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불장난(2)
“멀미약을 챙길 걸 그랬다.”
“나도 내가 뱃멀미하는 줄 몰랐다….”
창백해진 얼굴로 하준 형에게 기댄 영빈 형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평소에 차를 타도 딱히 멀미가 없었고, 비행기를 타도 괜찮아서 배도 괜찮을 줄 알았다고.
“저거는 10분? 정도만 타면 된대요. 힘내요….”
우리는 조금 넋이 나간 얼굴로 출렁이는 바다와 우리를 태우러 통통거리며 다가오는 낚싯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일정을 조율한다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급히 떠나게 될 줄 몰랐다.
이미 9월이라 더 늦어지면 야외에서의 캠핑이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다른 일정과 맞춰 최대한 빨리 간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작진의 추진력을 간과한 게 우리의 잘못이었을까.
미팅 바로 다음 날 날짜가 확정될 줄은 몰랐다.
사실상 프로그램이 거의 확정된 상태였어서 사전 준비는 이미 끝났기에 우리가 빠른 날이면 좋겠다고 하자 반색했다고.
그 결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인천으로 끌려왔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어떤 섬으로 가서 다시 개인 낚싯배로 갈아타야 한다고.
남해나 동해처럼 멀리 떠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마음의 준비도 다 마치지 못한 상태로 끌려와서 슬프다고 해야 할까.
배 타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익숙지 않은지 키스 형과 진우 형, 경환 형, 영빈 형이 멀미하느라 얼굴색이 안 좋았다.
몇 번에 걸쳐 촬영팀과 출연진을 옮긴 배가 떠난 후, 넓은 모래사장과 사방에 보이는 바다에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해지긴 했다.
포잉은 조금 질색한 표정으로 배 타고 오는 내내 내 머리에서 내려오지 않더니 이제는 모래사장을 우아한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아쉽다.’
‘뭐가?’
‘포잉이 타박타박 걷는 대로 바닥에 발자국이 찍히면 귀여울 텐데.’
‘…현실도피는 그만하는 게 좋을 거 같음.’
조금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포잉의 시선은 애써 무시했다.
바다도 좋고, 모래사장도 좋고, 갈매기도 좋고 다 좋았다.
탈출할 길이 없는 무인도라는 것만 빼면.
“여러분, 지금부터 앞에 있는 캠핑 도구들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품들을 골라가시면 됩니다.”
PD님과 제작진이 우리 앞에 산처럼 쌓아둔 꾸러미들은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였다.
“물론, 필수품인 텐트는 저희가 준비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직접 다 고를 수 있도록 하는 게 가장 좋을 테지만, 그래도 풀밭에서 자는 건 힘들 테니까요.”
“….”
“우리 입 돌아가요. 안 돼요, PD님.”
PD에게 대들 만큼 짬이 차지 않은 나와 멤버들은 애타는 눈으로 가영 형을 바라봤다.
제발, 최대한 쾌적하고 편안한 2박 3일을 지내고 싶어요!
“하하, 그럼요! 가영 씨 입 돌아가면 제가 그걸 어떻게 감당합니다. 어이쿠, 안되죠. 그래서 텐트는 총 3개를 드릴 겁니다. 4인 기준이라 10명이 자기엔 불편함이 없을 거예요.”
“휴…. 진짜 우리 캠핑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좀 봐주세요.”
겨우 얼굴색이 돌아온 키스 형이 메슥거리는 속을 누르며 말을 보탰다.
“내가 키스 씨한테 약해서 탈이야 진짜. 원래 상의할 시간 안 드리려고 했는데 키스 씨가 말해서 10분 드릴게요. 상의 먼저 하세요. 그 후 10분 안에 필요한 만큼 챙겨가시면 됩니다. 아 참, 지금 가져가시는 식재료로 떠나는 날까지 드셔야 합니다.”
넉넉한 인심을 가진 이웃처럼 친근한 얼굴을 해놓고, PD님은 지금부터 시간을 잰다며 시계를 흔들었다.
원래 상의할 시간도 안 주려고 했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자기들이 알아서 다 준비한다고 우리는 몸만 오라며!
그때부터 우리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짐을 잔뜩 실어 오길래 그래도 기대했었다.
무인도지만 우물도 화장실도 있다고 우리를 달래던 제작진의 말을 믿었다.
고작 10분 안에 10명이 먹고 자고 쉴 수 있는 짐을 챙겨야 하는데 우리가 캠핑 장비를 구분할 눈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때, 세비 형이 침착한 얼굴로 이름을 불렀다.
“가영아,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가영 형이 외쳤다.
“다 모여봐!”
다들 조금 안일했던 마음을 다잡으며 가영 형 근처로 우르르 모였다.
불안감에 떠는 불쌍한 중생들 사이에서 가영 형은 진지한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인원을 나누자. 우리가 믿을 건 인원수밖에 없어.”
“어차피 봐도 모르니까 최대한 많이 집어와야 하는데.”
골치가 아프다는 듯 쌓여있는 짐을 바라보며 키스 형이 중얼거리자 하준 형이 답했다.
“식자재 챙기는 팀과 생존 물품 챙기는 팀으로 나누죠.”
“그럼 나랑 영빈이, 환이, 찬이, 세빈이가 먹을 거 챙기자.”
하준 형의 말에 세비 형이 인원을 순식간에 나눠줬다.
재료를 보고 이 난장판에서도 음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 구분할 만한 사람과 옆에서 보조해 줄 사람을 바로 선택한 순발력에 감탄이 나왔다.
“제일 필요한 건 깔고 잘 매트, 침낭이나 덮을 이불, 불 피울 거랑 조리도구야.”
“아직 안 추운데 이불은 없어도 되지 않아요?”
“바다 한복판인데 해 떨어지고도 안 춥겠냐? 감기 걸려서 고생하기 싫으면 침낭 챙겨.”
“모기향도요.”
“…그래, 벌레 퇴치제도 챙기자.”
“불이 중요해요. 음식 할 불도 필요하지만 주변을 밝힐 불도 필요해요. 여기 해지면 진짜 아무것도 안 보일 거 같은데.”
“물은 그냥 최대한 많이 챙겨주세요. 우물물은 식수로는 못 쓴대요.”
그동안 영상을 봤던 걸 떠올리며 다들 기억을 더듬어 제일 중요한 물품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시작했다.
저 산더미 같은 물품 중에 필요한 걸 딱 골라 찾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지만, 적어도 먹고 잘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멤버들뿐만 아니라 새벽 형들과 진우 형까지 2박 3일 캠핑 여행이 아닌 생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1분 남았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PD님의 외침에 모래사장엔 뜻하지 않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지환아, 고기랑 김치, 쌀이 제일 중요하다.”
“숯이든 나무든 불 피울 거 꼭 챙겨요. 진짜 형들만 믿어요.”
“땅바닥에 놓고 먹어도 되니까 일단 먹을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
배를 탈 때부터 눈에 띄게 수척해진 진우 형이 중얼거렸다.
“시작!”
호루라기까지 준비한 PD님은 즐거운 듯 외치며 호루라기를 불었고, 그때부터 10분간 우리는 쉴 새 없이 외치고 달렸다.
“지환아! 저기 소고기 있다!”
“봤어요! 찬아, 저기 생수 묶음이랑 라면 챙겨. 세빈아, 조미료 눈에 보이는 거 다 들고 와!”
식재료를 챙기는 우리도 우리대로 아우성이었고, 생존 물품을 챙기는 팀은 더 난장판이었다.
“이게 뭐야!?”
“다 끄집어내지 말고 대충 만져보고 그냥 날라. 아니면 그냥 무조건 다 들고 가!”
“모기향 여깄다! 라이터 어딨어?”
“여기 팬 있다! 이거랑 뭐? 스토브?”
“랜턴 어딨어요? 왜 안 보이지!”
처음에는 제일 중요한 물품을 챙기려고 물건 사이를 뒤져보기도 했지만, 바로 앞에서 몇 분 남았다고 외치는 PD님 목소리에 우리는 선별을 포기했다.
그저, 뭐라도 들고 가서 어떻게든 써먹자는 마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끝! 지금 들고 있는 물건까지만 인정합니다!”
“사, 살려줘….”
“컥…!”
냉정한 외침과 함께 우리는 짐을 쌓아놨던 모래사장에 널브러졌다. 그 와중에도 세빈이는 모래사장이 아닌 힘찬이 위에 앉아 비교적 멀쩡한 모습을 보였다.
그 밑에 깔린 찬이 모습이 더 처량맞아지긴 했지만.
“하아, 하….”
“나 그냥 누워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찬아, 진짜 입 돌아간다. 안돼.”
10분이라는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물건을 챙긴다고 쉴 새 없이 뛰어다닌 통에 모두 카메라고 뭐고 더 이상 신경 쓰는 걸 포기했다.
“자, 이제부터 저희는 일절 여러분들께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텐트 칠 자리를 선정하고 시간을 보내는 건 모두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제야 왜 첫 미팅 때 대본이나 카메라를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모래사장에는 텐트 치면 안 되잖아.”
“그렇죠. 물이 어디까지 찰지도 모르는데.”
“자다 물에 빠지고 싶으면 그래라.”
“어우, 저건 꼭 한마디를 안 져요!”
그냥 우리 고생하는 모습만 찍어서 편집해도 방송 분량은 잘 나올 것 같다는 계산이 이미 있었던 듯했다.
평소에 꽃같이 단장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아이돌이나 배우니, 이렇게 구르는 것만으로도 즐겁게 볼 수 있을 테니까.
이미 키스 형과 가영 형은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투닥거리고 있었다.
“일단 섬이 크지 않으니까 우리 텐트 칠 자리부터 찾아보자.”
“그냥 다 같이 움직여요. 어차피 저쪽이 숲이니까 그 근처에 텐트 칠 자리가 될 것 같아요.”
“텐트는 들고 가자. 다니다가 자리 찾으면 몇 명은 바로 텐트 치고 나머진 짐 옮기면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다들 평소에 하는 운동량이 있어서 그런가 잠깐 앉아서 숨을 고른 것만으로도 살만해졌다.
텐트가 생각보다 무겁지 않아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다들 집어던졌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얼마 후 텐트를 칠만한 곳을 찾아냈다. 나와 준이 형, 가영 형이 텐트를 치는 동안 나머지 멤버들이 짐을 옮겨오기로 했다.
“영상에서는 막 휙휙 하니까 되던데.”
“우리 찬이랑 똑같은 얘기 하시네. 전문가랑 비전문가의 차이겠죠. 하하….”
안타깝게도 설명서가 없었던 탓에, 이리저리 모양을 잡아보았지만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자꾸 쓰러지는 텐트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얘는 왜 이렇게 휘청거리지?”
“잡아줄까?”
“저거랑 이거랑 다른 거 같은데?”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텐트 설치가 끝난 우리는 짐 나르는 걸 돕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영상을 보긴 봤더니 어떻게 되긴 하네요.”
“잘 때 날아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 폴인가? 그거로 땅에 고정만 잘했으면 괜찮을 거예요.”
그 후 열심히 날라 온 짐을 하나하나 열어서 뭐가 들었는지 확인했고, 다행히 고기와 깔고 잘 매트가 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생각보다 잘 골라온 것 같기도 하고?”
“아, 기운 빠져….”
“배고프다, 우리 뭐라도 먹자.”
다행히 들고 온 짐에는 버너가 있었다.
분명 올 때는 다들 반짝반짝한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섬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꼬질꼬질해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간단하게 라면이라도 끓여 먹죠. 그 후에 짐 정리하고 고기 구울 준비해야 되니까 나뭇가지 같은 거라도 주워오고….”
“라면!”
“아, 재료 중에 새우 있더라. 새우 넣고 끓일까?”
“큰 냄비는 있어요?”
“과정이 좀 험난하긴 했지만 우리끼리 여행 온 것 같아서 좋다, 야.”
세워진 텐트와 쌓인 물품들을 둘러보며 새벽 형들도, 진우 형도, 우리 멤버들도 무언가 묘한 기분이 된 것 같았다.
조금 들떠 보인다고 해야 할까?
“자자, 우리 지금 조금만 고생하면 저녁에 고기 잔뜩 구워 먹을 수 있으니까 힘냅시다.”
“형, 방금 멘트 되게 동네 이장님 같았어요.”
“세빈아, 네가 아무래도 키스한테 물든 것 같은데.”
“우리 막내 괴롭히지 마요!”
가영 형에게 한마디 했다가 붙잡힌 세빈이를 구하기 위해 경환 형과 찬이가 출동했고, 결국 가영 형은 세비 형에게 붙들려가서는 불 피울 나무를 구해오라는 벌을 받았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대충 짐을 분류별로 나누던 진우 형이 캠핑용 버너를, 세빈이는 라면 묶음을 들고 왔다.
“생수 잘 챙겼네. 잘했어, 찬아.”
“크, 우리 환이가 이렇게 날 칭찬하는 날도 있네.”
다행히 착착 하나씩 맞춰가며 라면을 끓일 준비를 하던 나는 영상에서 봤던 버너의 모습이 신기해서 이리저리 둘러봤다.
“이 사이즈면 여기에 라면 끓여도 될 것 같은데. 이거 하나 더 있어요?”
“어, 여기 하나 더 있다!”
왜인지 모르지만 밥을 준비하려니 죄다 내 앞에 준비물을 차곡차곡 쌓아주고 있었다.
이제 와서 왜냐고 물어봤자 돌아올 대답이 뻔해서 묻지 않기로 했다.
일단 대충이라도 배를 채워야 할 것 같아 버너에 넣을 가스를 찾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다.
“가스 주셔야 라면 끓이는데.”
“잠깐만!”
테이블 위에 버너를 올리고 잠시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건 당황한 듯한 일행의 목소리였다.
“없는데?”
“네?”
“없어, 가스….”
“왜 없….”
“그러게…?”
눈만 껌벅거리며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다 있는데 불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