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56)화 (156/456)

156. healing(4)

좀처럼 잠들지 못했던 밤들을 잊을 만큼, 하준 형과의 짧은 나들이는 지쳐있던 나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어 주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써야 했고, 숙소에 있는 멤버들이 둘이서만 논다고 징징거릴 게 뻔해서 오랜 시간을 나누진 못했다.

그저 음료 한 잔을 쥐고 잔 안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볍게 각자의 고통을 중얼거렸다.

멤버들을 챙기느라 늘 남들의 배 이상으로 시간을 쪼개서 써야 하는 리더의 비애, 하지만 그럼에도 멤버들에 일말의 원망조차 보이지 않는 너그러움.

하준 형은 그저 자신이 조금 더 빠릿빠릿하지 못한 게 답답하다고만 중얼거렸다.

곡도 쓰고 싶고, 악기도 배우고 싶고, 책도 읽고 싶고, 하고 싶은 게 참 많은데 자신이 게으르다고.

그래서 멤버들을 더 잘 챙기지 못하고 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런 리더, 민하준에게 내가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알리기 위해, 아주 조금이지만 그간 안고 있던 상처를 내보였다.

불안감에 깊이 잠드는 게 무섭고, 자주 악몽을 꾼다고.

그러다 보니 늘 피곤하고 자꾸 멍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고.

두통 없이 잠들거나 깨는 날이 드물어졌고, 옆에 멤버들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것들도 함께.

먹먹하게 젖어 드는 연갈색의 눈동자에 슬픔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어렸다. 하준 형은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언제가 됐든 멤버들이랑 꼭 여행을 갔으면 좋겠어요. 근사한 바비큐 파티도 하고.”

“애들이 어쩌고 있을지가 너무 눈에 훤히 보이는데.”

“그래도 재밌잖아요, 다 같이 있으면.”

우리는 소리를 죽여 웃었고, 너무 많은 것들을 손에 쥐려고 애쓰지 말고 더 멀리 보며 오래 걷자고 약속했다.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음료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우리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 후에는 둘이서만 쑥덕거린다는 멤버들의 거친 항의가 있었지만, 늘 그렇듯 적당히 어르고 달래서 우쭈쭈해주니 금세 넘어가 주었다.

잠들기 직전 침대에 누워 촉촉한 포잉의 코를 톡톡 두드린 나는 민하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다 사람의 감정을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나는 팬심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포잉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제발 좀 자라!’

질색하던 포잉이 결국 내 입술을 솜방망이로 후려쳤고 나도 그쯤 해서 입을 다물었다.

더 떠들면 솜방망이가 아니라 발톱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괜히 조금 설레서, 심장이 콩콩 뛰어서 내가 휘청거려도 더듬거려도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들이 생긴 것 같아서,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살아가다 보면 뭉클하고 올라오는 감정이 있고,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이 있다.

하지만 가장 신기한 건 두 감정 모두 먼저 반응 하는 게 가슴이라는 점 아닐까.

‘어떻게 생각해, 포잉?’

‘…다른 건 모르겠고, 네놈이 어지간하다는 건 알겠음.’

‘알았어, 이제 그만하고 잘게. 자자~.’

한숨을 깊게 내뱉은 포잉은 내가 우리 멤버들에 대해, 특히 하준 형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에 질린 기색이었다.

‘아니, 근데 내가 막 이렇게 편하게 말할 상대가 포잉 밖에 없는데 어떡하겠어.’

‘자라고!’

살짝 포동포동해진 배를 콕 찌르며 중얼거리다 기어코 한 대 더 얻어맞은 나는 더 이상 포잉을 도발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다행히 별다른 꿈 없이 몇 번 깨지 않고 잘 수 있었다.

* * *

“얘들아, 연습 끝났지? 잠깐 모여봐.”

“네?”

제영 쌤의 혹독함을 온몸으로 느끼다 겨우 풀려난 우리를 부른 건 소현 팀장님이었다.

“으그극… 죽겠다.”

“이상한 소리 좀 내지 마, 진짜 사람이냐?”

“니네는 아직 싸울 기운이 남아 있는 게 더 신기하다….”

늘 우리를 딱 죽지 않을 만큼 몰아붙이며 연습하는 제영 쌤의 지도 시간은 스케줄이 없는 한 매일 같이 진행되는 일상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소현 팀장님이 저렇게 한 번 더 확인하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우리는 얌전히 팀장님 앞으로 모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본 팀장님의 눈 아래, 다크서클이 더 진해져 있었다.

“팀장님, 왜 다크서클이 매일매일 심해져요….”

“좀비 될 거 같아요!”

“다 조용해 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너희 광고 들어왔다!”

“광고요? 저희한테요?”

“뭐 잘못된 거 아니고요?”

“그쪽에서 우리 이름 모르고 잘못 보낸 거 아니에요?”

연체동물의 심정을 느끼며 흐물흐물하게 허우적대다 말고, 광고라는 단어 한마디에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광고 받을 만한 일을 한 게 없는데?

못 믿겠다는 얼굴로 멤버들이 부정하자 연습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팀장님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어? 이거 지환이 먹는 비타민 거기 아냐?”

“진짜네. 여기서 연락이 왔다고요? 진짜?”

“우리 이름이 적혀있긴 한데, 이거 진짜야? 몰카 아니고?”

기력이 없다는 듯 꿈틀대던 멤버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켜 하준 형이 집어 든 종이를 바라봤다.

“아주 우리 지환이가 복덩어리야!”

“…?”

사건의 발단은 공식 카페에 올렸던 편지였다.

그 편지에 최근 식단에 대한 이야기를 적으며, 솜뭉치들의 건강이 걱정되니 영양제도 잘 챙겨 먹고 밥도 잘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솜뭉치들이 보기에 그게 퍽 재밌었는지 덧글에 ‘ㅋㅋㅋㅋㅋㅋ’이 난무했고, 곧 그 아래로 몇몇 솜뭉치들이 자신이 챙겨 먹는 약품 정보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아, 서로 정보 나누는구나, 역시 우리 솜뭉치들은 착하구나, 하고 말았었다.

내가 아직 우리 솜뭉치들의 행동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직접 덕질을 해놓고도 이렇게 아직도 모르는 게 산더미라니….

그날 ‘약빨로 덕질한다’는 기괴한 아이디가 등장했다. 그 팬은 순식간에 내가 먹는 영양제를 찾아 정리해 올리더니, 영양제의 구매처 좌표까지 함께 공유했다.

덤으로 솜뭉치들이 댓글로 남겼던 영양제까지 함께 정리해서 올려주었다.

약에 대해서는 잘 모르다 보니, 내가 구매했던 영양제는 이전 생에 누나가 챙겨줬던 제품을 그냥 믿고 샀을 뿐이었다.

다만, 이 세계에서 그 회사는 아직 규모가 커지지 않은, 생각보다 작은 회사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특정 제품의 구매량이 확 증가해서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조사에 나섰다고.

이 정도면 내가 광고를 물어온 게 아니라 솜뭉치들이 광고를 멱살 잡고 끌고 온 거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

“그쪽에서 제시한 조건도 꽤 재밌어서 일단 너희도 알아두라고 가져왔어. 조만간 정식으로 만나서 이야기해볼 거야.”

“근데 저희 나이 때 애들이 영양제 광고하는 게 통할까요?”

“그 회사, 괜찮은 곳이에요?”

우리가 광고라니…. 사실 이거저거 다 제쳐놓고 멤버들이 흥분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광고를 몇 개 찍었느냐가 바로 그 연예인의 인기 척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매일같이 병아리라고 놀려대는 지인들의 호칭처럼 우린 아직 병아리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제의를 해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솔직히 우리도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몰라서 좀 찾아봤는데, 뭐 괜찮더라. 지환이 너는 어떻게 이런 회사 제품을 알고 있었던 거야?”

“하하, 어, 그러니까… 그냥 검색하다…?”

몰랐다. 그 회사에 대해서는 쥐뿔도 몰랐고, 그냥 이름으로 검색해서 찾은 게 전부였다.

회사에서 찾아보니 이곳의 제품들은 천연재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데다 영양제들의 주요성분 함량이 높아서 시중 고가의 영양제들과도 큰 차이가 없다고 했다.

더군다나 수익의 일부를 사회 취약 계층에 기부하고 있어서 더더욱 괜찮은 기사가 될 것 같다고.

“아 참, 그리고 전에 새벽 멤버들이 와서 얘기했던 여행 프로 있잖아.”

“그, 무인도요?”

“풋! 그래, 그거. 프로그램 내용이 조금 바뀌긴 했는데 출연할 생각 있냐고 연락 왔다.”

자기들만 죽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우리와 진우 형을 물귀신처럼 붙들고 늘어졌던 새벽 형들이 떠올랐다.

덩달아 어제 촬영에서 나를 어깨에 둘러메고 촬영장을 뛰어다니던 가영 형의 모습이 떠올라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엮이면 더 피곤해질 것 같지만, 이제 와서 피한다고 피해질 것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었다.

방송국에서는 본격 힐링 방송으로 잘 포장해서 가져왔는데 회사에서 보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고 하셨다.

“새벽 형들이랑 진우 형도 똑같이 나오는 거예요?”

“응. 인원은 그때랑 동일하게 10명으로 할 거래.”

“뭐든 하면 좋죠. 어차피 일정만 안 겹치면 되니까.”

“패션쇼가 아직 날짜가 많이 남아서 괜찮을 것 같더라.”

하준 형이 팀장님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광고와 출연 제의를 동시에 들은 동생 라인은 꿈지럭거리며 모였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이제 막 바짓가랑이 붙잡고 안 늘어져도 일이 생긴다?”

“이게 바로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는 그런 루트인 건가?”

“조용해요, 진짜. 내가 형들 때문에 창피해서 못 살겠어….”

대화 내용이 안 들리면 모를까 바로 옆에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게 참 없어 보였다.

“광고 가져왔다고 이제 막 우리를 찬밥 신세로 만들고, 막 지환이가 우리를 구박하고.”

“우리 같은 힘없고 어리고 인기 없는 쩌리들은 원래 이렇게 묻어가는 거야.”

“아, 쫌!”

이 대화가 어디까지 갈까 싶어 찬이와 경환 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더니, 내용이 점점 더 산으로 가고 있었다.

어휴, 정말 언제 철들려고.

그 가운데 잡힌 세빈이만 수치심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감정에 얼굴이 빨개져서 둘을 떼어놓으려 버둥거릴 뿐.

우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맏형인 준이 형과 영빈 형은 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희야 뭐 어디든 불러 주시면 감사합니다, 하고 가야죠.”

“그럼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마.”

“그, 팀장님. 잠은 좀 주무시면서 일하세요.”

“노력해볼게….”

방금까지 신나서 날아갈 것 같던 양반이 잠 좀 자면서 일하라는 한마디에 다시 퀭해졌다.

우리 언래블이 짧은 시간 동안 워낙 다사다난했던 터라, 섭외가 들어오는 모든 프로그램의 검토를 팀장님이 하고 있다고 들었다.

잡지나 신문사의 인터뷰 제의도 1차적으로는 팀장님의 팀원들이 거르고 2차에서 팀장님이 한 번 더 걸렀다.

방송국을 돌아다니며 품을 파는 건 석환 형과 우진 형이 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어쨌든 사람이 퀭해질 때까지 못 자는 건 조금 안쓰러우니까.

“우리 환이가 다 커가지고 이제 팀장님 걱정도 하고.”

“팀장님 걱정하는 만큼 형들도 걱정해 줬으면 좋겠지만, 그건 꿈이 너무 크지?”

“아무렴. 난 쟤가 어느 날 사실은 제가 님들보다 형이에요, 이러면서 민증 들고 와도 안 놀랄 자신 있어.”

“팀 내에서 나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는 아주 잘 알겠네요.”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있었지만, 멤버들은 풍선처럼 부풀던 마음을 이내 추슬렀다.

제의가 들어온 거지 확정은 아니었다.

이 바닥에서 서로 간 보다 끝난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괜히 설레발치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적당히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어야 했다.

“큼, 그래도 기분은 좋다. 안 그래?”

“그러게. 다 잘 됐으면 좋겠다.”

“그래도 우리 다 같이 여행 가는 거잖아. 우와… 진짜 난장판이겠는데?”

솔직하게 촬영을 시작한다고 해도 걱정이 될 것 같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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