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61)화 (161/456)

161. 불장난(4)

모래가 부드럽게 밟히는 넓은 모래사장, 그런 모래사장 주변을 장식한 굳건한 모양의 바위들.

그리고 그런 바다와 모래 사이를 잔잔히 물결치는 바다가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무의미한 저 멀리의 수평선.

온통 파랗고 창연한 모습에 조급했던 마음이 한결 풀어져 부드럽게 무언가 들어차는 기분이 들었다.

먹여놨더니 기운이 났는지 우리 애들이고 새벽 형들이고 죄다 뽈뽈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형, 커피 한잔하실래요?”

“커피가 있어?”

“네. 믹스 커피가 있더라고요.”

다행히 종이컵이랑 휴지 등 일회용품이 포장된 박스도 누군가 들고 온 터라 PD님에게 달려가 애원할 일은 없었다.

불을 꺼트리지 않고 작게 유지하느라 일행이 주워다 쌓아놓은 나뭇가지 몇 개를 분질러 그 안에 던져 넣고 있던 진우 형이 웃었다.

“커피 좋지. 이야,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신선놀음 같다.”

“그쵸? 아까는 진짜 멘탈 갈리는 줄 알았는데.”

텐트 앞에 쳐둔 천막과 접이식 릴렉스 체어에 기대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생각보다 온갖 물건이 다 있었던 짐들 사이에서 인디언 행어를 찾아낸 건 나름의 수확이었다.

취사도구를 계속 쌓아놓는 것도 걱정이었는데 자잘한 도구는 행어에 걸어 말릴 수 있었다.

내용물을 비운 빈 박스를 엎어놓고 그 위에 행어를 얹어놓으니 나름 분위기가 사는 것 같았다.

버너 덕에 금방 끓은 주전자로 달콤 쌉싸름한 믹스 커피를 네 잔 탔다.

두 잔은 우리 거, 나머지 두 잔은 앞에서 촬영 중인 스태프들의 몫이었다.

“우리까지 안 챙겨줘도 되는데.”

“에이, 밥은 가서 드셔도 커피 한 잔은 잠깐의 여유죠.”

“우리 지환이가 이렇게 착해요, 하하.”

고기는 내어줄 수 없지만 커피로 생색내는 것쯤이야.

“처음 봤을 때도 보통 놈은 아닌 것 같았는데.”

“에? 제가요?”

커피가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이 헤퍼진 진우 형이 첫 만남을 떠올린 듯 말을 꺼냈다.

“무사이 미팅 때, 너희 우르르 들어왔었잖아.”

“맞아요, 그때 엄청 긴장했었는데.”

불과 몇 달 전 일인데 엄청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사이 우리에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내 마음가짐도 많이 달라졌다.

“그때 엄청 잘생긴 애들이 들어와서 쟤들은 모델이야 가수야, 이랬거든.”

“어우, 이렇게 또 금칠해주신다. 형이 남들한테 잘생겼다고 하면 그것도 이상해요.”

“뭐래.”

우리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자, 감독님이 넌지시 질문해왔다.

“무사이 촬영 때 처음 만나고 그 뒤로 친해진 거예요?”

“아, 제가 원래 윤혁이 형, 그러니까 키스 형이랑 원래 친분이 조금 있어요. 그래서 형한테 새 촬영 얘기를 하다 언래블 이야기를 하니까 막 칭찬을 하더라고요.”

“오, 언래블은 데뷔곡을 가영 씨가 만들어줘서 그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거죠?”

“네, 맞아요. 저희 첫걸음을 새벽 형님들이 도와주셔서 그때 인연이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어요. 너무 고마운 형님들이에요.”

“나는? 너 새벽 형들하고만 친하게 지내면 형이 슬프다?”

“아니, 왜 형님까지 주접캐가 됐어요!”

커피 한 잔을 오래도록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이, 방송 중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너무 즐거웠다.

그사이 있었던 데미갓과의 악연은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 더 편안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도 우리는 소소하고 재밌었던 일상 이야기와 취미, 진우 형이 겪은 촬영 에피소드 등을 나누며 모처럼의 휴식을 즐겼다.

슬슬 일행들이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왔어요?”

“커피 냄새 좋다, 나도!”

“없어.”

“너는 왜 나한테만 쌀쌀맞냐!”

“우리도 커피 한잔할까?”

“좋죠, 믹스 커피 엄청 오랜만이다!”

들떠있는 찬이가 커피를 외쳤지만, 비웃음으로 대꾸해 줬다.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우리가 투닥대는 꼴을 보며 웃던 세비 형이 주전자를 들어 일행을 둘러봤고, 다들 자리에 대충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고 온 운동화에 풀물이 들고, 모래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다들 기분은 좋아 보였다.

“아직은 물에 들어가도 된다던데 커피 마시고 입수 콜?”

“씻기 힘들 텐데 어떡하려고.”

“우물물 퍼서 씻으면 되지 뭐.”

“수영복 없잖아요.”

“수영복은 무슨. 그냥 들어가면 되지.”

“여러분, 자꾸 잊는 거 같은데 방송 중인 거 알죠?”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지, 뭐.”

세상 유쾌한 가영 형의 대답에 동생 라인은 박수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적어도 이곳에는 우리와 제작진만 있었고, 실수할까 봐 입이 바짝 마르는 생방송 무대 위도 아니어서 그런 걸까.

평소보다 다들 웃음이 헤펐다.

그리고 그 모습이 행복해서 같이 웃었다.

산책하고 온 일행들이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보고 온 것들에 대해 한마디씩 꺼냈다.

낮은 산을 끼고 한 바퀴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있었다는 말, 풀 냄새가 좋았다는 말, 해안가를 따라 걸으면 그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바다 위 모습이 장관이라는 말도.

평소에 말이 많지 않았던 세비 형도, 영빈 형도, 우리 막둥이도 오늘만큼은 웃음만큼 말이 많았다.

준이 형도 다른 형들과 함께 있어서인지, 평소의 엄격한 모습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시간을 즐기는 것 같았다.

“청바지 입고 들어가는 건 무리니까 일단 옷 좀 갈아입자.”

“진짜 다 같이 들어가자고요?”

“뭐 어때. 누가 들고 갈 것도 아니고.”

카메라를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몇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돌아가는 카메라에 아예 신경을 끊는 건 아직 우리에겐 무리였다.

“올해는 바다에 발도 못 담가봤는데 잘됐네.”

“우린 물놀이했는데!”

“야, 일하다 잠깐 논 게 무슨 물놀이야.”

키스 형이 셔츠 단추를 풀며 동조의 뜻을 보이자 비어있는 텐트로 옷 가방을 들고 가던 찬이가 외쳤다.

그걸 또 가영 형이 핀잔주자 세비 형이 가영 형의 뒤통수를 퍽 소리 나게 때렸다.

“아! 아파!”

“제발, 애들한테 질척거리자 마라, 추해.”

“질척거리다니! 친한 거야, 친한 거.”

세비 형이 볼멘소리를 내는 가영 형을 키스 형이 들어간 텐트로 밀어 넣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온 김에 우리도 좀 놀자.”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수건은 얼마나 있지?”

준이 형 말에 눈치만 보던 세빈이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어있는 텐트로 후다닥 들어갔다.

준이 형이 놀자고 하기만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별로 물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던 나는 텐트에 남아 있겠다고 했지만, 이번엔 진우 형이 이게 다 추억이라며 같이 놀자고 꼬드겼다.

아니, 왜들 이렇게 다 같이 노는 걸 좋아하지?

바닷물에 들어갔다 오면 씻고 옷 갈아입고 해야 하니 귀찮아서 빠지려 했지만, 저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조르면 또 외면하기 힘들었다.

“하아… 다들 진짜 기운이 넘치네요.”

“이 중에 두 번째로 어린 너는 왜 이렇게 기운이 없냐.”

“제가 워낙 움직이는 걸 싫어해요.”

“맞아요. 쉬는 날 밥해줄 때 빼면 환이는 러그에서 안 일어나요.”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하는 법입니다.”

결국 우리는 전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모래사장을 뛰어다녔다.

뭐, 시도까지가 귀찮았지만 다 같이 우르르 뛰어다니다 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변변한 물놀이 도구 하나 없었고, 그저 우리끼리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면서 물장구치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가영 형이 공공의 적이 돼서 모래사장을 세 바퀴 정도 구른 것 같았지만, 당사자가 제일 신나 보여서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게 장난은 적당히 쳐야지.

다른 멤버들보다 먼저 밥 준비를 한다는 핑계로 빠져나온 나는 우물물로 몸에 묻은 바닷물을 씻어내고 옷을 헹궈서 대충 널어놨다.

‘하…. 열 명이면 도대체 얼마나 먹을까.’

‘평소 너네 먹는 거 보면 소 한 마리도 먹을 것 같던데.’

‘최대한 다른 걸 많이 먹여야겠다.’

아이스박스에 있는 고기양을 가늠하던 나는 사그라들고 있는 불꽃을 되살려 가영 형이 주워온 들통에 우물물을 채워 물을 끓였고, 그 옆에 불을 하나 더 만들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섬세한 우리 찬이가 찬물로는 못 씻는 터라 우물물이랑 섞어서 씻으라고 할 생각이었다.

이 정도 양이면 다들 조금씩 나눠 쓰면 얼추 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섬 주변을 돌다 보니 사람들이 버리고 간 건지, 잃어버린 건지 알 수 없는 꽤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다.

어쩌면 바다를 타고 육지에서부터 밀려 내려온 물건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중에서도 쓸만하다 싶은 걸 가영 형과 찬이가 주워왔다. 그 쓸만한 게 둘의 기준이라 준이 형이랑 세비 형이 잔소리하기도 했지만.

“으아, 이제 추워.”

“몸이 식었으니까 당연하지.”

“저기에 씻는 데 있으니까 거기서 씻어요.”

우물이랑 조금 떨어진 곳에 물을 퍼 올 통과 바가지가 있었다.

아무리 식수로 못 쓰는 물이라고 해도 옆에서 설거지하고 씻으면 그건 좀 그렇지.

우르르 그쪽으로 가는 멤버들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며 조심스럽게 끓인 물을 가져다줬다.

“많지 않으니까 적당히 나눠 쓰고 꼭 옷은 우물물로 헹궈서 가져와요.”

“왜?”

“바닷물이면 소금물이잖아. 그대로 옷 놔두면 천 다 상해.”

상의를 훌렁훌렁 벗는 모습까지 슬쩍 찍은 카메라가 빠지는 걸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적당히 모자이크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저렇게 찍히는 것도 싫어서 먼저 빠져서 씻은 것도 있는데.

“씻고 와요.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응! 금방 갈게!”

“우와, 키스 형 복근 쩐다!”

“오, 진우 형도 은근 딴딴하네?”

“뭐야, 세빈이 복근 있었어? 마냥 애긴 줄 알았더니.”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대충 무시하기로 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훗, 나는 다 이해한다. 계약자야.’

‘아니, 뭘 이해해!’

‘괜찮다. 뭐 근육이 전부는 아니니까.’

‘이해하지 마, 그게 더 기분 나빠!’

피식거리며 내 다리를 토닥거리는 포잉의 손길에 울컥 짜증이 치밀었지만, 지금 여기서 화내면 지는 거라고 속으로 화를 눌렀다.

아니, 몸이 되다 말아서 근육이 안 붙는데 어떡해!

캠핑의 꽃인 바비큐를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며 준비하던 중 하나둘 일행이 돌아왔고, 시킨 대로 옷을 잘 헹궈온 멤버들을 칭찬해 줬다.

“…쟤 진짜 18살 맞지?”

“가끔 저도 우리 엄마가 떠오르긴 하는데 같은 반이긴 해요.”

“나는 가끔 환이가 아이돌이 안 됐으면 뭐가 됐을까 싶기도 해.”

“뭐요?”

찬이랑 가영 형이 수군거리긴 했지만, 흘려들어도 무방했다.

“얼른 준비해서 더 어두워지기 전에 고기 굽자.”

“전 랜턴 위치 잡을게요!”

“이거 채소 씻어오면 돼요?”

“이게 불 피우는 건가 봐, 여기에 숯 채우면 되나?”

한시라도 빨리 고기를 입에 넣고 싶었던 건지, 한마음 한뜻이 돼서 착착 일을 가져다 하는 모습에 포잉이 혀를 찼다.

‘평소에는 저만큼 빠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지.’

‘고기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는 거야.’

‘얼씨구.’

진지하게 답하는 내 모습에 픽 웃는 포잉이었지만, 분주하게 움직이는 우리 모습이 흥미롭다는 듯 내내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사람들을 투명한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는 포잉의 모습은 확실히 일반 고양이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숯에 불을 붙인다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다행히 우리는 해냈고, 화로에 불을 옮겨 커다란 불판을 걸 수 있었다.

“이 캠핑용 버너로 10명 먹을 거 굽는 건 무리야. 최소 두 명이 구워야 해요.”

“그럼 저기 직화구이는 키스가 하고 버너에 있는 건 내가 할게.”

“어떻게 또 형님들한테 다 맡깁니까. 이건 제가 구울게요.”

“저도 할 수 있는데!”

감자와 고구마를 잘 씻어 은박지에 싸던 세빈이와 경환 형이 자기들이 고기 굽겠다고 나섰지만, 그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그냥 제가 할게요. 아, 영빈 형 저기 물 끓나 봐줘요. 즉석밥 끓여야 돼요.”

저 둘에게 고기를 맡기기엔 고기가 불쌍해진다.

그냥 내가 하고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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