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나로 말할 것 같으면(5)
“아니! 거기선 이렇게 해야 한다니까?!”
“했다니까?”
“팔이 처졌어, 형. 그럼 혼자 이상해 보인다니까?”
컴백 무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내일이면 음원과 뮤직비디오가 공개되고 공식 채널과 GIVE 앱을 통해 컴백 무대가 생방송 된다.
그리고 음악방송에서 솜뭉치들과 함께 공중파를 통해 컴백 무대를 다시 알린다.
당장 내일 무대를 해야 하는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인데, 좀처럼 동작이 맞지 않아 다들 속이 답답해졌다.
“잠깐 쉬자, 안 되겠어.”
“조금만 더 하고….”
“안돼. 너희 너무 조급해져 있어. 20분간 휴식!”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제영 쌤은 우리 상태가 영 심상치 않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강제로 휴식을 시켰다.
방금까지 땀을 쏟아낸 연습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우리 애들의 얼굴이 조금 지쳐 보여서, 마음이 쓰렸다.
최근에 잠들기 직전까지 포잉과 주고받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미래가 너무 많이 틀어져서 내가 알고 있던 지난 일들과는 이미 상황이 달랐다.
앨범은 아예 시작부터 달랐고, 그 여파로 프로그램의 출연도 전부 달라졌다.
어떤 것은 빨라졌고, 어떤 것은 아예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저 아이돌을 병풍으로 삼아 무작정 돌려 까고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에 우리 애들이 나가지 않게 되어서 만족했다.
이미지를 지키자는 게 아니었다.
그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가학적인 프로그램을 경멸하기에 주장했던 일들이었고, 회사도 다행히 그 마음을 알아줬다.
초반부터 너무 이미지 소모가 많으면 장기전으로 보기 힘들다고 판단했던 것 같았다.
평소에도 우리 일상을 찍는 카메라가 자주 나타났다.
언래블 스토리에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기에 더 웃을 수 있었다.
더 많이 더 자주 팬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좋은 거니까.
팬과 가수의 거리가 줄어들고, 친밀하게 느끼고, 서로가 서로를 위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을까.
물론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지면서 나타날 문제들도 큰 골칫거리겠지만.
산만하게 떠오르던 생각들을 휘휘 저어 없앤 나는 처음 고민으로 돌아가서 이번 컴백 후 어떤 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을지 떠올려보았다.
내가 가진 미래 지식이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대박 날까?”
“바람직한 생각이구만.”
몸에 긴장을 빼고 늘어져 있는 준이 형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봤던 1집 이후 언래블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때 멤버들은 방송임에도 초조함과 긴장, 불안이 감춰지지 않아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2집 앨범도 잘못될까 봐, 팀이 없어질까 봐, 이대로 영영 별이 될 수 없을까 봐.
하지만 지금 멤버들은 늘 몰두하고 고민하고 때로는 힘들어해도 불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데미갓, 정확히는 망둥이와 개미핥기와의 일방적인 패악질이 오히려 멤버들의 결속과 다짐을 더 굳건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회사도 호의적이고 멤버들의 의견을 괄시하지 않아서 더더욱 자신감과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생동감이 넘쳤다.
순간 내 모든 고민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웃었다.
내가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 해도, 어떻게 해보려고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애들은 내가 없어도 자기 힘으로 굳건하게 일어나서 환히 빛나는 별이 될 애들이었다.
우리 애들이 괜히 언래블이 아니지, 그치.
“그래서 고민한 보람은 있어?”
“지금은 없어요. 뭐, 늘 형들이 하는 말이 전부죠.”
“우리가 잘하면 된다고?”
“회사도 잘해보자고 전력으로 도와주고 있으니, 우리는 우리를 갈아 넣어서 곡을 만들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거기에 우리 솜뭉치들도 열심히 응원해 주고 있고?”
“아쉬운 건 더 많은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 뭐 그런 거죠.”
티저 영상의 댓글을 몇 개 살펴본 게 되려 긍정적인 결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악플을 본 게 아니어서.
쭉쭉 뻗은 팔다리를 주무르던 찬이와 세빈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해, 형.”
“더 멋있게 하고 싶은데, 우리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욕심 때문에 그랬어요. 그래도 말 예쁘게 해야 했는데… 잘못했어요.”
둘의 마음이 우리 중 누구보다 초조해 보였다.
안무를 소화하는 멤버들을 매일매일 재촉하고 채근하면서 더 완성도 높은 동작을 만들어 내려 애썼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짜증 섞인 말들도 오고 갔다.
오늘도 그렇게 과열되는 모습을 보고 제영 쌤이 중단시켰던 거고.
“알아. 나도 체력 분배를 잘못했던 것 같아.”
“초반에 이 파트에서 위치를 바꾸는 게 낫지 않겠어?”
“거기에서 이렇게 하고 브릿지는 이렇게….”
잠시 훈훈한 광경이 펼쳐지나 했더니, 또 머리를 모아 안무를 고민하고 있었다.
“자, 다 쉬었으면 다시 해보자. 이번에 괜찮게 나오면 오늘 연습은 끝낼 거야.”
“당장 내일인데 괜찮을까요?”
“맞아. 좀 더 연습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일 무대를 완벽하게 해내려면 오늘은 쉬면서 체력을 비축하는 게 나아.”
잠깐 머리 식히라고 했더니 더 의욕적이 된 멤버들을 둘러보며, 제영 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멤버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어미 닭을 바라보는 병아리마냥 제영 쌤을 바라봤다.
“Confusion은 다른 것보다 표정 연기 잘 챙겨야 된다. 알지?”
“넵!”
“폭풍전야는 지금처럼 파워풀하게 하는 건 좋은데 앞 열이랑 뒷 열이 교차되는 브릿지 파트에서 반 박자 빠르게 움직여. 안 그러면 다음 안무랑 연결되는 대형이 무너진다.”
내일 컴백 무대에서 보여줄 안무는 컴백 무대용으로 편곡한 곡에 맞춰 다듬은 안무였기에 새로 연습해야 했다.
인트로와 함께 폭풍전야가 시작되며, 두 번째 벌스로 넘어가지 않고 Confusion으로 바뀐다.
그러다 보니 기존 안무와 헷갈려서 연습 중 실수가 한두 번 나왔지만, 더 이상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전면에 보이는 거울에 보이는 내 얼굴은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살면서 내가 이렇게 진지해지는 날이 오긴 오는구나.
그 후로 한 시간 더 연습은 이어졌고, 다행히 모두가 만족한 상태에서 끝낼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기 전 사전에 건네받은 대본을 확인하고, 순서를 되새기면서 해야 할 것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초대된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위해 질문과 답변을 체크하고, 돌발 질문에 대비하고자 우리끼리 질문을 해보기도 했다.
글씨 연습을 하면서 이번 곡의 가사를 쓰는 연습을 했더니, 자연스럽게 모두가 가사를 숙지했다.
“이런 걸 두고 일석이조라고 하나?”
“다행이지, 뭐. 우리도 이제 어디 가서 악필이라는 소리는 안 들을 것 같으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상정하고 대응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제 남은 건 휴식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함께 고생한 팀장님과 매니저 형들, 회사 분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온 숙소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난 다음 생에는 그냥 돈 많은 집 사랑받는 반려 동물이고 싶어….”
“난 돈 많은 백수.”
힘들다고 투덜거리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경환 형과 힘찬이 얼굴에는 되레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얼굴에 웃음이나 감추고 말하지?”
“티 나?”
“어. 완전.”
“으하하, 근데 이번 우리 무대는 내가 봐도 멋있어.”
“어이구, 니가 안무 짰다고 지금 자랑하는 거야?”
준이 형도 나도 경환 형도 영빈 형도 곡에 관여하면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애썼고, 세빈이와 찬이는 안무를 짜면서 자기 영역을 넓혔다.
“형, 머리 말려줘요.”
“드라이기 써라.”
“뜨거운 바람 싫단 말야.”
“내가 앓느니 죽지.”
세빈이는 평소에는 드라이기로 잘만 말려놓고 수건을 내밀더니 내 앞에 앉았다.
내일 컴백 무대 때문에 초조했던 모양이라 툴툴대면서도 머리를 말려줬다.
이렇게라도 멤버들에게 의지해 불안감을 털어내고 싶어 하는 막내를 외면하기에는 내가 우리 애들을 너무 예뻐했다.
어휴.
그런 내 옆에 꿈틀거리던 찬이가 들러붙어 세빈이한테 장난을 걸었다.
“가만히 있어. 이러다 머리털 뽑히겠다, 인마.”
“자꾸 최힘찬이 괴롭히잖아.”
“어쭈, 이제 나랑 맞먹냐.”
“형이 형 같아야 형이지!”
요새 들어 힘찬이랑 더 많이 투닥거리는데 저게 친해져서 하는 행동인 걸 아니까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앞에서 푸닥거리하는 둘을 옆으로 밀어버리자 왜 자기를 버리냐며 칭얼거리면서 매달려온다.
“영빈 형, 살려줘!”
“사자는 자기 새끼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트린다더라, 지환아.”
“그거 구라라고! 안 밀어! 형은 사자도 아니잖아!”
“강하게 커야지.”
둘이 매달려서 허우적대는 내 구조 요청을 영빈 형이 웃으면서 거절했다.
영빈 형… 변했어. 이러지 않았잖아….
“적당히 하고 들어가서 자라, 좀. 너희는 힘이 남아도냐.”
“형이 늙어서 그래.”
“죽을래?”
“늙었대요~ 준이 형은 이제 늙었어!”
산만한 동생들을 재워보려던 준이 형은 느닷없는 경환 형의 공격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재밌어 보였는지 나한테 매달려서 징글징글하게 굴던 둘도 준이 형으로 타깃을 바꿔 형한테 매달려서 늙었대요~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들 미친 것 같아.”
“사람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미치기도 한다더라.”
“그렇게 태연하게 말하지 마, 무서워.”
매달려서 흐물거리는 동생들과 질색하며 떨구려는 준이 형의 모습은 한 폭의 지옥도였다.
영빈 형 옆으로 슬쩍 몸을 뺀 내가 중얼거리자, 담담하게 대답하는 영빈 형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자기 전에 내일 순서 한 번만 확인하고 눕자.”
저 꼬락서니를 계속 보기에는 내 눈이 불쌍해서 멤버들의 주의를 돌렸다.
멤버들이 언제 난장판을 만들었냐는 듯 자리에 얌전히 앉자, 포잉이 질렸다는 얼굴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인터뷰 대답은 되도록 나랑 영빈이가. 개별 질문 들어오는 건 기존 대본대로 하고, 대본에 없는 건 적당히 걸러.”
“심한 건 우진 형이 컷할 거니까 긴장하지 말고.”
“실시간으로 솜뭉치들 메시지 읽는 건 누가 하기로 했지?”
“경환 형이랑, 찬이, 세빈이.”
“잘 골라야 되는 거 알지?”
“이상하다 싶으면 제가 자를게요.”
처음에는 쇼케이스를 여는 쪽으로도 논의했었다.
하지만 대관 일정이 여의치 않아 궁리한 끝에 온라인 쇼케이스를 열기로 했다.
쇼룸으로 꾸며진 장소에서 생방송으로 진행하면서 실시간으로 팬들의 질문을 받고, 앨범을 만들면서 있었던 일에 대한 에피소드를 풀어놓고.
뮤직비디오의 최초 공개도 방송 중에 진행될 예정이라 뮤직비디오와 우리의 무대를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생방이라 말실수 나오면 대참사니까 조심하자.”
“에이, 우리 이제 그 정도는 알아서 하죠.”
언제나 근심 걱정인 우리 리더님의 잔소리에 찬이가 씩씩하게 대꾸했다.
“우리 멤버들이 몇 달 만에 참 많이 컸네.”
“어, 저 미소 오랜만이다!”
“할머니 미소였나? 할아버지?”
“아빠 미소 아니었어?”
알아서 순서와 대처 방안을 착착 대꾸하는 멤버들이 기특해서 칭찬했더니, 한동안 나오지 않았던 내 웃음에 대한 지적이 다시 나왔다.
“자꾸 잊으시는 것 같은데 제가 올해 18살입니다, 여러분.”
“중간에 추첨은 누가 진행하기로 했었지?”
“내 말 씹냐!”
내 팬심을 흔드는 가장 큰 적이 지금의 언래블이라니.
수많은 솜뭉치들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 이 모습은 나만 알고 있기로 했다.
“뭐, 대충 정리된 것 같네. 연습한 대로만 하자.”
“연습한 것보다 잘하면 안 되나요!”
“잘하려고 하다 사고 치지 말고 연습한 만큼만 해라.”
손을 번쩍 들면서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찬이에게, 다정하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준이 형의 두 눈이 번뜩였다.
아무래도 아까 늙었다고 노래 부른 것 때문에 삐진 것 같았다.
“이제 자자. 푹 자야 내일 또 멋있는 모습으로 솜뭉치들 만나지.”
“자야지….”
“원래 나이 먹을수록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 알았어! 그만할게요!”
일절에서 그치지 못하고 이절, 삼절까지 우려먹으려던 찬이는 결국 준이 형한테 뒷목을 잡힌 채 방으로 끌려들어 갔다.
“저런.”
“그러게 적당히 해야지.”
“우리도 자자.”
일상 같은 모습이라 우리 모두 그러려니 했다.
긴장되더라도 준이 형은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쯧쯧.
‘얼른 자라, 계약자야.’
‘자야지. 자야 내일 사고 안 치고 열심히 잘….’
‘쯧. 그냥 연습했던 것만큼만 해도 될 것 같으니까 헛소리 말고.’
‘응….’
멤버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포잉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포잉은 끌어안는 나를 웬일로 내버려 두더니 조그만 앞발을 들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뭐야, 응원해 준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눈 감아.’
‘넵.’
눈초리가 사나워지기 전에 냉큼 눈을 감고 포잉을 한번 꼭 안았다.
다행히 쿵쾅대던 심장이 조금씩 느긋해지는 것 같았다.
‘잘 됐으면 좋겠다.’
‘잘 될 거임.’
‘고마워, 포잉.’
내 요정님의 말은 언제나 옳았으니까.
그렇게 컴백 전날의 하루도 무사히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