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청춘이 아파(1)
리허설을 통해 대본을 확인하고 동선이나 시간까지 모두 고려하고 본 방송을 위해 다시 한번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순서를 확인했다.
그렇게 폭풍 같은 준비 시간이 흐르고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아 멤버들을 살펴보다 웃어버렸다.
편안한 거실 같은 느낌으로 준비된 세트장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우리 애들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돈을 많이 벌어서 마음대로 굴러다닐 수 있는, 거실이 큰 집을 사고 싶어졌다.
푹신한 러그를 만지며 해맑게 웃는 세빈이 얼굴이 행복해 보여서 컴백 생방송의 긴장이 좀 풀린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막둥이 얼굴이 훤하네. 이제 좀 괜찮아?”
“하하, 네? 어떻게든 되겠죠.”
“뭐야, 얘 왜 아까보다 더 이상해졌어!”
데뷔 무대 때는 어어? 하는 사이에 무대에 올라와 있었다면, 이번에는 죽어라 달리다 보니 결승선을 지나버린 기분이었다.
“자, 정신 차리고 순서 한 명씩 말해봐.”
“인사하고, 앨범 소개하고!
“뮤비 나가는 동안 의상 갈아입고, 무대 해요!”
“에피소드랑 포인트 안무 솜뭉치들한테 알려주고….”
“Q&A 하고 보너스 트랙 곡 무대를 마지막으로 끝.”
“다행히 전부 외웠구나.”
준이 형이 숙소 거실도 아닌데 세트장의 러그에 들러붙으려고 하는 멤버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준이 형이 보기에도 멤버들이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나 보다.
다행히 주입식 교육이 통했는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순서를 차근차근 잘 설명했고, 영빈 형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인터뷰 때처럼 실수해도 정신 차린 누구라도 수습할 테니까 너무 당황하지 말고.”
사실 멤버들이 이렇게 넋을 빼고 있는 건, 리허설 후 가졌던 인터뷰 당시 긴장한 경환 형의 말실수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문답은 주로 준이 형이 하고 영빈 형과 내가 서포트 하고 있었다.
한데 그중에 한 분이 이번에 앨범에 멤버들의 곡이 몇 곡이나 들어갔는지를 물어왔다.
준이 형은 작곡을 하는 세 명의 곡이 모두 들어갔고 다른 멤버들도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잘 이야기를 했고.
그렇게 넘어가나 했는데 각 멤버 별로 각자 곡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줄 수 있냐는 질문이 연달아 들어왔고, 경환 형은 예상 질문에 있던 대답을 떠올리다 곡 제목을 잘못 말해버렸다.
“자기가 만든 곡명을 잘못 말하는 놈은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거야….”
“아냐, 긴장해서 그런 거잖아. 기자님들도 다 웃고 넘어갔으니까 괜찮을 거야.”
“‘달려가 줘’가 뭐냐, 하. 진짜.”
원제목은 ‘데려가 줘’였다.
심지어 당사자는 말하고 곡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에도 어색한 부분을 느끼지 못했고, 준이 형이 경환 형의 멘트 후 조심스럽게 곡명을 정정할 때 알았다.
그때 우리 경환 형 얼굴이 참.
“괜찮아. 이제 진짜 본방 때만 조심하자.”
“네엥….”
“얍.”
근심 걱정이 얼굴에 한가득한 찬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느적거리며 대답해서, 내가 옆구리를 쿡 찔러주며 큰 소리로 대꾸했다.
평소에 일에 있어서는 좀처럼 실수하지 않는 경환 형이 실수하자,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찬이나 세빈이는 더 불안한 것 같았다.
“솜뭉치들이랑 신나게 논다고 생각하자. 잘할 거야.”
“언래블, 대기할게요!”
“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장에서 바쁘게 오가던 스태프분들이 우리에게 준비할 것을 요청했다.
이제 정말 시작해야 했다.
카메라의 붉은 불빛과 사방에 함께하는 조명,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모습과 흘러가는 시간이 비치는 스크린이 한쪽에 자리했다.
세트장의 한 가운데에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파스텔 톤의 셔츠와 청바지를 맞춰 입은 우리가 서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숫자가 19:59:58에서 59로 넘어갔고, 20:00:00에 다다랐다.
언제나와 같이 시작은 하준 형이었다.
“둘, 셋!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수백, 수천 번을 이 인사 타이밍 맞추는 데 쏟아부었다고 하면 솜뭉치들은 믿을까?
언제 떨었냐는 듯 화사하게 웃는 우리 애들 모습이 화면에 보였고, 그 가운데 내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솜뭉치들, 잘 지냈어요? 드디어 오늘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저희 많이 보고 싶었어요? 저는 솜뭉치들 보고 싶었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세상천지에 자기 같은 바보는 없을 거라고, 세트장 바닥을 뚫을 것처럼 우울하게 중얼거리던 경환 형까지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렇게 방송하고 솜뭉치 만나는 거 좋아하면서 그 기간들을 어떻게 버텼는지 절로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한 명씩 인사해볼까요? 우리 막내부터.”
“솜뭉치들 잘 지냈어요? 언래블의 실세 막내 세빈입니다!”
“지금 자기 입으로 실세라고 한 거예요? 와, 막내의 패기.”
“실제로 요새 세빈이가 형들을 다 이겨 먹고 있긴 해요.”
부끄러워하면서 형들 뒤에만 숨던 세빈이가 씩씩하게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찬이도 나도 한마디씩 보태줬다.
우리 막내, 잘 크고 있어!
“솜뭉치들의 귀염둥이 찬입니다! 저 보고 싶었죠?”
“네. 다음 소개할게요.”
“이 온도 차 뭔데!”
세빈이한테 우쭈쭈하던 형들이 힘찬이 소개를 빠르게 막아버리자 울상이 된 힘찬이가 준이 형에게 항의했다.
물론 준이 형을 포함한 모두가 사이좋게 찬이를 놀려줬다.
“언래블의 유일한 정상인, 환입니다. 이번 앨범 엄청 열심히 준비했어요. 기대해 주세요!”
“네, 제일 무서운 환이었습니다.”
“아닌데? 나 안 무서운데!”
그렇게 내 인사도 웃으면서 넘어가고 경환 형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언래블 C.I입니다. 여러분,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긴장한 듯 손에 힘이 들어간 경환 형의 모습에 긴장을 풀라는 뜻으로 어깨를 두드렸던 건데, 화면에 올라오는 솜뭉치들의 메시지를 읽던 경환 형이 화들짝 놀라며 인사했다.
“아까 C.I가 인터뷰하다 깜찍한 실수를 해서 조금 긴장해 있어요. 여러분들 오랜만에 본다고 떨려 하더라고요. 여러분, C.I 응원해 주세요!”
아무래도 한 번 더 풀어줘야 할 것 같다고 판단한 건지 준이 형이 가볍게 경환 형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착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 솜뭉치들은 화면 가득 경환 형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경환 형의 입가가 허물어지며 자연스럽게 시원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안녕하세요, 동생들에게 치이고 있는 히스입니다.”
“그짓말이에요! 솜뭉치들 속으면 안 돼요!”
“맞아요! 히스 형이 우리한테 얼마나 잔소리하는데.”
들은 척도 안 하는 영빈 형에게 찬이와 세빈이가 칭얼거리자, 웃는 얼굴 그대로 세빈이와 찬이를 떼어낸 준이 형이 마무리 인사를 했다.
“여러분의 리더, 언래블 하준입니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솜뭉치들.”
분위기 띄울 겸 활달하게 떠들던 멤버들이 박수를 치자 준이 형이 손짓해서 모두 앉혔다.
커다란 쿠션과 방석이 여기저기 놓여 포근한 분위기로 꾸며진 세트장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각자 쿠션을 하나씩 끌어안았다.
“여러분, 이번 앨범 이름 아는 사람?”
“저요! 여로(旅路)!”
“무슨 뜻인지도 설명해볼래?”
“여행을 떠나는 길이요!”
준이 형이 앨범 소개를 위해 멤버들과 하나씩 문답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대화가 이어졌고, 미리 열심히 공부한 찬이도 손을 번쩍 들고 대답했다.
“맞아요. 지난 앨범이 여행의 시작이었다면, 이번 앨범부터는 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았어요.”
“지난번 앨범에서 다 같이 배를 타는 장면에서 끝났었죠?”
“네. 저희가 티켓을 들고 한곳에 모이면서 끝났어요.”
“이번 앨범에서는 본격적으로 여행에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먼저 타이틀이 두 개나 됩니다!”
“그만큼 볼거리가 두 배! 고생도 두 배!”
대략의 얼개와 흘러가는 방향만 정해져 있었기에, 우리는 그 안에 내용을 담고자 매일 밤 자기 전 서로 어떤 말을 할지 이야기하고 메모했다.
처음에 회사에서 대본을 짜준다고 했었다. 하지만 대본대로 진행하면 유연하게 대처하기 힘들 것 같으니 순서만 정하고 우리가 직접 해보겠다고 의견을 전달했고, 그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특정 멤버가 혼자 이끌어가도 되지 않도록, 그리고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직접 해보겠다고 한 만큼 더 많이 연습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도 기꺼웠다.
“그러면 이번 타이틀곡이 두 곡인 만큼 두 명이 나눠서 설명하는 건 어때요?”
“Confusion은 준이 형이 설명하고, 폭풍전야는 누가 해볼래요?”
“말 꺼낸 지환이가 해야 하지 않을까?”
“전 다른 역할이 있으니까 사양할게요.”
“그럼 앨범 제목을 말한 찬이가 설명해봅시다.”
듣는 사람이 정신없지 않도록, 멤버들은 대화 속도에 신경 쓰고 있었다. 연습 때 나왔던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어서 우리 애들이 참 대견했다.
긴장하면 말이 빨라지는 찬이와 세빈이가 걱정을 태산같이 하더니, 실전에서는 형들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았다.
내가 혼자 대견해하는 동안에도 우리 애들은 화면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밝은 얼굴로 앨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폭풍전야’는 폭풍이 찾아오기 전에 일시적으로 평온한 날씨가 되는 것처럼, 잠깐 동안 각자의 두려움에서 도망쳐 행복한 듯한 했지만 결국 다가온 폭풍에 맞서 싸워야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와, 정말 대본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외운 것 같네요!”
“찬이 숨은 쉬고 말한 거죠?”
곡 소개를 빌미로 멤버들의 찬이 몰이가 시작되자 대본 없다고 손을 보여준 찬이가 억울하다는 듯 쿠션을 두 손으로 꾹꾹 눌렀다.
그 모습이 마치 포잉이 내 팔뚝에 대고 꾹꾹이 하는 것 같아서, 카메라 앞에서 뚫어져라 멤버들을 응시하는 포잉을 슬쩍 보고 웃었다.
“네, 우리 찬이 많이 컸죠? 이제 곡 소개도 할 만큼 여러분의 사랑으로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내가 적당히 찬이 몰이를 끊어내자, 이번에는 준이 형의 소개 차례가 되었다.
“‘Confusion’은 ‘폭풍전야’에서 시작된 혼란스러운 상태를 이야기하는 내용이에요. 대신, 폭풍전야가 묵직한 베이스와 거친 드럼 비트의 강렬한 사운드라면, ‘Confusion’은 말 그대로 난장판을 곡으로 표현하려고 했어요.”
“난장판이라면, 어떤 난장판인지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상황에 휘둘리기보다, 그 판을 때려 부숴서 엎어버리겠다는 느낌에 가까워요. 이전 앨범에서 언래블이 도망쳐야 했던 것들이 무언인지를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거침없이 작곡 당시의 상황과 이전 앨범과의 상관관계, 어떤 의도가 있고 어떤 비트를 썼는지 말하는 준이 형의 모습에서 전문가 포스가 뿜어져 나왔다.
멤버들을 챙길 때는 옆집 형 같다가도, 음악 얘기를 하면 전문가 포스를 뿜어대는 하준의 모습이 나는 늘 부럽고 닮고 싶었다.
눈을 빛내며 하준을 바라보자 동그랗고 다정한 연갈색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번 앨범에는 지난번 팬 사인회 때 공개했던 팬송 ‘마지막 이야기’가 정식으로 공개되었는데요. 기분이 어때요?”
“‘마지막 이야기’는 저 혼자 만들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죠. 멤버들이 다 같이 도와줘서 겨우 완성했어요. 그래도 제 이름이 적혀 있는 앨범을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우리도 대화에 껴줘요! 둘이서만 얘기하지 말고.”
“맞아! 나도 작곡 배울래요!”
훈훈하게 서로 칭찬하는 분위기가 이어지던 그때, 세빈이와 찬이가 준이 형과의 오붓한 대화를 막아섰다.
모처럼 덕심 좀 채우고 있었더니만, 이 녀석들이?
“그러고 보면 이번 타이틀에 둘이 직접 안무를 짜기도 했죠?”
“네! 찬이 형이랑 둘이 열심히 머리 맞대고 고민했어요.”
“저희가 안무 짜느라 고민하는 영상도 SNS에 올라갔더라고요!”
관심 달라고 삐약거리는 둘의 모습에 다들 둥기둥기 어르고 달래듯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중간중간 솜뭉치들의 메시지도 확인해 주었다.
“이제 뮤직비디오가 어떻게 나왔는지 직접 보는 시간을 갖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솜뭉치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러면 다 같이 뮤직비디오 보고 옵시다!”
하준의 마무리 멘트와 함께 다들 손뼉을 치기도 하고 쿠션을 흔들기도 하며 화면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솜뭉치들의 채팅창과 우리 얼굴이 보이던 화면이 검게 물들었고, 우리는 재빨리 쿠션을 놔두고 세트장 뒤편으로 달려갔다.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오는 이 시간이 우리에겐 의상을 바꿔 입을 준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