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청춘이 아파(4)
우리는 늘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가령 찬이나 세빈이는 춤이 부족한 나와 영빈 형을 전담 마크해서 안무를 완성해나갔고, 영빈 형과 나는 둘의 보컬 레슨을 도왔다.
각자 정해진 레슨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틈나는 대로 ‘조금만 더’라며 시간을 쪼개서 썼다.
포잉의 힘을 빌려 멤버들 몰래 자는 시간을 줄이며 곡을 쓰고 연습을 했다. 2집 앨범을 준비하는 내내 평균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옆에 침대는 종종 나보다 더 일찍부터 싸늘하게 비어있었다.
맏형들의 책임감은 언제나 무거웠는지, 늘 우리보다 한두 시간이라도 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경환 형은 자신이 팀에서 가장 부족하다며 항상 마지막까지 남은 덕분에 연습실 불을 끄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최선을 다했다고 만족스럽게 말할 수는 없지만, 죽기 살기로 덤볐다.
열정이 지나쳐 의견을 나누다 과열돼서 말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그런 멤버들이 나를 버렸다.
“나랑 안무 맞추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
상처받은 얼굴로 멤버들을 바라보며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되물었지만, 세빈이만 움찔했고 찬이는 코웃음을 쳤다.
“여러분, 속으면 안 돼요. 환이 쟤가 저 얼굴로 얼마나 나를 많이 농락했는데.”
“오, 우리 찬이 이제 농락이라는 말도 알아?”
“아오, 내가 진짜!”
“와, 나 또 속을 뻔했어.”
“저게 사기지, 다른 게 사기냐.”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말했다.
“왜요, 뭐. 무대 멋있게 하고 싶어서 열심히 한 것뿐인데.”
채팅창에는 무수한 물음표가 올라오더니, 중간중간 내가 지금 뭘 본거지? 하는 내용도 있었다.
“환이가 이번 안무에 좀, 음. 네. 열심히 했죠. 하하. 환아, 형은 더 포장 못 하겠다.”
준이 형도 포기를 선언했고, 결국 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이게 다 짝꿍 역할을 했던 멤버들이 절 모함한 결과에요.”
내가 어떻게 안무 연습을 했는지, 짝꿍 멤버와 찬이, 세빈이를 붙잡고 어떻게 맞춰보고 조언을 구했는지, 나는 솜뭉치들을 향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냥 좀 세세하게 나눠서 질문하며 도와달라고 닦달한 것뿐인걸.
“그만큼 합도 좋아졌고, 저도 최대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도와줬는데… 유독 저랑 연습하면 지친다고 하더라고요.”
내 대답에 채팅창에는 탄식과 여러 의견들이 주르륵 올라왔다.
“자자, 환이한테 탈탈 털린 거 말고 다른 에피소드 있는 사람?”
“아! 근데 이거 말해도 되나?”
“뭔데?”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던 경환 형은 스태프분들 너머에 있는 팀장님과 매니저 형의 눈치를 보더니 준이 형한테 ‘편의점’하고 속삭였다.
“이건 힘들었다고 보기에는 좀 그렇지 않아?”
“거기까지 가기 전이 얼마나 험난했는데.”
“그건 그렇지.”
무언가 둘이 수군거리더니 경환 형이 마이크를 들었다.
“그, 매니저님, 팀장님… 화내지 않기!”
공개적인 자리에서 두 분에게 공을 넘긴 경환 형의 선택은 탁월했다.
카메라가 쓱 자신들 쪽으로 돌아오는 기색을 느낀 팀장님이 우진 형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팀장님이 오늘 방송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따로 응징하지 않겠다고 하시네요.”
“우와! 감사합니다!”
허락과 함께 이어진, 경환 형과 준이 형의 컵라면을 향한 험난한 여정은 정말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슬픈 이야기였다.
한참 곡 만든다고 다들 날카로워져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곡 작업 중 갑자기 칼칼한 라면이 너무 먹고 싶었던 경환 형은 장장 세 시간 동안 고민하다 결국 아무도 모르게 편의점으로 탈출했다.
그동안 더 굶주렸던 경환 형은 온갖 먹을 것들의 향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결국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골라 계산대에 내밀었다.
하지만 급하게 도망 나오다 보니 지갑은 물론 카드 한장 챙기지 않은 채 휴대폰만 덜렁 들고 나가버렸고, 형이 당황해서 주머니를 뒤지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피로회복제를 사러 나온 하준 형이었으며, 하준 형은 컵라면을 든 경환 형을 편의점 구석으로 끌고 가 한참을 잔소리했다고 했다.
“멤버들은 알 거예요. 준이 형이 얼마나 우리를 달달 볶는지.”
경환 형의 한 맺힌 목소리에 멤버들 모두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찬이가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됐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그냥 끌려서 돌아왔어?”
“아니. 그랬으면 그냥 평소 일과지.”
“그건 그렇져.”
경환 형은 기어코 준이 형을 꼬셔서 편의점에서 먹방을 찍고 오셨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타이밍 좋게 편의점에 들어온 학생들의 컵라면 냄새가 준이 형을 무너트렸고, 둘이 편의점 떡볶이에 컵라면, 삼각김밥까지 먹어치웠다고.
바로 들어가면 음식 냄새가 날까 봐 일부러 밖에서 냄새까지 빼고 작업실로 복귀했다고 말하는 저 사람이 내가 아는 경환 형이 맞나 싶었다.
“…와, 이건 진짜 배신이다.”
“우리가 라면 먹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 부를 때는 무시해놓고!”
가장 믿었던 리더 형의 기만에 동생 라인은 분노했다.
실제로 찬이가 숙소에서 라면 먹고 싶다고 준이 형에게 말했다가 ‘안돼, 돌아가.’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멤버들끼리 말다툼을 했던 일, 영빈 형이 눈물을 보였던 일까지, 새 앨범 작업 중 있었던 여러 일들을 솜뭉치들과 나누었다.
거기에 더해 찬이와 세빈이가 나서서 포인트 안무를 솜뭉치들에게 알려주는 시간을 가졌는데, 찬이가 포인트 안무라면서 들고 온 동작에 모두들 기만자라고 외쳤다.
상대방 등을 지지대 삼아 허공에서 한 바퀴 도는 걸 어떻게 해!
그 동작은 솜뭉치들은 물론 찬이랑 세빈이 외의 다른 멤버들도 못하는 동작이었다.
아마, 내가 솜뭉치였고 찬이가 눈앞에 있었으면 멱살 잡지 않았을까?
연습 조금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며, 세빈이가 조용히 웃었다. 준이 형은 옆에 있던 나에게 자신이 저 둘에게 뭐 잘못한 게 있냐고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 후로 이어진 Q&A도 다행히 큰 문제 없이 흘러갔다.
“식단 조절할 때 제일 힘들었던 점이요? 다 힘들죠. 전 먹는 거 엄청 좋아하는데 낙이 사라진 거니까. 그치만 역시 제일 힘들었던 건 허기지는 거였어요.”
“위가 텅텅 빈 것 같은데 몸을 움직이는 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익숙해지질 않아요.”
체중 감량을 위해 늘 해야 하는 식단 조절 질문도 있었고, 가장 힘들었던 점을 하나 고르면 어떤 게 있냐는 질문도 있었다.
“제일 힘들었던 건 역시 노래가 마음처럼 안될 때였던 것 같아요. 특히나 멤버들보다 제가 못한다고 느껴질 때면 잠이 안 와요.”
“전 안무가 너무 힘들었어요. 함께 움직여야 하다 보니 높이나 각도가 안 맞으면 정말 멋없는데 저희가 키 차이도 있고 하니까 그게 참….”
멤버들은 누구 하나 빼지 않고 나서서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을 해나갔다.
질문들은 굉장히 다양했는데, 멤버들 개인에 대한 질문도 있었고, 앨범에 대한 질문들도 꽤 많았다.
“1집부터 2집은 연결되는 이야기예요. 원래 처음 기획 때부터 시리즈로 만들 예정이었거든요. 단지 연달아서 이야기하느냐, 아니면 텀을 두느냐의 차이였어요.”
“앨범이 너무 무거운 곡들로 이루어지면 듣는 사람들한테 피로를 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죠. 그래서 방식을 좀 다르게 해보자고 나온 게 더블 타이틀이었어요.”
“화를 내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도 사람마다 방법이 조금씩 다르잖아요? 그래서 두 타이틀이 같은 주제를 공유해도 다른 느낌을 주도록 노력했어요!”
생각보다 질문의 질도 높았다.
흥미 위주의 질문도 분명 있었고 장난 같은 질문들도 있었지만, 솜뭉치들의 곡 이해도나 추리가 놀라운 경우도 많았다.
뮤직비디오의 어떤 장면에서 어떤 도구가 나왔는데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복선이냐는 질문도 있었고, 1집 ‘I'm OK’의 뮤직비디오와의 관계성 추측을 질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워, 우리 솜뭉치들 진짜 쩐다…. 역시 저희가 더 많이 공부하고 배워야겠어요.”
“뮤직비디오는 방금 처음 공개한 건데 여러분들 언제 그 장면을 다 봤어요?”
곡이 공개되면 뮤직비디오의 해석 영상을 만드는 스트리머들이 있고, 티저가 공개될 때마다 커뮤니티 역시 앨범에 대한 추측으로 불타오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빠르게 모든 걸 파악하고 궁금한 점을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새삼 신기하고 감사했다.
이전 생에서는 나도 그런 분들의 귀하디귀한 글을 영접하고 금손 님들의 팬 무비를 감상하며 감탄했었다. 나는 거기까지가 전부인 평범한 팬이었다.
애들을 찍긴 했지만, 그건 정말 애들 얼굴이 다한 거라 보정 조금이 전부인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역시 그 세상에서의 솜뭉치들이나 지금 이곳의 솜뭉치들이나 엄청나다는 생각에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자, 여러분. 아쉽지만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어요.”
“더 오래 함께하고 싶은데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것 같아요.”
엔딩 멘트로 정해둔 말들이 멤버들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아쉬움이 가득 담긴 메시지들이 채팅창에 올라왔다.
“기다려 줘서 너무 고맙고, 앞으로 방송 활동도 지켜봐 주세요!”
“우리 솜뭉치들이 있어서 저희가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어요. 항상 고마워요.”
그런 팬들을 향해 우리 애들도, 나도 고마움을 가득 담아 애틋한 인사말도 전했다.
그리고 준이 형이 마무리 멘트를 하려던 그 순간 채팅창에는 하나의 메시지로 도배되었다.
[우리는 늘 언래블 곁에 있을 거야. /we are with ‘Unravel’]
마이크를 쥐고 웃으며 멘트를 하려던 준이 형도,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던 멤버들과 나도 모두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순간 우리와 우리 팬들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서로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같은 공간 안에서 서로를 응원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큼, 언제 이런 걸 준비했어요, 진짜 우리 솜뭉치들 못 말린다니까.”
목이 메는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 준이 형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우리도 늘 솜뭉치들 곁에 있을 거예요. 솜뭉치들이 지겹다고 도망가도 안 놔줄 겁니다.”
“어떤 일이 생기든, 그 누가 방해하든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 거 다 이겨내고 우리 귀요미들 옆에 있을 거니까.”
상상해본 적도 없었던 거지 같은 일들이 나와 멤버들 앞을 가로막았었다. 거기다 그 일들이 남긴 피해의 여파는 우리들로 끝나지 않았다.
그저, 우리라는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던 모든 팬들의 가슴에도 큰 상처를 남겨놓았다.
하지만 우리 팬들은 그마저도 이렇게 서로를 더 지지하고 믿을 수 있는 밑거름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떻게 이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단단하고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주는 사람들을.
몇 글자의 단어, 한 소절의 노래, 사소한 토닥거림 한 번이 나와 멤버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바꿔놓고 있었다.
“오늘은 ‘안녕’하고 헤어지지만, 다음에 다시 ‘안녕’하면서 만나요.”
“금방 또 볼 수 있으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말기!”
커다란 세빈이의 눈이 물기로 일렁이던 그 순간,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행복한 얼굴로 인사를 남기고 싶었다.
그 뒤로 이어진 보너스 트랙의 무대도 실수 없이 해냈고, 그렇게 컴백 방송은 큰 사고 없이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멤버들이 숙소까지 돌아오는 과정에 사소한 우여곡절들이 있었지만 크게 문제 될 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타이밍 맞춰 회사에서 배포한 기사들과 낮 시간에 했던 인터뷰가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공개된 뮤직비디오의 뷰도 빠르게 늘고 있다고 했다.
오늘 방송에 대한 간략한 피드백과 내일 일정에 대한 공지, 여러 이야기들을 모두 마치고 회식까지 내일로 미룬 우리는 숙소 거실에 동그랗게 모여앉았다.
긴장이 풀린 탓에 너무 피곤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었다.
“지금부터 배신자의 처벌에 대한 회의를 시작합니다.”
“배신자는 너무 갔지, 그 정도는 아니잖아.”
“죄인들은 입을 다물라!”
어느 때보다 엄숙한 표정을 한 영빈 형이 차가운 얼굴로 준이 형을 바라봤다.
“어떻게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어.”
“미안하다….”
소현 팀장님과 우진 형은 이후 죄를 묻지 않는다고 했다지만, 우리는 동의한 적 없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게 형제라고 했는데, 경환 형이랑 준이 형에게는 우리가 형제가 아닌가 봐.”
“그러네, 둘이서만 형젠가 보네.”
“야, 그게 아니라!”
그날 밤, 한참을 괴롭힘당한 준이 형과 경환 형은 앞으로 절대 멤버들 몰래 맛있는 걸 먹지 않겠다고 각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컴백 1일 차였지만, 여전히 소란스럽고 평화로운 숙소의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