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75)화 (175/456)

175. Odd Sense(1)

키스 형의 발언에 우리에게 시끄럽다고 말했던 배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예민하다뇨, 제가 괜히 트집이라도 잡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렇게까지 말 안 했는데. 혹시 자존감이 조금 부족하신가.”

“뭐라고요?”

“타인에게 가볍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건 괜찮고 본인이 듣는 건 기분 나쁘신가 봐요.”

확 찌푸려진 상대의 얼굴에는 짜증 외에도 당혹, 불쾌함 등 여러 감정이 일렁였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보다 키스 형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음악 하는 저보다 소리에 더 민감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그래서 예민하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문제라도?”

“옆이 소란스러워서 조금 조용히 해달라고 했는데 절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계시잖아요.”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칭찬받았다고 기뻐하는 신인 후배한테 가볍게 군다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제가 더 이성적인 것 같은데요?”

시종일관 동일한 목소리 톤으로 느긋하게 말하는 키스 형과 달리 상대방은 조금씩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당신이 뭔데 대화에 끼어들어서 이러는 거예요?”

“우리 애들한테 괜히 화풀이하지 말고 본인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한없이 사나운 표정으로 말하던 사람이 키스 형에게 휘둘려 분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다 사라졌다.

가뜩이나 우리가 사과하면서부터 주변의 시선이 자꾸 이쪽으로 모이는 게 불편해 보였던 사람이었다.

키스 형과의 대화부터 점점 더 많은 시선이 꽂히자 부담스러웠는지, 짧은 욕설과 함께 등을 돌려 우리와 멀어졌다.

어쩐지 저 사람과의 인연이 끝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마냥 우려스럽지는 않았다. 우리가 조금 더 자랐기 때문일까?

“별 거지 같은 게.”

“형, 괜찮아요?”

“우리가 그냥 사과하면 되는데.”

상대방의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던 키스 형은 혀를 찼다.

우리 편을 들어준 건 너무 고마웠지만 혹시나 키스 형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면 어쩌나 싶어 나와 준이 형이 키스 형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뭘 사과해, 잘못한 게 없는데. 안 그래도 저 사람 때문에 나도 짜증 났었으니까 쌤쌤이지 뭐.”

“왜요?”

“아까 자기 대기실을 다 때려 부술 것처럼 굴던데? 하필 우리 대기실이 옆이라.”

“아….”

아까 소란을 만들었던 주인공이 저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우진 씨한테는 내가 말해놓을 테니까 너희는 신경 쓰지 마. 엄밀히 따지면 영역도 다른데 괜히 제일 만만해 보이는 사람한테 괜히 화풀이하는 거 아냐. 유치해서 진짜.”

“오늘따라 우리 형님 왜 이렇게 멋있지?”

“오늘만 멋있냐?”

“오늘이 특히 멋있는 걸로 할까요?”

시큰둥한 얼굴로 배우를 몰아낸 키스 형은 우리에게 평소처럼 반짝거리는 얼굴로 툭툭 장난을 걸었다.

서로의 영역이 다르더라도 어떤 식으로라도 영향을 줄 수 있을 텐데, 키스 형은 자신이 여태까지 쌓아둔 커리어가 그런 것쯤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윤혁아, 뭐해?”

“아… 한가영이네.”

“뭐 인마? 형이라고 안 해?”

상황이 정리되고 정식 쇼에 들어가기 전 잠깐의 휴식이 주어진 상태였다.

주어진 대기실 용 천막으로 키스 형이 오지 않자, 결국 가영 형이 찾아 나선 것 같았다.

우리랑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장난치던 키스 형은 가영 형의 등장에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가버려, 가.”

“망할 놈. 세비가 부른다.”

“병아리들, 형아 간다.”

“넵. 좀 이따 봐요!”

가는 내내 투닥거리는 새벽 형님들 모습에 우리는 각자 여러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얌전히 대기실로 돌아왔다.

* * *

쇼의 주제는 한낮의 빌런과 한밤의 영웅이었다.

우리 쪽 라인은 빌런, 새벽 형들과 DCL 멤버들이 있는 쪽이 영웅이었다.

한낮의 빌런 쪽은 과감한 색을 배치한, 기존의 디자인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옷들이 주어졌다.

아직 그들의 시간이 되지 않아 위험하지는 않지만, 특유의 똘기를 보여주는 의상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그런 모습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러니 과감한 워킹과 자유분방한 표정, 제스처로 무대를 누벼도 된다고.

한밤의 영웅은 고전에서 영감을 현대 의상에 최대한 녹여내려고 한 것 같았다.

금욕적인 수도승의 로브 같은 카디건이 있는가 하면 쓰리피스 수트를 갖춰 입은 모델도 있었다.

같은 수트여도 영웅 쪽 팬츠는 슬림한 라인이 아닌 클래식한 일자 핏으로 제작되었다.

의상을 장식하는 모습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였다.

빌런들은 서스펜더를 사용하거나 화사한 부토니에를 꽂았고, 보타이와 화려한 커프스 링크를 달았다.

수트가 아닌 의상에서는 그 과감함이 더 도드라졌다.

당장 찬이가 입고 있는 맨투맨만 봐도 색감이 쨍해서 과해 보였지만, 정작 입고 있는 사람이 찬이어서인지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영웅들은 크라바트나 파시미나로 포인트를 주거나 우아한 느낌을 주는 행커치프로 마무리했다.

내가 하고 있는 행커치프가 의상의 색상을 살짝 눌러주는 느낌이라면, 반대쪽 라인의 행커치프는 포인트가 되는 역할이었다.

패션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 우리기에 이 쇼를 위해 워킹을 배우면서 의상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보았다.

서포트 팀의 누님들이나 현장 스태프들이 우리 의상과 액세서리를 챙겨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고 무대에 오르는 것과는 또 다를 거라는 영빈 형의 아이디어였다.

패션에 대해서는 전혀 지식도 관심도 없는 우리를 데리고 영빈 형이 그간 공부시킨다고 고생한 걸 떠올리면 안쓰러울 정도였다.

본 무대 시작 전 초대 손님들이 입장하고, 관람객들이 입장하면서 분위기는 점점 더 열기를 더해갔다.

천막 안에서 대기하던 우리들까지 덩달아 밖을 기웃거릴 만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는 더 빨라졌고, 목소리는 더 커졌다.

“이게 곧 시작하나 봐.”

“오늘 오프닝 예나 선배님이랑 진수 선배님이 듀엣이라고 했지?”

“응. 우리는 새벽 형들이랑 같이 하기로 했잖아, DCL은 누구랑 해?”

“어떡하지? 나 현실감이 없어!”

다행히 멤버들은 리허설 끝에 짜증을 내다 사라진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

당장 얼마 후면 무대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이 가득 찬 것 같아 보였다.

초조했던 건지 칭찬받았다고 기뻐하던 세빈를 붙잡고 찬이가 워킹을 봐달라고 하고 있었고, 영빈 형은 경환 형에게 잡혀 있었다.

“아니, 각자 의상에 맞게 해야지. 가죽 재킷 입은 사람이랑 정장이랑 같은 모습이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시무룩하게 어깨를 떨구는 경환 형을 수습해오는 것도 내 역할이었다.

잘 달래서 아까 멤버들에게 했던 얘기를 한 번 더 반복하고 나서야 천막 안의 흥분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곧이어 스태프들의 안내에 따라 우리 모두 무대 아래 대기 줄에 모였고, MC를 맡은 이영진 형님의 멘트가 스피커를 울렸다.

우리한테 작은 자선 기부 패션쇼를 제의해놓고 이렇게 커다란 프로젝트를 만들어버린 형님들을 떠올리니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Villain & Hero’

서로 다른 시간대의 악당과 영웅이라니.

방금 전까지의 긴장이 갑자기 씻은 듯 사라졌다.

노래나 춤을 위한 무대가 아니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전문 모델이 아니라는 걸 기획자도 관객도 알고 있고, 당사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꾹 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나도 모르게 내려놓자 그 후로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런웨이에 올라선 순간 쇼를 이끌어가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걸었다.

함께 무대에 오른 사람이 세비 형이어서 더 마음 편히 워킹에 신경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세비 형은 우아하고 금욕적인 수도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기다란 카디건을 늘어트리고 걸었다.

형의 걸음에 따라 가볍게 하늘거리는 옷깃이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

그래서 난 시건방지고 제멋대로인 악당이 되기로 했다.

감독님도 말했었다.

너무 정석으로 걷는 데만 집중하지 말고 이 쇼의 주제를 떠올리라고.

지금의 모델들은 너무 기존의 쇼만을 떠올리고 있어서 딱딱하고 재미없다고.

연출을 맡은 총괄 감독님은 히어로물 같은 즐거운 쇼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좋은 의도로 준비된 쇼인 만큼, 더 많은 사람이 가볍게 즐길 수 있고 관심 가졌으면 좋겠다고.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흐르는 음악은 은밀했고, 어딘지 모르게 농염한 느낌이 들었다.

‘음악 선정 진짜 미쳤다.’

세상 단정한 모습으로 런웨이에 올라섰던 나는, 세비 형과 서로 등을 돌리는 순간부터 잠가두었던 수트 버튼을 하나, 둘 풀었다.

툭, 툭

단 두 걸음에 단추가 끝났고,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여유롭게, 하지만 보폭은 크게 걸었다.

보폭을 크게 걸은 덕분에 세비 형과도 큰 속도 차이가 없었다.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내 걸음과 달리 표정은 무료해 보이도록 신경 썼다.

크게 사고 치고 싶어서 안달 났지만 재밌는 걸 찾지 못한 악당의 외출처럼.

마음에 차는 일이 없어 무료하고 따분한 일상을 보내던 그가 마침내 런웨이의 끝에서 목표물을 발견한다.

정면에서 현재 상황을 찍고 있던 카메라와 시선을 맞추며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생애 첫 런웨이를 내려온 나는 심장이 쿵쿵쿵 하고 제멋대로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무대에 오르면서 아주 잠시나마 우리 애들을, 언래블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이 무대의 이야기에 집중했던 것이.

‘계약자야, 마지막 네 웃음이 너무 싸가지없어 보였는데 괜찮은 거임?’

‘빌런이 싸가지있는 건 또 이상하지 않아?’

‘그것도 그렇긴 한데.’

쿵쿵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애써 태연한 척 포잉의 걱정 어린 중얼거림을 다독였다.

마치 엄마 몰래 나쁜 장난을 친 듯한 기분이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무대 아래로 내려와 세비 형과 시선을 마주친 순간, 형이 평소와 달리 호기심과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웃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기특해라, 우리 환이.”

“으, 내려오니까 떨려요.”

가볍게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손길에는 대견함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환아, 의상 갈아입어!”

“넵!”

우진 형은 나에게 손짓하며 흐물거리는 찬이를 끌고 가고 있었다.

런웨이를 내려온 순간 환상은 끝났고, 난 다시 언래블의 환이 되어 부리나케 우리 천막으로 뛰어갔다.

의상을 갈아입기 전 잠시 멈춰서 주변을 바라보니 온갖 다양한 표정들이 가득했다.

누군가는 나처럼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익숙한 듯 담담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듯 옆 사람에게 말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아는 얼굴들의 표정은 유독 선명하게 보여서 자꾸 헤픈 웃음이 흘렀다.

가영 형은 긴장이라는 걸 하지 않는 건지 시종일관 여유로웠고, 이제 막 무대에 오르려는 DCL 멤버들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레노나 자인은 긴장보다 호기심이 더 커 보였지만, 리우 형과 휴이는 곧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긴장한 것 같았다.

이미 다음 의상을 갈아입고 선 진우 형은 의외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문득 이 런웨이에서 자신의 배역을 설정하고 그 역할을 연기한 걸까 하는 생각과 함께, 친한 형이 아닌 배우 여진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직 오늘의 쇼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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