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76)화 (176/456)

176. Odd Sense(2)

“미친….”

이진아는 자기도 모르게 욕을 중얼거리며 미친 듯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처음에는 등 떠밀리다시피 해서 온 패션쇼였다.

자선 패션쇼라는 이름으로 꽤 많은 연예인들이 모였고, 초록우산 재단과 학생들이 합심해서 좋은 일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취재를 하긴 해야 했지만, 아직 큰 건수를 맡아본 적 없던 이진아는 선배들의 등쌀에 울며 겨자 먹기로 오늘 이 장소에 왔다.

심지어 단독도 아니었다.

자신은 사진만 찍을 뿐, 결국 기사는 선배 이름으로 올라갈 게 분명했다.

꽤나 쟁쟁한 여러 연예인이 모인 자리다 보니 누구 하나로 포커싱을 맞추는 것도 힘들었다.

오늘 탑 티어인 멜트의 새 앨범 발매가 있어 선배들은 그쪽으로 몰렸다. 기사 제목에 멜트 이름만 박아도 조회 수가 보장되니 얼마나 꿀인가.

여러모로 울적했던 이진아는 기계적으로 촬영을 이어가다 새벽 멤버들이 나오는 순서가 돼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몸에 박힌 습관은 흠잡을 데 없이 노련하게 여태 무대를 찍어왔지만, 정신을 차리고 안 차리고는 꽤 큰 차이를 가졌다.

그룹 새벽은 쇼 전날까지 출연 여부에 대해 노코멘트로 일관했지만, 촉이 빠른 사람들은 그들이 출연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언래블이라는 그룹을 들었는데, 그룹끼리의 교류가 심상치 않다는 말이 있었다.

언제나 카더라가 쏟아지는 세계에서 살다 보니 이진아는 언래블의 이름 정도는 기억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논 엔터와 ON 엔터의 알력 다툼 때문이었다.

기성 그룹 데미갓이 신인 그룹 언래블을 괴롭히고 그 일을 발단으로 엔터 간의 기 싸움이 있었다고 일부는 추측했지만, 이진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고작 신인 그룹 때문에 회사가 나선다는 건 득보다 실이 더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몇몇 프로에 나와 얼굴을 알렸고 곡도 제법 반응이 괜찮다는 이야기는 같은 기자들 방에서 들었지만, 그런가 보다 했다.

좀 괜찮은 아이돌은 이 바닥에 널렸다.

단정한 와인색 수트 차림으로 언래블의 멤버가 런웨이에 올라섰을 때까지만 해도 이진아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상이나 비율, 인지도 모든 면에서 새벽의 세비가 더 괜찮은 피사체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서로 등지고 각자의 라인으로 걸어가는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초반 워킹을 대충 찍고 세비에 집중하자는 생각을 하며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었을 뿐인데, 한걸음에 단추 하나씩 그렇게 단정히 잠겨있던 단추를 모두 풀어낸 무대 위에 모델이 순간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마치 히어로 앞에서 선량한 시민의 탈을 쓰고 있던 빌런이 히어로를 피한 순간 본인의 본모습을 드러내듯 툭툭 무심히 단추를 풀어내며 본성을 드러냈다.

구김 하나 없이 단정했던 수트가 주름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무신경한 손짓으로 주머니에 손을 하나 찔러 넣고 런웨이를 여유롭게 누볐다.

지루해 죽겠다는 듯 무료함이 감도는 무표정을 하고 객석을 둘러보았다.

흔해 빠진 무언가를 보듯 느릿하고 무료한 고갯짓과 시선이었다.

그렇게 런웨이의 끝에 도달한 모델은 서늘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쓱 살피더니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멈췄다.

정면의 어떤 카메라였다.

그러더니 슬며시 불량한 모습으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처음 포인트 지점에서 세비와 나란히 서서 짓던 환하고 선량한 웃음과는 무게가 달랐다.

그후 돌아가는 발걸음은 올 때보다 훨씬 가볍고 즐거워 보였다.

마치 만족스러운 무언가를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델은 무대 위에서 완벽한 한 명의 빌런이었다.

이진아는 그제야 이 쇼의 부제가 떠올랐다.

한낮의 빌런, 한밤의 영웅.

무대 밖으로 그가 사라진 이후에야 콩닥거리던 심장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진아야, 방금 잘 찍었지?”

“네, 선배.”

“쟤, 누구라고? 모델? 배우?”

“아뇨, 올해 데뷔한 아이돌인데 언래블이라고 했어요.”

“아, 그….”

선배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그 일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 수긍해 주었다.

이후 올라온 언래블의 멤버들도 새벽 멤버들도 의상을 찰떡같이 소화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뽐냈지만, 이진아는 런웨이 끝에서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던 그 멤버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 오게 해준 선배에게 커피라도 사야겠다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할 만큼.

* * *

두 번째 의상까지 모두 소화해낸 우리는 마지막 무대인사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지정 대기실로 돌아왔다.

거대한 쇼의 흐름에 속에 있었던 터라 대기도 길었고, 의상에 몸을 맞추는 수준이었기에 식사도 마음대로 하기 힘들었다.

“너무 힘들어요…. 차라리 무대할 때가 더 나은 것 같아.”

초주검이 된 찬이는 입었던 의상을 조심스럽게 벗어놓고 경환 형의 등에 기대 중얼거렸다.

“나도…. 긴장돼서 워킹 배운 게 아무것도 생각 안 났어요.”

“아냐, 우리 세빈이 잘했을 거야. 감독님이 칭찬할 정도였잖아.”

“자자, 얘들아 우리는 일단 이동하자.”

“네에….”

흐느적거리며 원래 복장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짐을 챙기는 서포트 팀 누님들을 도왔다.

안면을 튼 스태프들과 다른 선배님들에게도 다음 쇼를 고대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쇼가 끝난 후에는 몇 가지 소장품에 대한 경매가 진행되고 오늘 입었던 의상들에 대한 판매도 초록 우산 홈페이지에서 진행된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일정이 있었던 우리는 오늘은 이만 복귀해야 했다.

단체로 출연하는 날도 있었고, 몇 명씩 나눠서 이런저런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날도 있었다.

중요한 건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운이 쪽 빠져서 휘적거리던 멤버들도 촬영장에만 도착하면 다시 태어난 것처럼 활달하게 뛰어다녔다.

우리가 열심히 우리 자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두근거렸다.

“지환아, 뭐해.”

“아, 잠깐 멍 때렸어요.”

차에 짐을 옮기느라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스태프들과 멤버들을 바라보다, 이런저런 생각에 멍하니 있던 나에게 영빈 형이 다가왔다.

“아까 엄청 멋있더라. 잘했어.”

“에헤이, 또 부끄럽게 왜 이래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자 영빈 형은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어깨를 쓰다듬어줬다.

“항상 넌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더 잘해야죠. 형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뒤처지고 싶지 않아요.”

“그럼 나도 더 분발해야겠다.”

“둘이 뭐해? 나도!”

“나도 껴줘!”

오랜만에 영빈 형이랑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세빈이랑 찬이가 짐을 내려놓고 우리 쪽으로 뛰어왔다.

“어이구, 앞으로 더 열심히 하자고 그 얘기 하고 있었어.”

“저도 더 열심히 할 거예요!”

“난 조금만 열심히 할게.”

장난스러운 애들 목소리에 영빈 형이 결국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얘들아, 이제 타야 된다!”

“네엡!”

“가요!”

우진 형의 부름에 우리 모두 밴으로 걸음을 옮겼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찬이 등을 두드려주며 웃었다.

* * *

“팀장님이 이거 다 계획한 거야?”

“역시 팀장은 그냥 하는 게 아니라니까.”

도연과 시한은 앞으로 공개될 언래블의 방송과 일정을 재검토하며 오늘 패션쇼 직후 올라온 기사들을 체크했다.

오늘 패션쇼는 워낙 많은 별들이 출연한 터라 꽤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필이면 대형 남돌의 컴백과 겹치는 바람에 관심이 분산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나쁘지 않았다.

곧 쇼가 끝나면 제대로 된 기사들이 올라올 테니 괜찮은 기사는 따로 체크해두어야 했다.

기부를 위한 거대한 쇼에 참여한 연예인들이라는 이름은 여기저기에 쓰기도 좋았다.

거기에 이번 허니비 광고의 1차 버전이 7초짜리로 공개된다.

아직 촬영이 끝나지 않은 상태지만, 초기 촬영분으로 흥미를 끌기 위해 패션쇼 즈음 함께 홍보 기사에 은근슬쩍 끼워 넣기로 했었다.

선행을 쌓는 이미지는 여러모로 득이 되지만 너무 티 나게 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어 은근슬쩍 노출되어야 했다.

다행히 이번에 허니비 대표님이 무슨 상을 받게 되어 공식 인터뷰가 있다고 했다.

그때 광고 얘기와 함께 언래블이 영양제 기부 조건으로 광고비도 적게 받아 간 내용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 인터뷰가 공개될 때 ON 엔터에서도 공식 인터뷰를 풀기로 했다.

직원들이 소현을 칭찬한 건 이 흐름을 광고주와 조율한 게 소현 팀장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이후 이어질 방송과 음악 방송 출연 때문이기도 했다.

더블 타이틀이라고 해서 한꺼번에 두 곡으로 활동을 하나 했더니, 컴백 무대 때만 폭풍전야와 Confusion의 믹스 버전으로 무대를 했었다.

그 후 음악 방송은 전부 인트로와 폭풍전야의 믹스였다.

처음 팀원들은 멤버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방송 예정 날짜들을 보며 의아해했었다.

활동 중 얼굴을 많이 비추는 게 도움이 될 텐데 왜 방송 날짜들이 다 뒤쪽에 몰린 프로그램 출연이 많은지.

하지만 이어진 소현 팀장님의 설명에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중간중간 게스트로 출연한 프로들은 ‘폭풍전야’로 활동하는 동안 공개되었고, 9월 말, 10월 중 공개되는 프로그램들은 ‘Confusion’ 활동에 초점을 맞춘 셈이었다.

거기에 더해 10월 첫 주 추석 연휴가 끝난 후 팬클럽 창단식을 진행.

그와 함께 미니 앨범 ‘여로’의 공식 활동은 종료되는 큰 그림.

하나의 미니 앨범으로 이만큼 분량을 뽑아내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재주였다.

실제 촬영은 언제나 예정과 조금씩 차이가 발생하곤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참 딜레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 이미 촬영 중이거나 촬영이 끝난 상태라 편집 과정에 문제만 없다면 방송까지도 예정된 날짜 안에서 진행이 될 것 같았다.

“이번 주말에 힐링 캠프도 1차분 공개되는 거지?”

“아, 그러네.”

“힐링 캠프가 아니라 무인도 캠프로 이름 지어야 했던 거 아냐?”

“지환이가 무인도 말만 들어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더라.”

탁상 달력에 체크해둔 날짜를 확인하며 다이어리를 살피던 시한은, 지환이가 팀장님과의 면담 때문에 사무실에 왔다가 무인도에서 촬영을 묻자 펄쩍 뛰던 것을 기억했다.

가서 무슨 고생을 했던 건지 순식간에 잘생긴 얼굴이 핼쑥해졌었다.

아직도 낯을 가리는지 사무실 직원들에게 살갑게 달려드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환이는 티 나지 않게 직원들을 챙기는 편이었다.

따지자면 하준이나 영빈이 같은 타입이랄까.

“아, 오늘 아이 콘택트 방송하네. 애기들 진짜 귀엽더라.”

“난 그 애기 엄마들도 대단한 것 같더라. 그 나이에 인플루언서야, 하. 난 여태 뭐 했냐….”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어깨를 주물러대던 도연은 퀭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오는 소현을 발견했다.

“어? 팀장님, 다녀오셨어요?”

“응. 어휴, 왜 이렇게 뻣뻣하게 구는지 원.”

누가 또 소현에게 스트레스를 준 건지 평소에 즐겨 마시던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다디단 향을 풍기는 캐러멜마키아토를 들고 있었다.

“도연 씨랑 시한 씨도 한 잔씩 해요.”

“감사합니다!”

소현은 자기 사람에게는 너그러운 편이라 상사로 따르기도 어렵지 않았다.

일 잘하고 아랫사람 잘 챙기는 상사라니, 환상 속 동물인 줄 알았다.

물론 일이 많고 야근이 잦은 건 힘들었지만, 이 분야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야 했다.

당장 소현 팀장과 정윤 실장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야근을 시키고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잔업 하겠다는 직원들도 전부 집으로 내쫓았다.

정작 자신들은 늘 누구보다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있으면서.

다행히 ON 엔터는 다른 곳보다 복지도 좋고, 함께하는 애들도 인성이 괜찮았다. 야근 수당도 잘 챙겨주는 편이라 둘 모두 회사에 만족하고 있는 편이었다.

타 중소 엔터에 있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기는 거기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아 참, 팀장님. 이슈타임의 최로운 기자한테 연락 왔어요.”

“확인할게요.”

휘적거리며 자리로 걸어가는 소현의 걸음이 왠지 언래블 멤버들이 피곤에 절었을 때와 비슷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도연과 시한은 남몰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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