에게도 말했을 테니까.
이럴 땐 그냥 자는 게 최고다.
“잡시다. 안 그래도 몸살 날 것 같은데 푹 자기라도 해야지.”
“환이, 너는 진짜… 가끔 되게 나이 먹은 것 같은 느낌이야.”
“뭐래.”
“약간 말투에서 연륜이 묻어난다고 해야 하나?”
“연륜이라니… 형 슬프다, 세빈아.”
가끔 쓸데없이 예리한 찬이 궁둥이를 발로 툭툭 걷어찬 나는 이미 흐물흐물한 경환 형의 팔 한쪽을 잡고 흔들었다.
찹쌀떡처럼 뽀얀 우리 세빈이가 바닥에 푹 퍼져 있었지만, 일단은 룸메를 방으로 치우는 게 먼저였다.
아마 각자 룸메들이 챙기기도 할 거고.
“알았어, 일어날게. 일어난다니까….”
“말만 하지 말고 쫌!”
축 늘어져 있던 경환 형을 겨우 일으켜 세워 방으로 등 떠밀자, 맏형들도 몸을 일으켜 각자 룸메이트를 수습했다.
이런 걸 보면 룸메이트가 참 잘 나뉜 것도 같고.
아마 찬이랑 세빈이 둘이 같은 방이었다면 매일매일이 전쟁 같았을 게 눈에 훤히 보여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새로운 경험을 한 하루가 잘 마무리되었다.
* * *
정윤은 방금까지 전화로 징징거리던 이서랑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서랑도 그 패션쇼 현장에 있었던 건지 지환이 무대를 보자마자 미친 듯이 메시지를 보내더니, 쇼가 끝나고 나서는 계속 전화가 왔었다.
정말 징글징글 하다는 말이 이런 때 쓰는 거구나 싶을 만큼 귀찮게 굴었다.
그런 정윤 실장의 앞에 있던 소현은 상황을 짐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빙긋 웃고 있었다.
“일단 얘네 잡지 자체가 인지도가 괜찮으니까 애들이 괜찮다고 하면 얘기해 주세요.”
“네. 실장님.”
“아, 그리고 팀장님이 말했던 것들, 어때요? 잘 될 것 같아요?”
그때는 일종의 예상 시나리오였다면, 현재는 현재진행형으로 하나씩 상황이 맞아떨어져 가고 있었다.
물론 큰 틀이 들어맞았을 뿐, 자세한 디테일을 따질 수는 없었다.
속된 말로 소현이 신내림이라도 받지 않았다면 미래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소현이 정윤에게 내민 것은 그저 많은 계산과 시뮬레이션을 거쳐 나온 하나의 가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가정대로 언래블의 대중적인 인지도가 차곡차곡 쌓이더니 마침내 한 발자국을 남겨둔 상황이 되었다.
이 일련의 상황들을 보면 김소현이라는 사람이 왜 팀장인지, 왜 ON 엔터 간부진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정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고 큰 그림을 그리려는 타입이라면, 소현은 프로그램의 파생 효과와 팬들의 반응을 잘 캐치하는 편이었다.
“애들은 어때요?”
“워낙 착하고 얌전한 애들이라 회사 요청은 거의 다 수긍하고 따르는 편이에요. 마치 유니콘 같달까?”
“그렇긴 하지. 고집은 있을지언정 객기 부리는 애들은 아니니까요.”
제법 긴 시간 아이들을 지켜봐 온 둘은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여태까지는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알려졌던 신인 그룹이었다면, 앞으로는 대중들도 이름을 알만한 그룹이 되어갈 거라고 둘 모두 의심하지 않았다.
그만큼 언래블은 높이 멀리 날아갈 테니까.
“아, 추석 전에 정산금 입금되니까 애들한테 얘기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실장님.”
소현은 기쁜 마음으로 답하며 실장실을 나섰다.
* * *
“자, 여기서 저기까지 쿵쾅거린다는 느낌으로 뛰는 겁니다. 준비됐어요?”
“네!”
늘 그렇듯 연습하다 정신 차리면 회의실, 작업실, 그도 아니면 스케줄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중간중간 찍어왔던 광고 촬영 날이었다.
가뜩이나 이 감독님의 성향을 종잡을 수 없어 어려웠는데, 독특한 스토리에 맞춰 연기까지 하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들 연기는 젬병이었던 터라 급하게 배우실의 선생님들에게 기본 가르침은 받고 있었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오늘은 성인들을 위한 종합 영양제 스토리를 찍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정말 사표 던지고 창문으로 날아가는 내용을 우리가 찍게 될 줄은 몰랐다.
“쓰읍… 영빈 씨, 너무 재벌 3세 본부장님 느낌인데.”
“생긴 게 이런데 어떡해요. 저런 부장님 있으면 그 회사 다녔지.”
감독과 프로듀서가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우리는 못 들은 척 얌전히 현장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었다.
회사의 사무실처럼 꾸며진 세트장 한복판에는 영빈 형이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청소년용 영양제에서는 찬이가 주인공으로 촬영을 했었고, 이번 광고의 주요 캐릭터인 사원과 부장은 세빈이와 영빈 형이었다.
“하준 씨 앉혀놔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하, 둘 다 잘생겨가지고 재미가 없어, 재미가.”
도대체 저 감독님은 우리에게 뭘 바라는 걸까.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카메라를 붙잡고 끙끙대는 감독님 탓에 세빈이와 영빈 형은 현장 스태프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결과 우리와 우진 형도 앉은 자리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계속 멤버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쪽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소현 팀장님이 입을 열었다.
“감독님, 차라리 세빈이가 콧수염 같은 걸 붙이고 부장님을 하면 재밌지 않을까요? 사원 역할을 하준이가 하고.”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감독님을 뒤로하고 조연출이 눈치껏 세빈이와 영빈 형을 잠깐 쉬라며 우리 쪽으로 보내주셨다.
감독님이 바라는 건 더 우스꽝스럽고 코믹한 장면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빈 형의 얼굴로 그건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워낙 냉미남 타입의 얼굴인지라 아까 자리에 앉아있는 내내 몇몇 드라마 내용만이 떠올랐었다.
막장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재벌 3세가 신분을 속이고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이라든가 유학파 본부장님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
우리는 어깨가 축 처진 둘을 붙잡고 으쌰으쌰 해주면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스태프들도 우리를 귀찮아하거나 하지 않고, 은근슬쩍 우리 옆에 와서 방송을 봤다며 응원해 주거나 감독님이 워낙 자신의 세계가 확고한 분이라며 다독여주셨다.
그런 분위기에 감동한 세빈이는 현장 스태프분들이 너무 착하다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식사하고 하시죠.”
좀처럼 원하는 상황이 팍하고 떠오르지 않는지 고민하던 감독에게 허니비 측에서 나온 직원분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언래블 팬분들이 밥차 보내주셨어요!”
다른 스태프들도 동조하자 감독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밥 먹고 합시다!”
시무룩했던 영빈 형과 세빈이도 밥차 이야기가 나오자 급 생기가 돌았다.
여태까지는 대부분 방송국 안에서 촬영하는 스케줄이었고, 무인도에는 애당초 다른 게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팬들이 무언가를 지원하고 싶어 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았다며, 이번 광고 촬영이 알려지고 나서는 제법 많은 문의가 있었다고 우진 형이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조금 있다가 인증샷 찍어서 올려야 된다. 잊어버리면 안 돼. 알았지?”
“네! 아, 어떡하지. 나 떨려!”
우진 형을 따라 졸졸졸 걷다 보니 스튜디오 야외에 예쁘게 세팅되어 있는 천막과 음식들이 보였다.
일부러 스태프분들 먼저 드실 수 있게 느지막이 나온 터라 많은 분들이 앉아서 식사 중이었다. 다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해오셨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이 기분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밥차 후원에 총대로 나선 적은 없지만, 협력한 적은 있었다.
그때는 마냥 우리 애들이 잘 먹고 현장에서 예쁨받았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뿐이었다.
그랬던 걸 이렇게 받는 입장이 되고, 실제로 사람들이 우리 팬들을 칭찬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오자, 괜히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고 해야 할까?
우리가 이렇게 사랑받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줄의 제일 마지막에 선 우리는 각자 식판 한가득 좋아하는 음식을 담으며 우리 솜뭉치들의 센스에 감탄했다.
언제나 고기가 최고라고 외치는 우리를 위해서인지 고기반찬이 다양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우리를 가장 잘 아는 건 솜뭉치들인 것인가!
입가심하라는 건지 작은 컵에 담긴 떡볶이가 간식처럼 주어졌고, 반찬 외에 후식용 과일도 준비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 울적했던 건 모두 잊은 것처럼 멤버들 얼굴이 한없이 행복해졌다.
모두의 식판을 한자리에 모아 활짝 웃는 얼굴로 인증샷을 찍은 우리는 서로 담아온 반찬을 보고 피식거리며 웃었다.
“진짜 너무 평소 같아서 내가 할 말이 없다.”
“사람이 막 쉽게 변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랬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나에게 식판을 보여주고 이게 누가 담은 거냐고 물어보면 다 맞출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참 한결같아서 좋다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