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사랑하게 될 거야(5)
언래블의 컴백 날 자정, 공카에 여섯 명의 멤버가 나란히 글을 올려 솜뭉치들을 들뜨게 했다.
글에는 하나같이 이미지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각자의 개성이 고스란히 녹아든 편지였다.
다정다감이라는 감정이 사람으로 태어나면 저럴까 싶은 하준은 생각보다 어른스러운 글씨체로 다정히 솜뭉치들의 일상을 물어왔다.
멤버들의 장난이 심해졌다는 둥 곡을 고민 중이라는 둥 자신의 이야기보다 멤버들의 생활과 곡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아 그의 애정과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편지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평소에도 말이 별로 없는 영빈은 가장 빼곡하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안에 평소의 일상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편지를 천천히 읽다 보면 영빈의 삶에 언래블이라는 그룹이, 그들의 팬인 솜뭉치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셋째 경환은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잔정도 많기로 유명했다. 간혹 공유되는 직찍들에는 늘 멤버들을 챙기는 모습, 동생 라인과 스스럼없이 장난치는 모습이 늘 담겨 있었다.
그런 경환이 남긴 손편지에는 군데군데 하트가 남아있어서 그 갭 차이에 솜뭉치들이 오열하며 이 편지들을 모두 출력해서 소장해야 한다고 했다.
작은 환이 사건 사고를 많이 몰고 다니는 건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했다. 그래서일까? 지환이가 적어준 편지에는 팬들의 안부와 건강에 대한 글이 가득했고, 과일을 많이 먹으라는 등 몸에 좋을 것 같은 것들을 공유하고자 하는 열망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작은 환이 올린 글에는 온갖 건강에 좋다는 음식 이야기와 한결 귀여워진 글씨체에 대한 칭찬이 가득했다.
어떤 솜뭉치의 증언에 따르면 흡사 맘카페를 보는 것 같았다고….
찬이와 세빈이는… 길게 글을 쓰는 재주는 없는 게 확실해 보였다.
애를 쓴 것은 같으나 짧게 끝난 편지에는 형들이 구박하고 있다는 말과 연습이 너무 힘들었지만 재밌었다는 말들이 들어있었다.
정말 딱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들같이 투박한 내용이었다.
한 가지 특이점이라면 찬이는 세빈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적었고, 세빈이는 찬이가 괴롭힌다고 적었다는 것 정도?
얼마나 열심히 한 자 한 자 힘을 줘서 썼는지 이미지로 찍힌 편지지에 글자 모양에 따라 편지지가 꾹 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그날 편지를 확인한 솜뭉치들은 각자가 이용하는 커뮤니티나 SNS에 모여 알찬 덕질에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 티저로 내내 우리 심장을 쥐어짜더니 자정에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한다고? 갭모에에 치인 나는 여기서 눕는다ㅠㅠㅠㅠ
ㄴ난 아파트 뿌셨다ㅠㅠ Sㅣ발!!!!!! 뮤비 개쩔어서 호달달 했는데 왤케 귀엽냐!!!
- 우리 애들 너무 귀여워…. 저거 쓴다고 다 옹기종기 모여서 머리 싸매고 있었겠지?
- 작은 환 편지 뭐냐곸ㅋㅋㅋㅋㅋ우리 엄마랑 잘 통할 거 같다….
ㄴ그걸 또 다 받고 자기가 아는 건강식품이나 비타민제 추천하는 솜뭉치들도 귀여워 ㅋㅋㅋㅋ
ㄴ나 댓글 보고 장바구니에 비타민 다 담았잖아 ㅋㅋㅋㅋ
ㄴ건강하게 덕질하잨ㅋㅋㅋㅋㅋ
ㄴ정말 약 빨고 덕질하냐고 우맄ㅋㅋㅋㅋㅋㅋ
- 귀염뽀짝하던 세빈이가 이제 막내 온탑에 한 발자국 다가서고 있어! 세빈아! 누나가 응원한다ㅠㅠㅠㅠ
- 어떻게 이런 애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 이 솜뭉치밖에 모르는 멍충이들ㅠㅠ
사방에서 아파트와 지구를 부쉈다는 솜뭉치들이 속출했고, 다들 앞으로 꾸준히 올라올 언래블의 방송 일정을 기대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일해라, ON 엔터! 정균찡!
* * *
출연을 약속한 프로그램의 미팅을 매니저 형들, 혹은 팀장님과 다니고, 그사이 연습도 쉬지 않았다. 바쁘게 며칠 지나니 드디어 공방의 컴백 무대 날이 됐다.
아직 대기실을 받을 짬이 안 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우리는 파티션으로 팀별 자리를 나누던 곳에 도착해 우리 자리를 찾고 있었다.
“형, 왜 우리 이름 없어요?”
“그러게. 형이 가서 알아보고 올게,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데뷔 무대를 치른 곳이라 이곳의 길은 대충 외우고 있었다.
한데 아무리 찾아봐도 우리 이름이 보이지 않았고, 우진 형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그때, 우리를 발견한 조연출이 우진 형을 알아보고 다가와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우진 씨? 언래블 맞죠?”
“엇,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언래블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있기에 적당히 소리를 줄여 꾸벅 인사를 건넸다.
방송국 사람들 얼굴은 최대한 외우자는 내 의견에 따라 멤버들은 정말 열심히 외웠다.
누구라도 지나가면 가볍게 목례라도 꼭 인사를 건넸다.
“오늘 따로 대기실 배정됐을 텐데, 왜 여기 있어요?”
“네? 따로 전달받은 게 없어서….”
“하씨, 누가 또 빼먹었나 본데. 따라와요, 안내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김만수라는 저 조연출은 박세날 PD의 측근이라고 했었다.
정말로 박세날 PD가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신경을 써주고 있는 것 같아서 무척이나 고마워졌다.
그 딴에는 무사이에서 데미갓이랑 엮이면서 생긴 여러 사건 사고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만, 어쨌든 잘 챙겨주면 우리야 좋은 거지.
조연출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걸어 나가는 나와 우리 애들의 등 뒤로 여러 시선이 들러붙었다.
호기심, 호감, 의아함 같은 몽글 몽글한 감정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 같은 그런 날카로운 감정들까지.
은근슬쩍 노려보던 누구도, 속으로 우리를 욕하던 사람들도 눈이 마주치면 순진무구하게 웃는게 우스웠다.
혹시나 또 다른 적이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안 그래도 이름을 아는 사람들에 한해 스킬을 켜서 속마음을 한 번씩 확인했다.
[쟤네가 걔네네. 데미갓 조진 애들.]
[우리 또래 같은데 친해져 볼까?]
[눈 큰애 쟤 내 취향이네. 번호 물어볼까.]
[아, 관종 새끼들.]
[줄 잘 잡았나 보네. 부럽다, 시발.]
[쟤가 곡 쓴다던 걔 같은데, 진짜 지가 한 거 맞아?]
이름을 아는 아이돌이 많지 않았지만, 최대한 머리를 굴리고 그룹 이름으로 눈치껏 슬쩍 검색하고 해서 짧게 한마디씩 확인했는데도 속이 울렁거렸다.
“와, 대기실!”
“진짜네?”
“큼, 컴백 무대라고 박 PD님이 신경 써주셨네.”
대기실에 도착한 찬이랑 경환 형의 조잘거림에는 잔뜩 신난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그런 멤버들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던 준이 형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표정 관리한다고 했는데도 눈치 빠른 하준 형은 내가 평소랑 다르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좀 피곤해서 그래요.”
“그러게 일찍 일찍 좀 자라니까.”
한결같은 우리 리더 모습에 괜히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 입 안쪽 살을 살짝 깨물어 꾹 참았다.
아직 안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편히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조연출의 뒤를 따라 배정받은 대기실에 도착한 멤버들은 들뜬 마음을 안고 스태프분들을 도와 짐을 나르고 정리했다.
‘계약자야, 무리하지 말라니까.’
‘괜찮아, 네 말대로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어느새 옆에 다가온 포잉이 내 다리를 툭툭 두드리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환아, 넌 눈 좀 감고 있어.”
“그래, 얼굴색이 또 왜 이래. 아픈 거 아니지?”
“내 인형 빌려줄게, 눈 감고 있어.”
멤버들이 달려들어 나를 소파에 눕히더니 찬이는 자기가 안고 다니는 인형까지 내 품에 안겨줬다.
정말 괜찮았지만, 멤버들이 챙겨주는 게 내심 싫지 않아 모른 척 누워있기로 했다.
그런 내 배 위에 올라온 포잉은 품에 다른 인형을 안고 있는 게 못마땅했는지 슬쩍 옆을 비집고 들어와 누웠다.
‘너는 어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냐, 계약자야.’
‘포잉이 도망갈까 봐?’
‘말이나 못 하면.’
살짝 눈을 떠서 바라본 포잉의 찌푸린 미간이 귀여워 보였지만 다시 얌전히 눈을 감았다.
‘억지로 스킬 쓰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살아도 된다.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언제는 있는 것도 못 써먹으면 바보라며?’
‘너랑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을 필요 없다는 거지.’
‘응, 고마워.’
포잉은 그간 내 성장을 기뻐하면서도 주어진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몇 번이나 말을 했었다.
조금 더 편하게 갈 수 있을 텐데 왜 사용하지 않냐면서.
하지만 나는 이대로 이능에 익숙해진다면 언젠가는 나를 위해서, 언래블을 위해서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게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당장 ‘내적친분’ 스킬을 쓰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 스킬을 쓰면 상대는 이유도 모르고 나에게 호감을 가진 상태로 변할 거고, 나는 상대방의 속마음을 읽고 원하는 말만 들려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따로 활성화하지 않아도 늘 정신력을 강하게 붙들어 주는 특성 스킬 외에 다른 스킬들은 거의 손을 안 대고 있었다.
온갖 이득 될 만한 것들만 따져서 언래블을 키운다면, 훗날 나는 과연 스스로에게 언래블이 본인의 실력을 꽃피워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언래블을 위한 꽃길이 아니다. 그저 말 잘 듣는 인형을 원하는 것뿐이다.
동경하던 우상을 향한 내 마음에 스스로 침을 뱉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정말 위험한 순간이나 외부의 위험에 대항하는 게 아니라면 스킬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런 능력을 모르는 평범한 시절의 나는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면 참 편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사람은 생각보다 더 날 것의 감정들을 속에 담고 살았다.
단순히 글자로 보이는 내용들에서도 선명할 만큼의 악의가 느껴지는 데 오죽할까.
포잉은 내 정신이 섬세해서 더 크게 느끼는 거라며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과연 적응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너는 늘 너무 생각이 많아.’
‘지금은 아무 생각 안 하고 있어.’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셈.’
뚱한 포잉의 목소리가 들려와 웃었다.
포잉이 눌러앉은 한쪽 가슴이 따끈따끈해져서 팽팽해졌던 신경 줄이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포잉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당연한 소릴.’
잠깐 잠이 들었을까? 눈을 감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포잉을 조심스럽게 두드려 깨운 나는 대기실 안을 둘러보다 인원이 빈다는 걸 깨달았다.
눈에 보이지 않자 희미한 불안감이 차올라 우진 형에게 자리에 없는 둘의 위치를 물었다.
“형, 경환 형이랑 찬이 어디 갔어요?”
“화장실 간다고 나갔어. 슬슬 올 때 됐는데.”
“제가 나가서 찾아볼까요?”
“아냐, 지환아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우진 형 모습이 왠지 모르게 조금 상처였다. 이렇게까지 내가 신뢰가 없다니.
“어디 나가서 사고 치지 말고 여기 있어.”
“준이 형… 억울해, 억울하다! 내가 언제 사고 쳤다고!”
“그래, 우리 환이는 사고 안 치지. 그냥 사고가 생길 곳에 머리를 밀어 넣어서 그렇지.”
“영빈 형이 제일 나빴다….”
준이 형과 영빈 형까지 내가 나가는 걸 반대했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혼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막내 세빈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재밌다고 웃고 있었다.
멤버들을 괴롭히고 싶다는 심술이 가득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괜히 까불다 무슨 일 생기면 또 내 탓이 될 것 같아서 피하기로 했다. 쳇
원래라면 그냥 철제 의자나 맨바닥에 뭐하나 깔고 앉아있어야 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로 푹신하지 않은 이 소파라도 지금의 나에겐 감지덕지였다.
애들이 왜 안 오지.
‘포잉, 미안한데 애들 좀 찾아봐 줄 수 있어?’
‘CCTV로는 부족했냐, 계약자야.’
‘하, 하하….’
한쪽 눈만 슬며시 떠서 나를 바라보던 포잉은 깊은 한숨과 함께 터덜터덜 문밖으로 사라졌다.
“지환아, 메이크업하자.”
“넵.”
의상을 주섬주섬 챙긴 나는 얌전히 희주 누님에게 얼굴을 맡겼고, 누님은 능숙하게 내 얼굴을 방송용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경환 형과 찬이가 조금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와 문을 황급히 닫았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환아, 넌 움직이지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던 나를 희주 누님이 어깨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 하게 말렸다.
그사이 얼굴을 굳힌 우진 형이 둘에게 다가가 이리저리 몸을 살피자 경환 형과 찬이가 손에 꾹 쥐고 있던 무언가를 우진 형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요새 애들 너무 무서운 거 같아, 형.”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답답하다는 듯 빨리 말하라고 다그치는 준이 형에게 둘은 자신들이 겪은 일을 더듬더듬 설명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갈 때는 아무 문제 없었다고 했다.
다른 그룹 멤버들을 만나 인사도 하고 서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면서 놀러 가기로 약속도 할 정도로 급격히 친해졌다고.
문제는 돌아오는 길에 생겼다고 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는 바람에 서둘러 화장실에서 나오던 그때, 한 걸그룹 멤버들과 마주쳤고, 4년 차 선배님들인 터라 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고 했다.
“두 분이었는데, 그, 막 어깨랑 등을 만지더니 연락하라고 번호를 주셨….”
“아니, 미쳤나 진짜!”
순해 빠진 멤버들은 차마 선배들에게 무어라 말도 못 하고 도망치듯 자리에서 달려 나왔다고 했다.
괜히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겁나기도 했고,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몸을 만져대서 민망했다고.
혼이 쏙 빠진 얼굴들이었다.
“하아…. 어디 애들이었어?”
“레드 로즈 선배님들이요….”
“쯧….”
낮게 혀를 찬 우진 형은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둘을 질질 끌고 와서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는 데뷔하기 전부터 회사가 누누이 강조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꺼냈다.
“그래도 혼자 있던 게 아니라 둘이 있어서 다행이었네. 형이 미리 말했지? 소속사 몰래 자기들끼리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애들도 많아. 그런데 물들면 큰일 난다. 그러다 망한 애들을 내가 한두 명 봤겠냐.”
허구한 날 연습실에만 박혀 살던 우리 애들이 외부에 너무 날을 세우는 것 같아서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바로 몸 빼고 온 것도 잘했고, 번호 나한테 가져온 것도 잘했다. 걔네도 뉴페라서 그냥 찔러보고 장난치는 걸 거야. 앞으로도 나갈 때는 스태프랑 움직이던가 두 명 이상이 움직여.”
“넵….”
도대체가 한시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