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청춘이 아파(2)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일렁이는 실루엣이 스쳐 지나가고 화면에는 폭풍전야(暴風前夜)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처연한 피아노 반주가 닥쳐올 상황을 미리 애도하듯 가늘게 울기 시작했고, 거친 느낌의 폰트는 느리게 깜박이다 파도 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처연한 느낌의 연주가 희미할 정도로 줄어들자 그 자리에는 내려찍듯 강한 울림과 함께 심장을 긁어내려는 듯 기타가 울었다. 화면은 한참 도망치고 있는 멤버들을 비췄다.
기괴한 모양의 새하얀 가면을 쓴 사람들이 검은 로브를 펄럭이며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손도, 발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자욱해진 안개와, 순식간에 하늘 어두워진 하늘.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 둘씩 찢어진 멤버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하늘에서 그런 멤버들의 모습을 잠시 비추다, 화면은 어느새 서로 손을 꼭 잡고 뛰는 세빈과 영빈의 모습이 나왔다.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선명한 세빈의 얼굴이 영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그 순간 영빈의 시선이 카메라에 꽂혔다.
영빈의 눈동자 안을 모두 파헤치려는 듯 확 좁혀진 화면. 폐허 같은 무너진 건물 더미 사이에 경환이 너덜너덜한 셔츠와 붕대로 몸을 감싸고 서 있었다.
곧이어 들려온 것은 파도를 두드리는 빗방울 같은 영빈의 목소리였다.
[빈틈없이 조각된 육체를 입고 있는 마네킹이야.
자, 펜을 들어 저 가련한 이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렴.]
경환은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그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붕대만 까맣게 말라버린 피에 물들어 애처로웠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듯 좁혀오는 거리에 경환의 손에는 검은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붓이 생겨났다.
천천히 등을 돌리는 경환의 낡은 셔츠 사이는 등 쪽이 절반 이상 뜯겨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피부에는 균열이 가득했다.
[잘 닦인 거울을 줄게, 그려질 얼굴은 네 자화상이 될 테니.]
파우스트에게 속삭인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목소리가 이런 느낌일까?
너무 고운 목소리였지만, 담긴 감정은 절대 선하지 않았다. 경환의 줄이라도 달린 듯 팔을 허공으로 치켜들어 무언가를 그려갔다.
기꺼운 듯 허공에 호선의 입술을 그린 팔이 툭 하고 떨어지면서 쥐고 있던 붓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가여운 한 자루의 붓이 두 동강 난 모습을 클로즈업하던 화면은 온몸을 울리는 베이스 소리와 함께 하준과 경환을 비추었다.
의식이 온전치 않은 듯 창백한 얼굴로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경환의 모습과 그런 경환을 힘겹게 끌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하준의 모습.
그런 모습을 비웃듯 거칠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함께 중성적인 세빈의 목소리가 노래했다.
[잘 닦인 길 위에 널 세워두고 환히 웃는 저 사람들을 봐.]
그 목소리를 받은 건 지환의 목소리였다.
[널 위한 거란다, 널 위해 준비했단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웃음기 가득한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말들이 얼마나 허망한지 이해할 수 있어?]
세빈이 천진하게 되묻는 사이 기어코 경환을 끌고 쏟아지는 비를 피해 동굴로 들어서는 하준의 모습이 화면으로 이어졌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경환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말하고 있었고, 하준의 얼굴엔 갈 곳을 잃은 분노와 무기력에 대한 좌절이 가득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가는 그 길이,
정말 네가 택한 길이었어?]
힘겨운 숨을 토하는 것 같은 첼로의 애잔한 음률을 타고 지환이 물었다.
[잘 생각해봐, 우리는 한 번도 스스로 택할 수 없었어.]
그리고 하준은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힘껏 걷어차며 쏟아지는 비와 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검은 그림자에 대한 분노를 토해냈다.
유달리 새하얀 가면 사이로 언뜻 보인 곱고 붉은 입술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숨을 쉰다고 살아있는 거라면,
나와 우리 ‘해피’의 차이는 뭐야?
무수히 많은 길이 있다던 가르침은 이미 낡아버렸어.
희망도 꿈도 이 길 위에선 아무런 가치가 없는걸.]
하얀 가면의 미소를 뒤로하고 어둑한 모래사장을 향해 달리고 있는 지환의 절박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저 멀리 바다를 향해 손을 허우적대고 있는 지환의 모습 위로 쓸쓸하게 읊조리는 하준의 랩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지환의 시선을 따라 이어진 바다. 작은 배 위에 선 검은 로브의 누군가가 정신을 잃은 힘찬의 팔을 들고 배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안된다는 듯 팔을 허우적거리며 달리던 지환은 무언가에 걸린 듯 모래사장 위를 굴렀고, 새하얀 가면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또다시 웃었다.
그리고 절박한 얼굴을 한 지환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쥐고 있던 힘찬의 손목을 놔버렸다.
풍덩 하는 커다란 소리가 화면을 울리는 순간.
그 장면 위로 분노를 터트리는 듯한 거친 목소리로 경환의 랩이 이어졌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환은 그 배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고 싶었던 일들, 해야만 했던 일들,
가고 싶었던 곳과 가야만 했던 곳,
할 수 있다고, 날 좀 믿어달라고!
늘 돌아온 대답은 ‘What do you know?’]
배와 하얀 가면의 누군가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지만, 지환은 망설이지 않고 힘찬이 떨어진 그 바다에 뛰어들었다.
크게 솟구친 바닷물이 화면을 가리는 사이 힘찬과 영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믿으라는 말 대신 나를 믿어볼 생각은 없었던걸,
너무 늦게 눈치챈 내 다리엔 어느새 족쇄가.]
[말해보기도 전에 포기해 버린 입은 소리를 잃었고,
어느새 쇼윈도에 진열되어 버린 내 모습]
다시 폐허처럼 황폐한 모습의 공간에 먼지바람이 일었고, 그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 철근과 건물이 부서진 잔해가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중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건물의 유리 벽 안에, 지환과 힘찬이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길에 없는 가치와 같잖은 희망은 내버려 둬.]
[널 위한 거야, 널 위해 준비했단다.]
[미안, 내 꿈도 가치도 여기엔 없어]
옷 가게의 진열된 마네킹처럼 서 있던 둘의 눈에선 어느새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고, 하준의 목소리가 그들을 뒤흔들었다.
그 뒤로 이어진 달래는 듯한 지환의 목소리는 하준의 목소리에 잡아먹혀 한순간 흩어지듯 사라졌다.
[할 수 있는 것 대신, 하고 싶은 걸 할게.
아무것도 모르니까 모르는 채로 살게.]
하준의 목소리에 대답하듯 우두커니 생기 없이 있던 둘의 앞에 경환이 나타났다.
여전히 너덜거리는 옷차림 그대로였지만, 손에는 부러진 붓이 쥐어져 있었다.
경환이 부러진 붓을 쥔 손으로 유리 벽을 내리치자 산산조각 나는 유리 벽 사이로 바닷물이 일렁였다.
일렁이던 바닷물은 화면을 뒤덮었고, 파도 거품 사이로 물 밑으로 가라앉던 힘찬과 그런 힘찬의 손을 잡아채는 지환의 모습이 보였다.
[마음껏 비웃어, 괜찮아. 네 생각은 중요치 않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더해져 멤버들 여럿이 함께 노래하고 있었다.
흐릿해지던 화면은 서서히 나뉘더니 6개의 CCTV 화면으로 바뀌었고, 각각의 화면이 각자의 멤버를 보여주고 있었다.
[손가락질해도 괜찮아, 곧 돌려주러 갈 테니까.]
잠든 것처럼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힘찬의 모습과 그런 힘찬을 겨우 잡아채, 팔을 붙들고 물 밖으로 나가려는 지환의 모습.
희미한 손전등에 의지해 등 뒤 세빈이를 보호하며 새까만 숲속의 길을 앞장서는 영빈의 모습.
그런 영빈의 등 뒤에서 시무룩한 얼굴로 뺨에 붙은 반창고를 만지작거리는 세빈이의 표정.
어두운 동굴에 새어 들어온 희미한 빛을 따라가는 굳은 얼굴의 하준과, 정신을 잃은 듯 동굴 벽에 기대 있는 경환의 얼굴까지.
[기대해, 곧 내 길 위에 너도 서게 될 테니까.]
잠시 지지직거리던 화면은 누군가가 커다란 모니터를 지켜보는 화면으로 바뀌었다.
그 모니터에는 멤버들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 * *
“지환아! 그거 말고 이거 하고 가야 돼!”
“아, 맞다! 미안해요, 누나!”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동안 급히 의상을 갈아입고 액세서리를 체크한 우리는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내 귀걸이 어디 갔지!”
“아까 주머니에 넣지 않았어?”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짧은 시간 안에 옷을 갈아입어야 하다 보니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멤버들 각자의 이름이 붙어있는 옷걸이에서 의상을 낚아채듯 꺼내 입어야 했다.
다행히 목걸이만 바꿔 끼면 되는 나는 레이스로 만든 것 같은 초커를 목에 둘렀다.
“우진 형, 이거 좀 잠가줘요, 잘 안 잠겨!”
“야야, 힘주지 마! 뜯어져!”
내 손으로 섬세한 작업은 무리였는지 이미 몇 개의 초커를 찢어먹은 탓에 꼭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만 했다.
준비를 마치고 멤버들을 확인하자 가사를 다시 한번 중얼거리고 있는 찬이와 앞에서 틀린 구절이 없는지 확인해 주는 영빈 형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시간 안에 모두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시간 안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 스타일리스트 누나들을 붙들고 회사에서 따로 연습했던 보람이 있었다.
“언래블, 무대로 이동할게요!”
“넵!”
“가자, 얘들아.”
“형, 무슨 산적 두목 대사 같아요.”
현장 스태프분의 부름에 후다닥 모이는 멤버들을 챙기던 준이 형에게, 경환 형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산적 두목이라니.
저 얼굴로 산적 두목인 게 더 이상한데?
“산적 두목에게 맞으면 적어도 억울하진 않겠구나.”
“아뇨! 엄청 억울할 것 같은데요!”
“이 형은 갑자기 왜 내 역할을 가져가고 그래!”
“가만있는 나는 왜요!”
경환의 장난으로 한결 긴장이 풀린 찬이는 괜히 툴툴거리며 빨리 가라고 세빈이 등을 밀었다. 얌전히 있다가 등 떠밀린 세빈이의 항의는 안타깝지만… 저 상황에는 끼어들지 않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
이 모든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멤버들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진 형이 다 이해한다는 듯 웃고 있었지만, 못 본 척했다.
팀장님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길래 속으로 중얼거렸다.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하하.
푹신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던 오프닝 세트장 바로 옆에 우리가 오늘 처음으로 ‘폭풍전야’와 ‘Confusion’의 안무를 선보일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거라던데 무대가 바로 옆이라서 이동하긴 편했다.
당장 이 잠깐의 이동이나 탈의에도 이 난장판인데, 나중에 정말 콘서트를 하면 그때는 더 난리가 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나 좀 많이 컸네, 콘서트라는 걸 생각하다니.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고 무대에 올라온 우리는 각자의 위치와 인이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서로 마주한 시선 사이로 보인 우리 애들 얼굴에 희미한 긴장과 흥분이 엿보였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뛰고 있었다.
이제는 이런 무대와 함께 서 있는 멤버들이 낯설지 않았다.
빨간 불이 깜박이는 카메라가 이제는 익숙해서 반갑기까지 했다.
관객은 모니터와 핸드폰 화면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수많은 솜뭉치들이었다.
“너희는 잘할 거야. 멋있게 하고 오자.”
“당연하죠. 오늘 안무 실수하는 사람이 간식 쏘기.”
“먹을 수 없는데 쏘면 뭐 하냐.”
“어허, 당연히 우리 리더님이 허락받아다 주겠지.”
둥글게 서서 대형을 유지하고 서 있던 우리는 이 최후의 순간까지 소곤거렸다.
과연 우리 애들 답다고 해야 할지, 정신 차리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웃어버렸다.
“30초 전!”
뮤비가 끝나고 곧 화면이 넘어올 타이밍이 되었다는 신호였다.
카운트 다운과 함께, 미리 체크해두었던 메시지들이 인이어를 통해 흘러나왔다.
‘전주, 영빈 형 파트 1, 2, 3.’
새까만 무대 위에 드디어 조명이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