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사랑하게 될 거야(3)
바짝 긴장한 상태로 하루를 보낸 만큼 라디오가 끝난 후 멤버들은 저마다 눈가가 조금 처지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었다.
작게 하품을 하기도 하고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을 켜자마자 얼굴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우리 애들은 천상 아이돌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서 카메라를 향해 나도 같이 웃었다.
“솜뭉치들이랑 더 많이 대화하고 싶었는데 우리가 너무 급히 와서 아쉬워서 방송 켰어요.”
“잠깐이라도 여러분들이랑 대화하고 싶어서요.”
“오셨던 분들은 다들 잘 들어갔어요?”
“우리 오늘 라디오 어땠어요?”
한시도 오디오가 빌 틈이 없었다.
멤버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질문을 던지고 인사를 건네고 하느라, 촬영용 휴대폰을 들고 있던 내가 결국 한마디 했다.
“쫌!”
“윽, 환이가 또 잔소리한다!”
“잔소리가 아니라 솜뭉치들이 정신없을 것 같으니까 교통정리 좀 하자.”
“솜뭉치들이 우리 귀엽대. 좋다는데?”
채팅창에는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멤버들의 이름을 부르며 저마다 신나 하는 솜뭉치들이 있었다.
그 가수에 그 팬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거구나, 하하.
“자, 인사는 방금 했으니까 넘어가고 조금 천천히 말하자.”
“아직 집에 가는 중인 솜뭉치들이 많은가 봐요, 우리 오늘 어땠어요?”
“‘파괴왕 하준’ 누구야, 이상한 소문 내는 거 아니에요.”
하준 형도 합류해서 멤버들과 솜뭉치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파괴왕’이라는 단어에 결국 이성을 놓아버렸다.
낄낄거리며 하준 형에게 손가락질을 하던 찬이는 결국 준이 형의 응징에 짜부라졌고, 세빈이는 혀를 차더니 솜뭉치들을 향해 조곤조곤 말했다.
“여러분, 찬이 형 닮으면 안 돼요, 아셨죠? 정말 결과가 보이는데도 한 치 앞도 못 보고 저런다니까요.”
“우리 세빈이가 이렇게 단호하지 않았는데….”
옆에서 중얼거리는 영빈 형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채팅창에는 단호한 세빈이도 귀엽다는 메시지와 함께 찬이 숨은 쉬고 있냐는 말이 올라왔다.
준이 형 밑에서 캑캑거리던 찬이가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멤버들 누구도 놀라울 만큼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하하,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찬이가 정말 튼튼하거든요.”
“응원법은 언제 그렇게 외웠어요? 우리 솜뭉치들은 다 천잰가 봐!”
“C.I형은 아직도 자기 파트 말고 다른 파트는 가끔 헷갈리는데!”
“내가 언제.”
글씨체를 가다듬는 연습을 하면서 우리 앨범의 가사를 수도 없이 적어야 했기에, 멤버들은 파트를 막론하고 가사를 대부분 외웠다.
경환 형과 찬이만 종종 곡들의 가사를 섞어서 기억하는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아, 편지 다들 봤어요?”
“저희 글자 예뻐졌죠? 으하하! 엄청 연습했지요!”
“곧 공개될 언래블 스토리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음식을 만들어서 나눠 먹었던 화가 방영된 후 앨범을 준비하는 모습과 회의 모습 영상이 짧게 공개되었었다.
회사 분들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 화 정도는 영상을 올리면서 간격을 조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앨범이 공개되는 날, 자정.
우리가 계획한 대로 미리 골라두었던 편지지에 적은 손편지가 공식 카페를 통해 업로드되었다.
평소에는 댓글을 보지 못 하게 하는 편이었지만, 공식 카페에서 우리가 직접 올리는 글에 대해서는 댓글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공카에 더 자주 놀러 갈게요!”
“아, 여러분이 남겨주신 댓글들은 다 보고 있어요. 우리 솜뭉치들 말도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쓰는지.”
흐뭇하게 웃으며 솜뭉치들의 조잘거림을 지켜보던 준이 형이 슬며시 찬이를 놔줬고, 겨우 벗어난 찬이는 한껏 억울하다는 얼굴로 카메라에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아니, 내가 동네북도 아니고! 맨날 멤버들이 저만 괴롭힌다니까요? 네? 아닌데! 내가 먼저 안 괴롭혔는데!”
“이거 봐, 솜뭉치들도 찬이가 먼저 장난친 거 다 알잖아, 으휴.”
“쯧쯧. 그러게 사람이 평소 행실이 이렇게 중요하다니까?”
“와, 솜뭉치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우리는 솜뭉치들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 찬이를 신나게 놀리기 시작했고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치던 찬이를 준이 형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우리 찬이가 처음보다 많이 사람이 됐답니다, 여러분.”
“형이 제일 나빠!”
“사춘기를 겪는 중이라 좀 이상해 보여도 여러분이 이해해 주세요.”
그렇게 질풍노도의 힘찬이가 되었다.
역시 준이 형은 여론전에 강한 것 같았다. 무서운 사람….
잠시 동안 서로에게 질문과 대답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우리는 슬슬 방송을 끊으라는 석환 형의 손짓에 아쉬움을 삼켰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여러분, 기다려 줘서 너무 고맙고, 늘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 저희가 더 잘할게요!”
“앗, 마무리 멘트는 아니었는데 오늘은 이만 가야 하기는 해요.”
“우리 솜뭉치들은 눈치가 아주 보통이 아니라니까.”
세빈이가 아기 새처럼 작은 입으로 열심히 마음을 전하자 채팅창에는 이제 가냐며 가지 말라는 울음이 잔뜩 올라왔다.
아주 귀신들이야,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울지 말고, 뚝! 활동은 이제 시작이니까 앞으로 더 자주 많이 볼 거예요. 이번에는 더 자주 만날 수 있으니까 기대해 줘요.”
“하하, 정확한 일정은 공식 홈에 올라올 테니까 참고해 줘요! 우리 이번에도 스포하고 하면 혼나요.”
은근슬쩍 무슨 일정이 있는지 물어오는 솜뭉치들에게 홀릴 뻔한 입을 잘 틀어막은 우리는 이제는 거의 공식 인사처럼 된 손가락 하트를 마지막으로 영상을 마무리 지었다.
방송이 잘 꺼졌는지 확인한 우리는 계속 뭉쳐있느라 뻐근한 팔다리를 주물렀다.
GIVE 앱은 다 좋은데 한 화면에 모두 담기가 너무 힘들었다.
“팬싸 일정은 언제 올라가요? 나 오늘 말할 뻔했어….”
“으이구, 스포 하지 않게 늘 조심하고. 공방 일정이랑 팬싸 일정 같이 올린댔어.”
“으아, 그럼 일단 오늘은 끝났으니까 집에 가도 되져?”
세빈이가 침울하게 중얼거리자 석환 형이 그런 세빈이 어깨를 토닥거려주었고, 멤버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다시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흐물흐물해진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평소와 같았다.
씻고 잠깐 졸음이 가신 틈에 거실 바닥에 들러붙어 오늘 하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포근한 시간.
“이번에 우리 좀 산만했지?”
“자연스러운 게 좋긴 한데 가끔 두서없긴 하죠.”
어제의 컴백 쇼케이스, 오늘 인터뷰와 라디오를 되새겨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말하는 순서를 정해놓는 건 너무 틀에 박힌 모습이라 뻔해 보일 거야.”
“조금 더 실전이 필요한 거죠, 뭐. 우리 아직 반년도 안됐잖아요.”
반년은 무슨, 6월 10일에 데뷔하고 이제 8월이 끝나간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이렇게도 많았는지.
다들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피식거리며 자세를 편하게 잡았다.
언제나처럼 벽에 기댄 준이 형과 영빈 형, 영빈 형 다리를 베고 누운 세빈이, 애착 인형이라도 되는지 쿠션을 끌어다 깔고 누운 경환 형, 내 배 위에 다리를 올렸다가 걷어차인 찬이.
“글씨 연습을 다 같이 한 건 잘한 것 같아요. 글씨도 더 정갈해졌고,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게 눈으로 보이는 거라.”
“앞으로 다 같이 무언가 배울 수 있는 게 있으면 틈틈이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번 안무는 실수가 없어서 좋긴 했는데 세빈이 가사 틀렸던 거 알지?”
“넵. 다시 잘 외웠어요.”
“찬이는 발음 절지 말고 똑바로 하고.”
준이 형은 언제나 한 걸음 앞에서 멤버들의 실수를 파악하고 고칠 점을 알려준다.
“환이 지르는 파트에서 자꾸 힘이 떨어지는 것 같아.”
“아, 형이랑 같이 듀엣으로 지르는 파트 말하는 거죠? 끙…. 더 연습할게요.”
“찬이는 목소리에 특색이 있으니까 음이 틀리면 바로 티 나, 그거 조심하고.”
영빈 형은 팀 내의 보컬이 흔들리지 않게 세심하게 듣고 이야기해줬다.
찬이랑 세빈이는 어떤 동작을 어떻게 내질러야 효율적이고 더 각 잡힌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 멤버들의 춤을 보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알려준다.
각자 다른 멤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부분이 있다면, 그 파트를 중점적으로 서로의 단점을 무마할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법을 찾았다.
트레이너 선생님들이 알려주는 것들뿐만 아니라 늘 멤버들과 그날그날을 복기하며 나누는 이런 대화들이 우리에게는 꽤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한바탕 이틀간의 일정에 대한 피드백이 오고 가고, 조금 더 늘어지는 시간이 되자 영빈 형이 물었다.
“아까 인터뷰는 어땠어?”
“아, 작곡에 참여한 사람들이랑 인터뷰하고 싶다고 부른 거더라고. 진위 여부 파악하려는 거였는지 조금 날카로운 질문도 많더라.”
“아니, 왜 사람들은 말을 해도 안 믿지?”
실제로 인터뷰 내용에는 어떤 사운드를 어디에 넣었던 의도가 무엇인지, 어떤 효과를 넣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등 꽤 자세한 내용들을 물었다.
각자 맡았던 곡에 대한 질문이기에 막힘없이 대답했고.
찬이가 조금 못마땅한 듯 중얼거리길래 껄렁하게 흔들거리는 두 다리를 툭툭 쳐주고 웃었다.
“차라리 그렇게 인터뷰가 나가면 우리한테 이득이지 뭐. 뒷말은 더 안 할 거 아냐.”
“너희는 팀장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아, 아까 그거.”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찬이가 끙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 프로 하나에서 우리 셋을 대상으로 섭외가 들어왔다는데 애매하다고 해서.”
“어떤 건데?”
언래블 전체에 대한 출연 요청이 있는가 하면, 특정 인원을 지정해서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고, 인원수를 제한해서 출연 요청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왕이면 전체 인원이 모두 출연하면 좋을 테지만, 우리가 아직 편하게 골라 받을 입장은 아니었기에 회사에서 제의하는 곳은 다 나갔다.
망둥이와 개미핥기 탓에 많은 시간을 날려 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무사이’와 ‘미궁 탈출’에서의 활약이 나쁘지 않았던지 괜찮은 제의가 여럿 들어왔다고, 팀장님과 매니저 형들이 기쁜 얼굴로 말하기도 했었다.
“그, 요리를 배우는 프론데 2회 정도 분량이고 예능이 반 이상이라고 하셨어.”
“영빈 형이랑 우리 둘을 부른 걸 보면 우리가 망치고 영빈 형이 수습하는 그림을 원하시는 것 같다고.”
“아아….”
찬이랑 세빈이는 칼을 쥐여주면 안 되는 타입들이었다.
처음 세빈이가 칼등으로 양파를 내리치던 모습은 나한테도 꽤 신선한 충격이었으니까.
냄비 밥 한다고 냄비 태워 먹은 찬이는 두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감자 껍질은 잘 벗기니까 하고 찬이를 위한 변명을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그래. 생각하지 말자. 그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난 재밌을 것 같은데? 괜찮을 것 같아.”
“아마 현장 스태프분들이 잘 챙겨주실 테니까 다치진 않겠죠.”
“팀장님은 우리끼리 분량을 잘 챙길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것 같았어.”
찬이는 긍정적인 모습이었고, 영빈 형은 평소처럼 오만 걱정을 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엄청난 요리를 해낼 수는 없을 테니까 확실하게 웃기게라도 만들어야지 싶어요. 이도 저도 아니면 다시 안 불러줄 테니까.”
“뭐라도 나가서 많이 얼굴 비추는 게 우리한텐 최고지. 한다고는 말씀드렸는데 걱정하시더라.”
팀장님의 걱정도 이해는 갔다.
프로그램 자체는 좋은 것 같은데 PD가 멤버들을 버리는 패로 써버리면 이미지만 깎아 먹고 앞으로 다른 프로그램 출연에도 지장이 생긴다.
아이돌인 이상 그룹의 이미지를 너무 깎아 먹는 방송은 계륵이니까.
그렇다고 우리 애들이 예능에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고민이 깊었을 거라 추측되었다.
그 뒤로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가고, 약간의 응징과 쿠션이 잠시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짧은 수면 시간 후 학교를 다녀온 우리는 대인원이 사용하는 회의실로 끌려왔다.
“와… 이게 다 뭐예요?”
“뭐긴, 너희가 입어야 할 의상이지.”
비몽사몽 한 얼굴로 들어선 우리를 반긴 건 여러 대의 행거에 가득 걸린 옷의 산이었다.
무대 의상도 아니고, 이게 다 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