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사랑하게 될 거야(1)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언래블과 매니저의 모습이 서글서글했다. 언래블은 인터뷰 내내 적극적으로 대답했고, 행동으로도 신남을 잘 표현했다.
꽤 활달한 성격의 아이들인 것 같은데, 자기들끼리 무언가 속닥거리며 웃는 게 뭐든 즐거운 나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아이들이 최근에 어떤 일들을 겪었었는지.
인터뷰 내내 멤버들이 최대한 서로의 분량을 채워주려 해, 그 모습이 기특해서 조금 웃었다.
신인답다는 생각과 함께 정윤 언니가 말했던 내용들이 떠올라서였다.
한시도 가만 있지 않는 장난꾸러기들, 서로의 껌딱지 같은 애들.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던 게 떠올랐다.
‘아, 그 일.’
준비해온 인터뷰 내용에는 빼두었던 터라 잠시 잊고 있었던 사건들이 떠올라, 문득 이 아이들의 속이 궁금해졌다.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어차피 더 지독한 외부의 시선을 이겨내야 할 테니 언질 정도는 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덮어버렸다.
모든 인터뷰가 끝나고 어느새 친해진 포토그래퍼와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속으로 쓴 물이 조금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 언니. 나야. 애들 지금 간다. 아냐, 좋게 잘했다니까?”
휴대폰 너머로 잔소리를 하는 목소리에 시큰둥하니 대답하던 이서랑은 결국 한마디 톡 쏘아붙였다.
“그러게 언니가 미리 정보 좀 줬으면 내가 잘 실드쳤잖아.”
정윤이 온갖 악재가 낀 듯한 상황에 골머리를 썩다가 결국 기자들에게 손을 벌린 것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자신에게 이야기했으면 더 크게 만들어서 아예 뒤엎을 수 있었는데 잡지에서 다룰 일이 아니라며 대차게 까였던 게 생각났다.
여러 계산 끝에 움직인 것이라는 걸 알았어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알았어, 나중에 만나서 얘기해. 언니 애들 관련해서 할 얘기도 있고. 응.”
이러니저러니 해도 꽤 신세 진 게 많은 사람이니 은혜도 갚을 겸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 정도는 전해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서랑 씨, 저희도 얼른 철수하죠. 비 올 것 같은데.”
“네, 오늘 고생하셨어요.”
어둑해진 하늘이 역시 못마땅했다.
* * *
아침부터 이상한 꿈을 꾼 탓인지 갑자기 바뀐 날씨 탓인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저 오늘 인터뷰한 내용이 문제없이 잘 나오길 바라면서 힘찬이와 세빈이를 뒤에서 껴안았다.
모처럼 분위기 괜찮은 곳에 와서인지, 아니면 외부에 나왔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까의 모습은 금세 사라지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 둘은 사방을 폴짝거리며 돌아다니더니 기어코 준이 형에게 뒷덜미가 잡혀서 다시 자리로 막 끌려온 참이었다.
“니들은 준이 형 아니었으면 어쩔뻔했냐.”
“우리가 왜!”
“덜렁거리고 촐랑거리고 그러다 어디 한군데 안 부러지면 다행이지.”
“웬일로 지환이가 형의 고뇌를 알아주는구나.”
애들을 쫓아다니면서 챙겨오느라 지친 얼굴이 된 준이 형이 한마디를 보탰고, 우리 사고뭉치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볼이 퉁퉁한 것이 불만이 가득 찬 것 같았지만, 여기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니 입을 조심하는 모습에 얘도 이제 아이돌 다 됐구나 싶어서 웃었다.
잡지사 측의 사람들과 좋은 말로 인사를 마친 우리는 빠르게 이동해야 했다. 더 바빠도 좋으니 스케줄이 많았으면 싶었다.
멤버들도 나도 스케줄이 잡혀있다는 것 자체로도 행복했다.
“얘들아, 가자. 오늘 점심 팀장님이 쏜대.”
“오! 오늘 점심이랑 미룬 회식은 별개인 거 아시죠?”
“그럼. 이건 팀장님이 쏘는 거고 그건 대표님이 쏘는 건데 확실히 다르지.”
맛있는 거 먹자는 말에 신난 멤버들은 금방 우진 형을 쫓아 차에 올라탔고, 올 때보다 더 빠르게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회사에 도착한 나는 눈앞에 차려진 거대한 탕수육 접시에 할 말을 잃었고, 웃느라 숨도 안 쉬는 것 같은 멤버들에게 음식을 집어 던지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하지만 나를 가장 슬프게 만든 건 탕수육이 너무 맛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를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나를 농락한 탕수육에 진 기분이었다.
우울한 마음을 홀로 쓸쓸히 달래고 있을 때, 곁에 다가온 세빈이가 레몬 사탕을 내밀었다.
“형, 이거 먹고 힘내요.”
“역시 우리 세빈이….”
“오늘 할 일 많은데 당 떨어지면 안 되죠.”
“맞아, 너 할 일 많아.”
우울해 죽더라도 일하다 죽으라는 걸까?
점점 내 머릿속 언래블과 멀어져 가는 멤버들 모습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민하며 흔들리는 덕심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맛있는 탕수육을 평소보다 더 꼭꼭 씹어먹은 나와 날 놀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이는 멤버들의 모습을 보며 우진 형은 오늘도 웃었다.
우리가 사이좋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네? 뭐라고요?
준이 형과 경환 형, 그리고 내가 에단 쌤과 함께 다른 인터뷰를 위해 이동하는 사이, 영빈 형과 찬이, 세빈이는 회사에서 팀장님과 회의할 게 있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조금 궁금했지만, 최대한 열심히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하고 나를 다독이며 성실히 인터뷰를 끝냈다.
인터뷰 영상을 찍기에 당황했는데, 위캠에 인터뷰 비하인드 영상을 올리는데 최근에는 이런 영상이 생각보다 반응이 좋다는 말도 해주셨다.
어차피 인터뷰 때 질문은 다 비슷할 테니, 그 외에 소소한 대화 모습 같은 것들이 올라오면 팬들이 좋아한다고.
작곡 당시의 상황이나 곡의 정체성, 언래블이라는 그룹이 안고 가고 싶은 그룹의 특색 등 꽤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 후라 우리는 한결 좋아진 기분으로 회사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는 오늘의 마지막 일정을 위해 이동할 차례였다.
“요, 병아리들 오랜만.”
“겸이 형 오랜만이요!”
“오랜만에 봬요. 잘 지내시죠?”
“야, 너희는 어떻게 된 게 한 번을 안 놀러 오냐.”
“메시지 자주 보냈잖아요.”
하준 형이 라디오를 고정으로 함께 하다 보니 하겸 형과도 자연스럽게 자주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다.
“우리 애들이랑도 한번 만나서 놀자. 형이 밥 산다.”
“진짜죠? 아싸, 단우 형한테 말해야지.”
“야! 단우한테는 말하지 마!”
찬이가 신나서 골든 아워의 또다른 멤버 이름을 언급하자 하겸 형이 질색하는 얼굴로 찬이에게 응징을 가했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준이 형과 함께 나가 PD님과 작가분들, 스태프분들께 인사를 드리며 준비해온 커피를 나눠드렸다.
첫 출연했던 라디오이자 처음으로 사고를 쳤던 곳이라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땜빵이 아니라 정식으로 제의받고 온 만큼 기분이 남달랐다.
이슈가 있었던 탓일까?
컴백 소식에 꽤 많은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고 했다.
아무리 이슈를 먹고 사는 게 연예인이라지만, 그런 모습에 괜히 부아가 치밀고 두통이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이것들까지도 모두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사건을 꾸며내는 게 일상인 세상에 한발 걸치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내 모습 아닌가.
그나마 평소에도 늘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하겸 형의 라디오라서 우리 애들도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쭌디, 동생 괴롭히지 말고!”
“누나! 누나는 내 편을 들어야지!”
“언래블 착한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쭌디가 또 괜히 동생 잡는 거지 뭐.”
넉살 좋게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는 작가분의 모습에 옆에 있던 경환이 내게 속삭였다.
쓸데없는 상념을 몰아내고 경환 형의 말에 맞장구쳤다.
“형님이 힘찬이 더 괴롭혀줬으면 좋겠다.”
“나도요. 쟤는 좀 고삐를 쥘 필요가 있어.”
잠깐의 투닥거림 끝에 오늘 공개 방송으로 진행될 보이는 라디오의 세트장으로 향했다.
부스 밖 빼곡하게 앉아있는 우리 팬들 모습에 괜스레 쑥스러워져서 유리 벽에 달려가 손을 흔드는 멤버들 뒤에 섰다.
몇몇은 이번 앨범을 들고 우리를 향해 흔들기도 했다.
유리 벽 너머로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팬들과 이야기하는 경환 형의 모습에, 이전에 깜짝 출연했던 졸업식 무대 당시가 떠올랐다.
나는 문명인답게 어플을 실행시킨 뒤,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핸드폰을 돌려 팬들에게 손쉽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야, 그렇게 좋은 게 있으면 우리한테도 알려줘야지!”
“저번에 내가 쓴 거 봤을 거 아니에요. 그때 물어봤어야지.”
“깜박했지!”
“형, 점점 찬이 닮아가나 봐. 큰일이네.”
찬이 닮아가냐는 말에 평소처럼 나를 짤짤하려던 경환 형은 내 손가락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무리 경환 형이라도 솜뭉치들 앞에서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아오, 너 진짜 숙소 가서 두고 봐.”
“왜요? 뭔데?”
뒤늦게 하겸 형에게서 탈출한 찬이가 팬들에게 손을 흔들며 우리에게 질문했고, 나는 선선히 대답해 줬다.
“내가 경환 형한테 너 닮아간다고 했더니, 형이 화내더라.”
“헐! 나 닮은 거면 좋은 거지!”
“무슨 미친 소리야?”
“솜뭉치들 앞에서 나한테 지금 욕한 거야?”
“솜뭉치들한테 안 들려, 바보야!”
싸움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지라는 생각에 대화의 주제를 살짝 옆으로 토스했을 뿐이다.
둘이 투닥거리기 시작한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하겸 형과 영빈 형이 기막히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아냐, 넌 그냥. 어, 적으로 돌리면 피곤하겠다 싶어서.”
“에이, 제가 뭘요.”
“하하, 이 무서운 놈.”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던 하겸 형이 자리에 가서 앉자, 우리도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저번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오는 내내 차 안에서 우진 형이 주의를 줬지만, 서로 행동이 커지지 않을 뿐 입으로 떠드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방송 시작을 알리는 불이 들어오자 곧바로 분위기가 진정되었고, 하겸 형의 목소리와 함께 방송이 시작됐다.
“화병이라는 게 우리나라의 문화연계 증후군이라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어요. 문화연계 증후군이라는 게 특정 문화 속에서만 발견되는 질환이나 증상을 뜻한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구요. 질환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건 꽤 신기한 일이었는데요.”
잔잔하고 차분한 하겸 형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평소와 다른, 푸른 음악 노트의 쭌디가 된 하겸 형의 모습은 늘 새롭고 설명하기 힘든 감동이었다.
이게 프로구나 하는 그런 느낌.
새벽 형들이 보여주는 음악인으로서의 모습과는 다른, 방송인으로서의 이런 모습은 늘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화를 내기보다 참고 인내하라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라왔어요. 아마도 우리보다 더 윗대의 어른들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겠죠. 그러다 보니 표현하기보다 감추고 억누르는 게 익숙해져, 한국 사람들은 불덩이 같은 화를 가슴속에 담고 살아가게 된 것 같아요.
적어도 우리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화가 잠들길 바라면서, 오늘의 푸른 음악 노트 시작합니다.”
인사 후 흘러나온 노래는 ‘폭풍전야’였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안 대본을 다시 한번 점검하던 나는 오픈 스튜디오 밖에서 응원법을 따라 하는 솜뭉치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젯밤에 공식 카페에 글이 올라왔을 텐데 벌써 응원법이랑 가사를 다 외운 건가 싶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감정을 서로 공유하는 게 이제는 기껍고 행복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 나 이제 정말 아이돌이구나.
왠지 포잉이 이제 알았냐며 어디선가 비웃고 있을 것 같아서 솜뭉치들을 바라보며 조금 바보같이 웃어버렸다.
“푸른 음악 노트와 이미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들이죠, 그중에서도 한 분은 여러분들에게도 익숙한 사람들이고요.”
하겸 형, 아니, 쭌디의 목소리에 따라 실시간 라이브 채팅창에도 우리 이름이 올라오고 있었다.
“화내는 법도 잊어버린 우리를 대신해서 이렇게 다 부숴버리라고 직접 노래를 들고 나왔습니다, 언래블, 어서 오세요!”
격한 안내 문구에 이미 웃음이 터진 준이 형이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평소처럼 외쳤다.
“둘, 셋! 화내는 법을 알려주는 언래블입니다!”
“언래블입니다! 여러분 오랜만이에요!”
중간 멘트야 준이 형이 그때그때 외치는 편인데 오늘은 쭌디의 소개가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진 형의 얼굴에는 ‘얘들아, 제발 얌전히’라는 문구가 떠오르는 것 같았고, 그 모습에 되려 작가님이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오늘 라디오는 여러모로 재밌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