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사랑하게 될 거야(4)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안을 두리번거리는 멤버들의 모습에 팀장님은 목소리에 즐거움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저번에 패션쇼 기억나?”
“아, 네. 그 초록우산이랑 선배님들이 말씀하신 거.”
“거기 출연하기로 했다는 게 어디서 소문이 났는지, 쇼에 참여하는 몇몇 브랜드에서 협찬을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
“우와! 우리도 막 이제 협찬받고 그러는 거예요?”
좋은 일에 한 손 거들려 했을 뿐인데 협찬이 따라왔다.
세상에! 역시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
한가득한 옷들을 행복한 얼굴로 분류하던 희주 누님과 가희 누님이 잔뜩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활동 내내 이 의상들만 입어도 되겠어! 이제 협찬 구하러 안 뛰어다녀도 돼!”
“이 정도면 활동 내내 다 입어도 못 입겠는데?”
둘의 즐거운 비명을 뒤로하고 나와 멤버들의 눈동자가 옷더미에 갔다가 누님들에게 갔다가 다시 팀장님에게 갔다.
“왜?”
“그, 저희 오늘 미팅은요?”
“아, 내 정신 좀 봐. 영빈이랑 하준이가 준비하고 있을 거야. 가자.”
어떻게 됐든 ‘다들 좋아하니까 됐지’ 하면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봐도 내가 뭘 알겠나 싶은 게 제일 컸다.
그래도 협찬이라니, 조금 들뜨긴 했다.
이제는 정말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연예인으로 보는 것 같아서.
방긋방긋 웃던 멤버들이 평소 자주 사용하던 회의실에 들어서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하준 형과 영빈 형이 손을 흔들어 반겨줬다.
“모델로 워킹도 해야 하고 무대도 할 거야. 그래서 영빈이랑 무대 구성을 좀 생각해봤어.”
오자마자 바로 일거리를 안겨주는 하준 형.
“그건 그렇고 팀장님이 출연 요청 온 거 주셨어. 그중에 우리가 나갈 수 있는 걸 고르래.”
“우리가요?”
영빈 형은 옆에 놓은 종이 뭉치를 엉거주춤 앉는 우리 쪽으로 내밀었다.
“고른다고요? 다 나가는 게 아니라?”
“시간대가 겹치는 게 좀 있더라고.”
“이상한데.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우리한테 갑자기 이렇게 일이 생긴다고?”
이제 막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 넷은 지금 이 상황들이 전부 이해되지 않았다.
불러주는 데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고 전전긍긍하고 잠든 게 얼마 전이었고, 어디든 불러만 주면 회사에서 주는 곳은 다 나가야지 한 게 바로 어젯밤이었다.
“갑자기 왜 이래… 뭐야, 나 무서우려고 해.”
“나도 좀 무서워, 왜 이러냐….”
찬이랑 내가 수군거리자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던 팀장님이 싱긋 웃었다.
“박세날 PD가 너희에 대해 좋은 소문을 내줬어. 거기다 얼마 전에 미궁 탈출이 재방하면서 너희 모습이 꽤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고.”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막 일이 넘친다니까 이상하긴 하네요.”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데, 데미갓이 나가리 됐잖아? 걔네가 맡았던 포지션이 죄다 공중에 붕 뜨면서 걔네 밑 급이었던 다른 애들은 그거 나눠 먹기 하느라 바빠졌고, 그러면서 방송가에 우리에 대해 괜찮게 얘기가 돌았더라고.”
망둥이가 던진 작은 공이 이렇게 스노볼을 타고 여기까지 왔다는 게 팀장님의 설명이었다.
우리가 그 시기 이슈를 타고 노이즈 마케팅을 했으면 얻지 못했을 성과들이라고.
멤버들의 단단한 모습과 그런 일을 잘 흘려넘긴 멘탈, 컴백 무대에서의 좋은 모습이 시너지를 일으켰다는 게 회사의 평이라고 했다.
“아, 영빈이, 찬이, 세빈이는 석환이랑 미팅 다녀와. 어제 말한 프로 하기로 했다.”
“그럼 패션쇼 미팅은요?”
“팀장님이 알아서 할게.”
“네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멤버들이었지만, 조건 반사처럼 지명 당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빈 형이 그런 둘을 끌고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하준 형에게 물었다.
“그, 오늘 미팅에 누구누구 오시는 거예요?”
“한울에서는 나민수 선배님이랑 효성 선배님이 오신다고 했고, 재단 분들이랑 화연대 학생들, 그리고 같이 쇼를 할 분들이 온다고 하셨는데 다는 모르겠다.”
생각보다 큰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것 같았다.
원래는 외부 공간을 빌려서 만날 예정이었지만, 어른들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야기가 오가다 결국 우리 회사 대회의실에서 모이기로 했다고.
“기분이 쫌 이상한데.”
“왜?”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패션쇼라고 하니까요.”
나는 패션이랑은 거리가 멀고도 멀었다.
전에도 보통은 누나가 골라주는 것들로 사고 입는 편이었어서 그쪽에는 영 문외한이었다.
반면에 찬이나 경환 형은 자기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었고, 영빈 형이나 하준 형은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세빈이랑 나만 그냥 눈에 보이는 거 집어 입는 편이었고.
“잘할 수 있을까요?”
“워킹도 배워야 할 텐데.”
“좋은 일에 괜히 먹물 뿌리면 안 되는데….”
우리끼리 수군거리며 불안해하자 팀장님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좋은 일에 참여하겠다는 의지 자체로도 충분해. 워킹이나 포즈는 도움 주시는 분들 계시니까 그분들한테 짧게라도 배우면 돼.”
팀장님은 우리가 잘 해낼 거라 믿고 계시는 것 같은데, 도무지 저 믿음의 근거를 모르겠다.
한숨을 폭 내쉰 나는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던 종이 뭉치로 눈을 돌렸다.
“어? 여기서도 저희한테 출연 요청 왔어요?”
“뭔데?”
“해피엔딩이라고 예전에 유명했던 노래 리메이크해서 무대하는 프로예요.”
“아, 나도 들어본 것 같다.”
종이에는 프로그램명과 프로그램 설명,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내용을 기대하는지에 대한 예측이 비교적 상세히 적혀있었다.
잘 모르는 우리를 위해 회사 분들이 고생해 주신 것 같았다.
“고민 상담해 주는 프로그램도 있는데요?”
“뭔가 종류가 엄청 많아.”
한 부씩 쥐고 꼼꼼히 살피던 나는 하나의 이름에 손이 멈췄다.
“Beyond the line”
“그건 어떤 프로야?”
“어, 일종의 자기소개 같은?”
“자기소개?”
경환 형과 하준 형의 시선이 내가 말한 프로그램의 설명으로 향했다.
러닝 타임이 꽤 짧은 프로그램이었지만, 출연자에 집중해 그 사람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나쁘지 않은 프로였던 기억이 났다.
더불어 내 기억이 맞다면 하준이 여기 나왔었다.
2집이 아니라 3집 때였던 것 같지만.
“여기 하준 형 나가면 좋을 것 같은데.”
“나? 나보단 지환이 네가 나을 것 같은데?”
“에?”
“내가 보기에도 지환이가 나가면 좋을 것 같아.”
원 기억대로 하준 형을 추천했지만, 되려 준이 형과 경환 형은 나를 떠밀었다.
“제가요? 이런 건 리더가 딱이지. 간 김에 우리 홍보도 좀 하고.”
“다수결로 하자. 이건 애들 오면 얘기해보는 걸로.”
“아니, 잠깐만요. 왠지 그건 내가 불리할 것 같은데.”
들은 척도 안 하고 둘 다 연필로 제목에 체크해두는 모습에 우리를 조용히 지켜보던 우진 형이 한마디 보탰다.
“나도 지환이나 하준이가 나가면 좋을 것 같아. 대본이 주어지긴 할 테지만 거긴 혼자서도 말을 좀 잘하는 애가 나가는 게 나을 것 같더라.”
어쩐지 점점 내가 나가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다가왔지만, 애써 모른척했다.
“아, 마음 같으면 이거 다 나가고 싶은데….”
“스케줄이 겹치는 게 꽤 되는구나….”
처음 데뷔하고 나서는 여기저기 인터뷰는 있었어도 직접 나갈 수 있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었다.
그땐 우리가 직접 영상을 찍어서 올리고, GIVE 앱을 통해 팬들과 소통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조금 더 일이 많아지려나 싶은 시점에 데미갓, 아니 망둥이랑 얽히면서 새로 하려던 프로도 없어지고 제의 오는 곳도 없었다.
덕분에 더 빨리 컴백 준비를 한 것도 있지만.
그래서 지금 상황이 더 믿기지 않고 둥둥 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손님들 올 시간 다 됐다, 이동하자.”
“네엡.”
부지런히 움직여 회의실에 도착하자, 곧바로 나민수 선배님과 효성 선배님이 들어섰다.
“요, 병아리들 잘 지냈어?”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언래블 하준입니다.”
“안녕하세요, 효성이에요~. 아휴, 민수 오빠가 엄청 칭찬하던 그룹이네.”
“애들 엄청 잘생겼지? 착하기도 엄청 착해.”
“이 오빠가 또 주책이네, 아휴, 이해해요. 오빠가 늙어서 그래요.”
방긋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준 분은 요새 인기 있는 개그우먼으로, 방송할 때 특유의 억양이 통통 튀는 듯 독특한 분이었다.
“형님, 저희 병아리에서 언제 졸업해요?”
“내가 환갑쯤 되면 너희도 졸업하지 않겠냐?”
“윽, 형님이 병아리라고 하시니까 다른 분들도 저희보고 병아리라고 해요.”
울상이 된 경환 형이 같이 출연했던 무사이의 출연진들까지도 우리에게 병아리라고 한다며 툴툴거렸다.
찬이랑 세빈이가 없으니 경환 형이 곰살맞게 굴고 있어서, 준이 형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생각보다 경환 형이 애교가 많다니까.
“오늘은 영진 형님은 안 오시는 거예요?”
“영진이는 오늘 스케줄 있어서 효성이랑 왔어. 얘가 좀 시끄러워도 이해해.”
화기애애하게 인사하는 사이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언래블 하준입니다.”
“반가워요, 이경아예요.”
“박민지라고 해요.”
초록우산에서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분들과 함께 처음 아이디어를 낸 화연대 학생들이 왔다.
화연대 학생들은 처음에는 쭈뼛거리는 듯하더니, 곧장 우리 신체 조건을 확인하며 의상 이야기를 나누는 등 적극적인 모습에 우리를 놀라게 했다.
곧이어 문 너머에서 복작복작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DCL 리우입니다.”
“어? 휴이?”
저번 무대 때 리더들의 친분을 연결 끈 삼아 급격하게 친해졌던 얼굴들이 들어왔다.
“병아리들, 우리 왔다!”
“가영 형?”
“다들 잘 지냈어?”
“진우 형?”
갑자기 아는 얼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와서 우리 셋은 멍한 얼굴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순식간에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이 한마디씩 인사를 보태며 회의실이 시장 바닥처럼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했다.
우진 형은 인원들의 매니저들을 하나둘 챙겨 인사하고 커피를 권하는 등 인맥 관리를 시작했고 팀장님은 다른 직원분들과 함께 음료를 챙기고 있었다.
“아니, 무슨 이게 언래블 친목 파티도 아니고.”
“그래도 이렇게 보니까 반갑지?”
“네, 반가운데 정신은 없네요.”
진우 형이야 무사이 때 인연으로 민수 선배님이 이야기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DCL이나 새벽 형들이 함께할 줄은 몰랐다.
“근데 이게 다 온 게 아냐. 더 많아.”
“네? 이게 다가 아니라고요?”
“오늘 바빠서 못 온 사람들도 많거든.”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프로젝트가 굉장히 큰 것 같아서, 약간의 원망을 담아 나민수 선배님을 바라봤다.
처음에 말씀하실 때는 그냥 작은 패션쇼를 할 거라고 그렇게 얘기하셨잖아요….
이렇게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서로 인사하고 어색함을 없애느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잠깐 주어졌고, 정리된 뒤에는 재단에서 온 분들과 학생들이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서울과 대전, 부산에서 순차적으로 패션쇼가 진행될 거고, 각 도시별 주제가 정해져 있다고 했다.
패션쇼의 입장권 수익은 전액 초록우산 재단을 통해 기부되며, 패션쇼에서 선보일 의상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진행될 작은 패션쇼로 기획했지만, 몇몇 브랜드에서도 동참 의사를 밝혀오면서 프로젝트가 커졌다고.
그 덕에 우리에게도 협찬이 들어온 것 같았다.
패션쇼는 위캠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될 거고, 초록우산 재단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의상을 구매할 수 있게 준비 중이라고 했다.
“브랜드별로 가장 이미지에 부합하는 분들로 나눠서 배분해드렸어요. 의상은 받으셨죠?”
“저희가 준비하고 있는 의상은 조만간 회사를 통해서 전해드릴게요.”
우리가 신경 못 쓰던 사이에도 회사는 계속 일을 하고 있었던 게 이런 부분에서 드러나자 약간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일정에 대한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이 오가고 서로 궁금한 점을 주고받다 보니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쇼에 대한 진지한 의견과 이야기가 오가서일까, 에어컨을 틀어놨는데도 회의실 안이 후끈 달아오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서로 서먹서먹했던 사람들도 웃으면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모습에 씩 웃던 나민수 선배님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꽤 큰 프로젝트가 되긴 했는데, 어차피 좋은 일 하자고 모인 거니까 열심히 해봅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큰 목소리로 서로에게 인사와 격려를 보내는 모습. 그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게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영빈 형이랑 찬이, 세빈이 없는 게 좀 아쉽다.”
“그치? 여기 있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그 와중에 다른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셋이 생각나 경환 형에게 소곤거리자 옆에서 우리 말을 들은 준이 형이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우리 병아리들, 형 안 보고 싶었냐?”
“아, 왜 형까지 병아리래요!”
“민수 형님이 알려주시던데? 왜, 싫어? 가서 말씀드릴까?”
“아니, 민수 선배님이랑 형은 다르죠!”
저 심술 맞은 가영 형만 아니면 더 좋은 분위기가 될 것 같기도 했다.
한쪽에서 DCL의 리더 리우 님이 준이 형에게 병아리? 하고 입 모양으로 이야기하자, 준이 형이 방긋 웃으면서 똑같이 입 모양으로 대꾸했다. ‘닥쳐.’라고.
열정적이고 즐거웠던 회의 끝의 작은 에피소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