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45)화 (145/456)

145. 청춘이 아파(3)

우리를 비추는 조명 아래 수천 번은 넘게 듣고 부른 것 같은 멜로디가 들려왔다.

대형의 중심에는 경환 형이 서 있었고, 우리는 둘러싸고 있었다.

도입부 안무는 물론 곡이 흐르는 내내 대형을 유지하는 동안 서로 합이 맞지 않으면 보기 흉해지기 때문에, 데뷔 앨범 때보다 더 죽어라 연습을 했다.

난 춤을 추는 감각 같은 건 없었고 그저 입력된 대로 나오는 게 전부인 터라 찬이나 세빈이처럼 감각적으로 출 수는 없었다.

그건 상태창의 숫자가 아무리 올라도 안되는 영역이라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다.

포잉과 열심히 이야기 나누고 찬이와 세빈이에게도 조언을 구한 끝에 나는 FM대로 하는 게 가장 정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제영 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쌤의 조언에 따라 안무와 곡을 완전히 분해해서 동작이 변하는 파트와 동선이 바뀌어야 하는 파트를 모조리 적고 외웠다.

기계 부품처럼 이 멜로디에는 이 동작, 이 위치. 이렇게 하나씩 동작이 흡족할 정도가 되면 다음 음과 다음 동작을.

나는 지나치게 잘 적응한 대한민국의 학생이었다.

주입식 교육에 훌륭하게 적응해버려서 달달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응용력은 개뿔.

오죽하면 포잉이 곡 만들 때의 나와 춤출 때의 나는 다른 놈이라고 했다.

그렇게 분해한 곡과 안무를 통째로 외우고 전체 조립하면서 나랑 합을 맞추는 멤버를 붙잡고 도와달라고 들들 볶았다.

그 결과를 공개하는 오늘이 그래서 유독 더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전주와 함께 경환 형의 주위를 느릿하게 돌던 우리가, 영빈 형이 경환 형의 등 뒤에 도착한 순간 멈췄다.

경환 형은 영빈 형의 손짓에 따라 힘없이 팔을 흔들거렸고, 억지로 웃는 듯한 표정을 허공에 손끝으로 그려냈다.

영빈 형이 손을 털어내고 경환 형의 등을 살짝 밀며 자신의 파트를 마무리했다.

[그려질 얼굴은 네 자화상이 될 테니.]

밀려난 경환 형이 가장 앞에 서서 오른쪽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가슴을 두 번 두드리고 그대로 대각선 아래로 뻗는다.

그리고 우리는 한 걸음 뒤에서 일렬로 서서 같은 동작을 취했다.

한껏 힘이 들어간 동작이라, 코트와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어져 길게 내려오는 상의가 멤버들의 움직임에 따라 펄럭거리고 있었다.

이 부분은 내가 생각해도 멋있는 것 같았다.

내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더 멋있었을 텐데….

경환 형이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옷을 움켜잡았다 놓으며 뒤를 돌면, 세빈이와 내가 마주 보고 서서 서로에게 속삭인다.

[잘 닦인 길 위에 널 세워두고 환히 웃는 저 사람들을 봐.]

제일 뒤로 빠진 경환 형이 대열에 합류하고 나와 세빈이를 둘러싼 멤버들이 쿵 소리가 날 것처럼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후 무릎을 바닥에 댄 상태에서 옆으로 한 바퀴 돌아서 이동했다.

최대한 상대방을 위하는 것처럼 다정히 노래하라고 에단 쌤에게 타박을 들으면서 연습했던 파트였다.

연습 때 멤버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미소가 머금어졌다.

우리 애들이 어찌나 단순하던지.

[널 위한 거란다, 널 위해 준비했단다.]

세빈이와 나를 제외한 멤버들은 이 동작이 너무 어렵다고 제영 쌤을 붙들고 하소연을 했었다.

무릎 다 까지겠다, 관절이 부서지겠다며 칭얼거렸다.

병아리들의 삐약거림이 애처로웠는지 제영 쌤은 무릎 보호대를 사 와서 멤버들에게 나눠주셨다.

어차피 의상도 긴 바지니까 무릎에 끼고 하라고.

[이 말들이 얼마나 허망한지, 넌 이해할 수 있어?]

세빈이의 가사에 한마디가 추가되었지만, 실수는 모른척해 주기로 했다.

무릎을 축으로 뱅글뱅글 도느라 바닥 청소 다 했을 멤버들이 뒤로 크게 물러나고, 그사이 나는 세빈이를 잡아당겼다가 뒤로 툭 밀었다.

멤버들이 미리 비워둔 빈자리에 세빈이 자석이라도 붙여놓은 것처럼 착하고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폭풍전야’는 단체 군무보다 파트를 맡은 사람을 중심으로 춤을 추는 내용이 많았다.

갈등과 부조리를 논하면서 긴장을 고조시키고, 흉흉한 기세를 몰고 다니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몸짓들이었다.

그렇게 카메라 밖의 사람들을 모두 휘어 감을 것처럼 몰아치던 멜로디가 갑자기 풍랑이 끝난 바다처럼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멤버들은 폭풍을 형상화하듯 짙은 남색과 검은색을 써서 만들어진 겉옷을 풀어 무대 밖으로 던졌다.

안쪽에 감춰져 있던 총 천연의 알록달록한 셔츠가 짠하고 모습을 드러내면서, 분위기는 반전되고 멜로디도 덩달아 경쾌해졌다.

빳빳하게 깃을 세워 목을 다 가렸던 의상이 사라졌다. 훤히 드러난 지환과 세빈이 목에는 레이스로 만들어진 초커가 곱게 걸려 있었다.

언제 챙겨서 꼈는지 찬이 손에는 커다란 반지가 몇 개씩 껴있었고, 찬이는 어느샌가 자신을 담당하는 카메라를 향해 윙크를 하는 등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Confusion’, 그러니까 언래블이 만들어낼 난장판이 시작되었다.

경쾌한 멜로디로 시작되는 난장판의 선봉은 나와 영빈 형이었다.

[내가, 우리가 바라던 미래는 이런 게 아니었어,

애쓰는 만큼 움켜쥐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나란히 선 우리의 외침에 다른 멤버들이 호응하듯 노래를 이어갔다.

[어차피 이미 망가졌잖아, 여기서 더 어떻게 해야 해?

알려줘요, 선생님. 우리가 무엇을 더 해야 해요?]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다른 댄서분들이 우르르 몰려와 우리를 둘렀다.

[노력하면 가질 수 있다면서, 내 등을 두드리던 손길을 기억해.

그 손이 가리킨 방향은 절벽 아래였다는 것도 말야.]

위협하듯 다가오는 댄서분들을 막아내듯 우리는 서로의 등을 마주하고 동그랗게 서서 양팔을 들어 밀어내듯 움직였다.

[주어진 모든 걸 했지만, 그곳에는 내가 없었어.

모든 걸 쏟아부어도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어.]

상대를 밀어내듯 거친 움직임으로 사방으로 우리의 영역을 넓혀가던 우리는 양옆에 나란히 선 댄서분들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제는 하준 형과 경환 형의 차례였다.

[그만해, 어차피 그 앞은 절벽,

날개를 빼앗긴 내게 남은 건 추락뿐이야.]

[날아오를 수 없으면, 기어 올라가면 돼,

어차피 한 번 더 떨어지는 것뿐이야.]

[새빨간 꽃잎 위에 떨어진 너를 기억해,

나 대신 먼저 그 길 따라 저 아래로 가버린 너희를 어떻게 잊겠어.]

[A revolution has begun, 바로 지금부터.]

가장 뒤쪽에 있던 둘은 마이크를 움켜쥐고 빠르게 랩을 토해내며 손을 휘둘렀고, 그 손짓에 따라 댄서분들이 휘둘리듯 휘청거리다 하나, 둘,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사이 우리는 무대 가운데 일렬로 대형을 만들어 갔고, 하준 형과 경환 형은 각자 반원을 그리듯 댄서분들을 헤치고 랩이 끝나는 시점에 대열에 합류했다.

지금부터는 다 같이 한 몸처럼 각을 잡는 게 중요했다.

[추락이 아냐, 낙화일 뿐. 그 위에서 지켜봐.

야경을 즐기는 것도 지금뿐이니까.]

[Look at what we are doing from now on.]

다행히 들어 올린 팔의 각도, 발의 보폭도 한 사람처럼 딱 떨어졌고, 그 순간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멤버들 모두 기쁜 얼굴이었다.

[A revolution has begun, 기대되지 않아?]

내 등을 타고 넘어가는 듯 앞으로 뛰어나온 힘찬이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린 후 무대에 우뚝 서서 어깨를 으쓱했다.

반대쪽에선 세빈이가 경환 형의 등을 지지대 삼아 찬이와 같은 안무를 소화해냈다.

처음에는 멤버들이 반대했었다. 이 안무를 소화하다 둘이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하지만 둘은 무대에 임팩트를 주고 싶어 했고, 왁자지껄하게 다 때려 부수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이 안무가 꼭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제영 쌤은 아크로바틱을 가르치는 전문 강사분을 소개해 주었고, 그분의 가르침 하에 둘의 안무는 완성됐다.

[가르침은 이제 됐어, 우리가 알아서 할게.

기대해도 좋아, 견고한 그 성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Are you ready to be surprised?]

[기억해? 대혁명은 언제나 가장 밑에서 시작됐어.]

바쁘게 무대를 뛰어다니던 우리가 마지막 파트에 이르러 다 같이 카메라를 향해 경례를 하는 듯한 모션을 취했다.

그 직후 몸을 빙그르 반 바퀴 돌려 카메라를 등졌고, 현란했던 조명도 모두 꺼졌다.

그 사이 재빨리 의자가 준비되었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급히 대충 땀을 닦아냈다.

다시 조명이 들어왔을 때는 의자 앞에 호흡을 눌러놓은 우리가 환히 웃으며 서 있었다.

“네, 이번 앨범의 타이틀 ‘폭풍전야(暴風前夜)’의 뮤직비디오와 타이틀 두 곡의 무대를 연달아 보여드렸습니다!”

“무대 어땠어요? 마음에 들어요?”

준이 형의 설명과 발랄한 찬이의 질문에 스크린에 비친 솜뭉치들의 채팅이 빠르게 올라갔다.

“저희 숨 좀 돌리라고요? 괜찮은데!”

“아, 마이크 때문에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나 보다. 저희 괜찮아요!”

중간에 손에 쥐는 마이크를 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격렬한 안무를 할 때는 무선 마이크를 찬다.

덕분에 우리 숨소리가 너무 적나라하게 나간 것 같은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던 우리의 시도는 너무 초보적인 부분을 놓친 탓에 틀어졌다.

“저희 애들이 유독 팬분들 앞에만 서면 강한 척을 하려고 해요. 이해해 주세요.”

“아니, 우리만 그래요? 준이 형은 꼭 불리할 때는 빼더라!”

준이 형이 웃으며 수습을 시도했지만 찬이가 리더 몰이를 시전했고, 그 효과는 굉장했다.

“맞아. 제일 체력 달린다고 홍삼 챙겨 먹던 사람이.”

“여러분, 전에 미궁 탈출에서 제가 홍삼을 챙길 수 있었던 건 준이 형을 보고 배운 겁니다.”

“안무 연습할 때 늘 제일 먼저 뻗는 건 맏형들이에요!”

덕분에 얌전히 숨만 쉬고 있던 영빈 형까지 묶여서 짤짤 털리고 있었다.

“얘들아, 솜뭉치들 앞에서 이렇게 하찮은 모습 보일 거니….”

“우리는 원래 솜뭉치들한테는 숨기는 거 없어요!”

당당한 세빈이 외침에 준이 형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채팅창에는 온통 ‘ㅋㅋㅋㅋㅋㅋㅋ’하는 내용과 웃는 이모티콘이 쏟아졌고, 그 모습에 거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경환 형이 있었다.

결국 준이 형이 졌고, 영빈 형은 덩달아 진 게 돼버렸다.

“자자, 그건 이제 넘어가고 다음 순서 좀 진행할게요. 래블이들 이제 앉자.”

한바탕 장난친 덕에 분위기는 더 화기애애해졌고, 덩달아 우리를 찍고 있던 앞에 스태프분들도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느라 힘들어 보였다.

팀장님은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설마, 또 건강 주스 들고 오시는 건 아니겠지…?

준이 형 옆에 앉은 나는 형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눈짓으로 팀장님을 가리켰고, 준이 형은 잠깐 굳었다가 금방 다시 웃는 얼굴로 멤버들을 챙겼다.

“자, 팬분들도 우리 숨 좀 돌리라고 하니까 물 한 모금씩 먹고 계속 진행하죠.”

스태프분들이 무대 앞에 챙겨준 생수를 하나씩 들고 마시면서 정신을 챙겼다.

너무 들떴다가 실수하면 큰일이니까.

“이번 앨범 여로는 더블 타이틀로 준비해서 여러분들에게 선보이게 됐는데요, 저희는 처음 해본 시도였죠. 어땠어요?”

“다른 선배님들이 더블 타이틀로 활동하셨던 모습들이 마냥 멋있었는데 직접 해보니까 어휴,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맞아요. 이번 앨범 주제를 너무 무겁지 않게 풀어내고 싶어서 더블 타이틀을 선택했지만 쉽지 않았죠.”

준이 형과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앨범에 대한 정보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준이 형이 지정한 사람이 하나씩 대답하는 걸로 방향을 잡았던 우리는, 시청자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느낄 방법이 뭐가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다 질문과 대답 형식이 아닌 대화에서 정보를 얻어 가는 방향은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고, 지금에 이르렀다.

“앨범을 준비하면서 여러 에피소드들이 있었죠.”

“진짜 별일이 다 있었어요. 차마 여기서 말할 수 없는 일들도요.”

채팅창에 그 말 할 수 없는 일들이 어떤 거냐는 질문이 우르르 올라왔지만, 말을 꺼낸 찬이는 능청스럽게 웃기만 했다.

“그중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들 한 가지씩만 말해볼까요?”

“어… 저는 환이랑 안무 맞추는 거요.”

“나? 나 왜?”

“어! 나도!”

찬이의 한마디에 갑자기 화살이 나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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