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불장난(3)
“이게 말이 돼요?”
“하, 하하…. 그러게.?”
빈 냄비를 들고 오던 세빈이도, 물건 더미에서 헤매던 형들도, 버너를 들고 현실 부정 중인 나도 모두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많은 물건들 중에 가스가 없는 게 정상인 거야?
한숨을 폭 내쉬는 포잉의 모습에 혼란스러웠던 머리에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이, 일단 진짜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해보죠. 버너가 안 되면 다른 수단이라도….”
애써 차분하게 말하려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준이 형의 목소리는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불이 없으면 2박 3일 동안 음식을 조리할 수 없다.
우리는 한 끼만 굶어도 행복 지수가 바닥을 치는 성장기 청소년들인걸?
“가스는 없는데 그 불붙이는 건 있다!”
“숯도 있는데?”
“누가 가서 가영 형 좀 데려오자. 나뭇가지 있으면 불붙일 수 있지 않아?”
어떻게든 밥을 먹겠다는 욕망이 불타올랐는지 다들 불을 지필만 한 무언가를 찾아와 또 내 앞에 쌓아줬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왜 자꾸 내 앞에….”
“환이 너는 어떻게든 해결할 것 같아서?”
“너 밥 잘한다고 소문났어.”
“밥 잘하는 거랑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언제부터 밥 잘하면 생존도 잘한다는 이야기가 된 거야.”
“아무렴 어때. 투덜거리면서도 잘하고 있잖아?”
“내가 못 살아 진짜!”
이쯤 되면 식모 취급이 아닌가 했지만 지나치게 초롱초롱한 이 인간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를 낼 힘도 사라졌다.
“파이어스틸이었나 그거 있다고 했죠?”
“근데 이걸로 불붙이기 힘들다던데 해본 사람 없지…?”
“있겠어요?”
키스 형의 슬픈 목소리에 진우 형이 대꾸했다.
“너네 뭐 하냐.”
“가영 형! 나무 많이 주워왔어요?”
“응 말라죽은 건지 꽤 많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데?”
“우리 가스를 안 챙겼더라고요….”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온 가영 형은 가스가 없어 버너를 쓸 수 없고 라면은 물 건너갔다고 말하자 나라 잃은 표정이 되었다.
“이걸로 불 피우면 라면 끓일 수 있어?”
“불을 피우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긴 한데 그 정도로 큰 냄비가 없어요. 저 버너에 세트로 들어있는 데다 끓여야 할 거 같은데.”
“그, 고기는 구울 수 있지 않아?”
“물을 못 끓이면 오늘내일 먹는 게 매우 고달파질 텐데?”
모든 끼니를 다 때울 수 있을 정도로 고기가 여유롭지는 않았다.
한참 잘 먹을 사내놈만 열 명이니 준비된 양으로는 두 끼를 먹으면 다행이었다.
한편, 캠핑용 버너라서 그런지 버너에 석쇠 같은 판과 무언가를 끓일 수 있는 깊이 있는 판이 같이 들어 있었다.
다만, 손잡이도 없는 터라 저걸 그대로 불 위에 얹어서 끓이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게 문제였다.
“…기다려봐. 내가 PD님이랑 딜해볼게.”
“진짜? 가영 형 최고다!”
“찬아, 가자!”
“저요? 나 왜….”
“잘 다녀와!”
결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가영 형은 찬이와 키스 형을 옆구리에 끼고 제작진이 자리 잡은 반대편 캠핑장으로 사라졌다.
찬이랑 키스 형을 제물로 바치고 무언가 얻어오려는 걸까?
일단 내가 그 제물이 아니니까 모른척하자.
딜이 실패할 경우를 상정해야 하는 우리는 차분하게 짐을 먼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 막는 그거 있어요? 불 주변에 둘러두는 게 있던데.”
“일단 세빈이랑 경환 형이 텐트 안에 매트 깔아줘요. 바닥에서 습기 올라오면 우리 다 몸져눕는다.”
“이불이랑 침낭 저쪽에 따로 빼놨어. 매트 깔고 안에 넣어놔.”
주린 배를 움켜잡고 먹고살기 위해 짐 정리를 시작하니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정리할 수 있었다.
텐트 앞에 천막 같은 걸 쳐놨더니 햇볕을 가려서 움직이기 수월했다.
정수리에 떨어지는 햇빛은 아직 너무 힘들었으니까.
“아이스박스 몇 개나 있어?”
“하나는 고기랑 김치 같은 거 들었고, 다른 하나는 음료수랑 물 들어 있어요.”
“햇빛 안 닿게 여기 안쪽으로 옮겨놔.”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얼음과 소중한 식량을 넣고 최대한 서늘한 곳에 놔둔 뒤, 나와 영빈 형은 주변을 돌며 마른 풀을 주워왔다.
“아무리 말라비틀어진 나무라고 해도 그냥 바로 불붙진 않을 거야. 영상에 보니까 이런 걸로 불 옮기더라.”
“이걸로 정말 불이 붙을까?”
조심스럽게 마른 풀을 바스러뜨렸다. 그 밑에는 뭉친 마른 풀을 놓고 사이사이에 자잘한 나무들 얹은 후, 준이 형이 기다란 철봉같이 생긴 물건을 손에 들었다.
“라이터는 없었죠?”
“응, 우리한테는 그런 거 없어.”
“내가 그렇게 불붙일 거 먼저 챙기라고 ….”
착잡한 얼굴로 문명의 이기를 찾는 준이 형에게 세비 형이 평소와 다름없는 자상한 얼굴로 답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물이랑 불붙일 거 챙기라고 외쳤건만, 숯이랑 버너만 챙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불이 날아간다! 이거 뭐야!”
“으악! 이거 불똥 날아오는 거 아냐?”
“손 조심해, 손!”
우리 딴에는 영상에서 본 모습을 흉내 내며 파이어스틸을 힘차게 긁었지만, 그렇게 불꽃이 확 눈 앞에 펼쳐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옹기종기 모여 나무와 풀에 불을 붙여보려 했지만, 눈앞에서 불똥이 튀는 건 조금 무서웠다.
거기다 정말 신기한 건 불꽃이 파박하고 허공에 튀었으면서도 뭉쳐둔 풀에는 잘 붙지 않았다는 거다.
겨우 붙어도 금방 꺼지는 일이 반복되어 우리가 동그랗게 준이 형을 둘러싸고 앉아 직접 바람을 막기도 했다.
“진짜 흉하다, 우리. 이거 방송 나가도 되는 걸까.”
“이대로 불을 못 붙이면 더 흉해질걸요.”
“민심이 사나워지기 전에 어떻게든 불을 붙여야 해.”
온갖 고생 끝에 겨우 풀더미에 불을 붙인 우리는 두루마리 휴지를 조금 풀어 불을 키우고 작은 나뭇가지부터 더 조금씩 찔러 넣었다.
“오! 되는 것 같아!”
“붙였다! 됐어!”
“만세!”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준이 형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나와 세비 형은 최대한 불씨를 키우고 살리기 위해 신경 썼다.
“똥강아지들! 형 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야, 진짜 내가… 하!”
“어? 불붙였네?”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한 얼굴로 옆구리에 가스 세트를 들고 온 가영 형은 불을 피우고 사방을 정리한 우리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불은 붙였는데 사실 이 불로 음식 하긴 조금 힘들어요. 위에 냄비나 뭐를 얹어서 요리하기 힘들거든요.”
“PD님이 순순히 내주진 않았을 거 같은데.”
의심스러운 듯 세비 형이 중얼거리며 가영 형 뒤에 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멀쩡한 얼굴로 온 건 가영 형뿐이었다.
그 뒤에 있는 찬이랑 키스 형은 그사이 10년은 늙은 것마냥 핼쑥해져 있었다.
“하하, 뭐 노래 한 곡 뽑고 왔지.”
“무슨 노래요?”
의외로 상식적인 요구를 하셨네 하는 생각을 하며 불을 키우기 위해 부지런히 나뭇가지를 부러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찬이가 울망울망한 눈으로 내 옆구리에 와서 찰싹 달라붙었다.
“뭐야, 위험하게 왜 이래.”
“난 역시 우리 팀이 제일 좋은 것 같아, 환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애가 이래요.”
형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칭얼거리는 찬이 등을 토닥거리며 두 형님들을 바라보자 가영 형이 방긋 웃었다.
“숫자송 부르면서 춤췄어. 그거 하면 가스 준다길래.”
“…숫자송이요?”
“그, 애기들 듣는 그거?”
“아… 네, 그… 됐어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더 이상 자세한 상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별로 보고 싶지도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흉한 몰골일 게 뻔했다.
고생한 찬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고 얻어온 가스통들을 바라봤다.
PD님이 똑똑한 걸까 우리가 모지리인 걸까.
우리 애가 수치심에 몸부림쳐가며 얻어온 참 소중한 가스들을 바라보며 하준 형이 씁쓸하게 웃었다.
반면 세비 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는 키스 형을 텐트에 밀어 넣었다.
키스 형은 소리 없이 욕하는 것 같았는데, 세비 형이 칼같이 카메라를 몸으로 차단하며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조용히 속삭이는 모습이 아주 조금 무서웠다.
오죽하면 포잉이 움찔해서 세비 형을 다시 바라봤을 정도였으니까 말 다 했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불은 계속 유지하는 걸로 하죠.”
“나랑 세빈이 찬이는 나뭇가지랑 마른 풀을 주워오자.”
“그럼 나랑 준이가 주변에 뭐 쓸만한 거 있는지 보고 올게.”
다행히 이리저리 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착하다고 해야 할지 활기차다고 해야 할지.
“밥부터 먹고 움직여요.”
참 우여곡절 많은 라면이 완성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특히 찬이는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라면을 흡입했다.
라면만으로 부족해 하길래 남은 국물에 즉석밥을 몇 개 넣어 끓여줬더니 그마저도 순식간에 동났다.
“먹었으면 일합시다.”
“우리 정말 힐링 여행 온 거 맞아?”
“…그렇다고 해. 앞에 카메라 돌잖아.”
“그걸 카메라 앞에서 얘기 다 하면 무슨 소용이야.”
알아서 편집하겠지 하는 마음인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새벽 형들은 꽤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더불어 그 사이에서 나름대로 눈치를 보던 우리도 점점 형들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우당탕거리며 이리저리 헤매는 꼴을 스태프들이 웃으며 찍고 있어서 눈치를 덜 보게 된 것도 있었다.
‘진짜 알 게 뭐야. 정 거시기하면 편집하든가 우리 따로 부르든가 하겠지.’
‘너 왜 점점 저 가영이라는 인간 닮아감?’
‘너무하네. 형에 비해서는 완전 점잖지.’
‘?’
‘?’
갸우뚱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던 포잉과 나는 동시에 질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바람막이 여깄네.”
“여기 불 앞에 막아줘요.”
내가 하나둘 먹은 것들을 정리하는 동안, 팀을 나눠 각자 할 일을 나누던 일행은 그릇을 주섬주섬 챙기는 나를 자리에 앉혔다.
“어허, 밥하는 사람은 이런 자잘한 일 하는 거 아냐.”
“아, 지금부터 이제 고기 구울 준비 해라?”
“그렇지! 다른 건 우리가 할게. 넌 맛있는 것만 챙겨줘.”
잘 끓인 라면 하나로 이렇게 일행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게 포장된 물건 더미를 뒤지기 시작한 사람도 있었고, 몇몇은 설거지한다고 그릇을 챙기기도 했다.
슬며시 일어난 나는 눈치껏 커다란 봉투를 들고 와 쓰레기를 주섬주섬 담았다.
밥 준비만 해달라고는 했지만, 어디 그게 마음처럼 쉬운 일인가.
우리끼리야 그렇다고 쳐도 괜히 시청자들에게 밉보일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기 선반 같은 것도 있다. 이런 게 진짜 캠핑용품이야?”
“저번에 봤는데 텐트 안에 완전 막 털 복실복실한 러그 깔아놓고 엄청 예쁘게 해둔 사람들도 있던데요?”
“와, 내가 알던 캠핑이랑 요새 캠핑은 또 다르구나….”
주변을 둘러보러 가는 사람, 나뭇가지 주우러 간 사람들을 제외한 세비 형과 진우 형, 가영 형이 짐들을 하나씩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헤집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가영 형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형, 이거 장비 고장 나거나 못쓰게 되면 우리가 물어줘야 돼요?”
“풉! 아니, 환이 넌 왜 이렇게 생긴 거랑 다르냐?”
방송에 나가도 되는 건지 몰라서 귓속말로 물은 건데!
내 말에 낄낄거리며 웃느라 바쁜 가영 형을 세비 형이 미쳤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가영 형이 그제야 숨을 고르며 말했다.
“쟤가 장비 고장 날까 봐 걱정하잖아. 물어줘야 되냐고.”
“아…. 우리 환이는 보기보다 세심한 구석이 있네.”
“진우 형? 보기보다는 뭐예요!”
“걱정하지 마. 어차피 우리가 쓰다 고장 나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 거야. 그렇죠?”
위아래로 끄덕이는 카메라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게 뭐가 그리 재밌는지 가영 형이 또 킬킬거리며 웃었다.
세비 형이 금방 등짝 스매싱을 날려 응징해 줬고, 그제야 부른 배만큼이나 넉넉해진 마음으로 웃던 나는 풀밭과 이어진 모래사장 너머의 바다를 바라봤다.
이제 본격적인 우리의 무인도 탐험이 시작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