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39)화 (139/456)

139. 나로 말할 것 같으면(2)

“지환이 글씨가 알아보기 힘든 건 너무 흘려 써서 그래.”

다음날 출근한 준이 형은 영빈 형을 데리고 곧장 팀장님에게 가서 솜뭉치들에게 무언가 선물을 주고 싶다는 의견을 전하고, 손편지를 음반 발매일에 올리는 것은 어떤가 물었다.

팀장님은 생각에 그치지 않고 직접 의견 제시까지 하는 멤버들의 자발성을 칭찬하며 손편지는 언제든 올려도 된다고 말했다.

단, 그 외에 무언가 선물을 하는 것은 조금 더 논의를 해보자고 말해주셨다.

팀장님은 불특정 다수의 팬들에게만 혜택이 가는 추첨제의 장단점과 팬클럽 가입자들에게만 제공되는 한정된 혜택 등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회의 시간에 안건으로 올릴 테니 다 같이 의논해보자는 말에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6명이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수많은 경험을 가진 더 많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더 좋은 방법을 떠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거기에 더해 준이 형은 기어코 내 글씨체를 조금 교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팀장님에게 말해서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팀장님뿐만 아니라 사무실의 직원분들도 준이 형 말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그 모습에 시무룩하게 내려앉은 내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힘내라고 했지만….

“그렇게 실컷 웃고 나서 하는 위로가 어떻게 위로에요!”

“아니, 웃긴데 어떡하냐.”

“와, 정 대리님 그렇게 안 봤는데….”

“아냐 아냐, 지환아. 내가 얼마나 너 아끼는지 알지?”

“그짓말하지 마세요!”

평소에 자주 대화도 나누고 친하게 지냈던 대리님이 낄낄대면서 지나갔다.

인생….

겨우 다 웃은 건지 팀장님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가며 말을 이었다.

“아, 진짜 간만에 실컷 웃었네. 지환이 글씨가 좀 알아보기 힘들긴 하지.”

“그 정도였어요? 하….”

옆에서 피식피식 웃고 있는 포잉의 모습이 내 눈에만 보인다는 게 오늘따라 더 열받는다. 아오.

“다른 것보다, 네가 너무 흘려서 써서 ‘ㄴ’을 쓴 건지 ‘ㄹ’을 쓴 건지 구분이 어려워. ‘ㅇ’이나 ‘ㅎ’도 그렇고 ‘ㅓ’인지 ‘ㅕ’인지, 아니면 ‘ㅣ’ 인지 구분하는 것도 힘들어, 인마.”

옆에서 종종 내 메모를 챙겨줬던 우진 형이 한마디 보탰다.

“아, 그럼 조금 더 또박또박 쓰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것도 좋지. 근데 이번 기회에 글씨체도 가다듬고 하면 더 좋겠지? 방법은 팀장님이 찾아볼 테니까 일단은 연습 가라.”

그렇게 지난밤에 이어 이 연타로 타격을 입은 나는 종일 울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여태 살면서 글씨체로 이렇게까지 타박 받은 적이 없었는데….

아니, 생각을 해보니 딱히 직접 필기구를 들어 무언가를 작성한 것 자체가 학창 시절을 제외하면 딱히 없었다.

수업 중 필기는 나만 알아보면 되니 문제가 없었고, 대부분의 과제는 컴퓨터 파일로 제출하니 더더욱 쓸 일이 없었다.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내고 안무 연습실에 들어갔다.

폭풍전야의 안무는 파워풀하고 단단한 느낌을 주는 동작들이 많았다.

안무가 유기적으로 이어지던 이전의 타이틀 ‘I'm OK’와는 조금 달랐다.

딱딱 끊어지는 느낌을 주는 동작이 단체 군무로 들어가니, 무대에서 객석을 향해 안무를 보일 때 훨씬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이 동작들을 구상한 건 제영 쌤이 아닌 찬이와 세빈이라고 했다.

세세한 동작을 맞춰주고 연결 부분을 손봐준 건 제영 쌤이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곡의 흐름에 따른 안무의 포인트 동작 등 중요한 부분은 둘이 많은 아이디어를 냈다고.

그만큼 둘은 더 열정적으로 나와 형들을 쥐어짰고, 폭풍전야 안무 연습 후에는 다들 앓아눕듯 연습실 바닥과 한 몸이 되었다.

“쟤네한테 안무 만들라고 하지 말자…. 내 뼈가 먼저 부러지겠어.”

“사람 뼈가 은근 단단해서 이 정도엔 안 부러져요.”

“니가 사람이냐!”

한탄하듯 중얼거리는 영빈 형의 말에 세빈이가 어림없다는 듯 대꾸하자 울컥한 영빈 형이 옆에 있던 수건을 던졌다.

하지만 힘이 쪽 빠진 영빈 형의 힘으로는 제일 멀리 있는 세빈이를 맞추는 건 무리였고, 얼마 못 가 툭 떨어진 수건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수치플이야, 뭐야. 우리 빈이 형 왤케 짠해졌어….”

“뭐래, 그만 쉬고 회의 가야 된다.”

측은하게 중얼거린 내 목소리에 영빈 형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낄낄거리는 세빈이와 찬이는 아직 체력이 남아도는 것 같았고, 안쓰러운 영빈 형은 경환 형이 챙겨서 씻으러 갔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옷이 축축했던 터라 다음 연습을 속행할 게 아니면 씻고 회의실로 가는 게 나을 듯했다.

“먼저 좀 씻읍시다….”

퀭해진 내가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향했다.

“씻고 딱 한 시간만 잤음 좋겠다.”

“난 30분 만이라도….”

“제발 숙소에서나 일찍 자, 이것들아.”

일찍 자자고 해놓고 늘 수다 떨다 새벽 늦게 잠드는 동생들에게 한탄 같은 잔소리를 늘어놓는 준이 형의 목소리가 애잔했다.

다른 건 말을 잘 듣는 편인데, 유독 일찍 자라는 말은 안 듣지, 우리 애들이.

하루하루가 늘 똑같은 일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던 이전 생에 비하면 지금은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화려한 색들로 넘쳐났다.

총천연색의 페인트를 들이붓는다면 지금 멤버들과 같은 색이지 않을까?

하준 형의 어깨를 다독이며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씻고 나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회의실에 자리한 우리는 처음처럼 회사의 다른 분들을 만나도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먼저 인사하고 살갑게 대하면 그들도 우리를 단순히 상품이 아닌 사람으로 대해준다는 걸 조금씩이나마 깨달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변화가 기꺼웠다.

“자, 다 모인 것 같으니까 시작해볼까.”

홍보전략실의 홍준영 팀장님이 언제 들어도 통통 튀는 가벼운 목소리로 회의의 시작을 알렸고, 우리 앞에는 한 뭉치의 출력물이 놓였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만큼 컴백 무대는 좀 화려하게 가야 한다고 보는데.”

“전략실에서 준비한 내용은 출력물을 참고해 주세요.”

“박세날 PD님과 조율한 결과 뮤직밸류에서 최초 컴백 무대를….”

“이번에는 영상으로 먼저 보이는 만큼….”

빔프로젝터에서 수많은 이미지가 우리 컴백 무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쏟아졌고, 전략실 대리님의 설명과 함께 사방에서 질문과 대답이 흘러나왔다.

중간중간 멤버들도 예정된 무대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을 담아 궁금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질문했다.

처음 팀 명을 짓고 컨셉 앨범 회의를 하고 난 후부터는 회사에서도 우리 개개인을 한 명의 아티스트로 대우하면서 회의 참석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기 시작했다.

그런 회사의 모습 덕분에 멤버들도 회의가 연습실 생활만큼 익숙해져서, 이제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늘 회의에 참여할 때면 각자의 앞에 놓인 노트에 내용을 메모했다. 그러다 회의가 끝나면 메모한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멤버들의 모습에 마음 한편이 뿌듯해지곤 했다.

우리 애들 잘 크고 있네.

그렇게 홍보 방향과 무대에 대한 회의가 끝나자 전략실의 직원분들이 잘 부탁한다며 멤버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먼저 나가셨다.

곧 회의실 안엔 소현 팀장님과 매니저 형들, 우리만 남게 되었고, 소현 팀장님이 활짝 웃으며 무언가 커다란 봉투를 회의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준이랑 영빈이 통해서 너희가 팬분들에게 손편지를 쓰고 싶어 한다는 내용을 전달받았어. 맞아?”

“넵. 그렇게라도 하고 싶어요.”

“편지를 받으면 솜뭉치들이 좋아하지 않을까요?”

초롱초롱한 멤버들의 눈을 바라본 팀장님은 우진 형에게 눈짓을 했고, 우진 형은 봉투에서 포장된 편지지들을 꺼냈다.

“일단 종류를 다양하게 준비했으니까 각자 취향껏 골라.”

“먼저 노트에 쓰고 우진이한테 내용을 보여준 다음에 편지지에 옮겨 적는 거 잊지 말고.”

각자 마음에 드는 걸 집어가길래 나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몽환적인 그림이 그려진 편지지를 골랐다.

“그리고 지환이가 글씨체 교정을 받고 싶다고 한다고 들었는데.”

“제 의지가 아니었는데요….”

무언가 의도가 왜곡된 것 같아 소심하게 반항을 해보았지만 역시나 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깨끗하고 예쁜 글씨체를 가지고 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해서 너희를 위해 특별히 노트도 준비했어.”

“저희도요?”

“팀이잖아. 할 때 같이 해야지.”

“맞아!”

혼자만 고생하나 했더니 역시 우리 팀장님은 공명정대했다.

모든 멤버들이 함께 하는 거라면, 뭐.

“자, 그리고 이건 영상으로 남길 거야. 언래블 스토리에 쓸 거니까 말조심하고.”

“팀장님, 이것도 적당히 편집해 주실 거죠?”

“봐서.”

“너무해….”

봉투 안에는 줄이 있는 노트와 초등학생 때나 썼었던 것 같은 네모난 칸이 그려진 노트가 한 묶음씩 들어있었다.

심지어 연필깎이 3개와 4B 연필 묶음까지 나왔다.

“연필깎이 말고 칼은 없어요? 난 칼로 깎는 게 좋은데.”

“위험하니까 그냥 저거 쓰자.”

“전 연필보다 펜이 더 편한데….”

“글씨 교정에는 볼펜보다 연필이 좋대.”

멤버들의 반론은 팀장님의 차분한 반격에 모두 산산조각났다.

‘역시 그 실장이랑 저 팀장이 제일 강한 것 같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 멤버들과 팀장님의 모습을 지켜보던 포잉이 기어코 한마디 했다.

회사의 모든 사람들 중 정윤 실장과 소현 팀장님이 가장 강한 사람인 것 같다면서.

회의실 한쪽에서 석환 형이 카메라를 설치해 각도를 조절했고, 팀장님은 노트북을 조작해 영상 하나를 빔프로젝터를 통해 재생했다.

“팀장님, 그런데 이 영상 올리신 분한테 허락받아야 하지 않아요?”

“이미 연락드려서 허락받았지.”

“역시….”

벗어날 구멍 따위는 만들지 않겠다는 듯 철저한 팀장님의 모습에 우리는 결국 얌전히 따르기로 했다.

“지금부터 촬영 시작할 거니까 각자 앞에 정리하고.”

밖에 꺼내져 있던 휴대폰을 치우고 앞에 놓인 방금 전의 회의 자료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재생된 참고 영상.

영상 안에서 설명해 주시는 분의 차분한 목소리와 깔끔한 글씨체에 감탄하며 우리는 어느새 영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간단한 설명이 끝난 후 화면에 가장 기본이 되는 내용이 띄워졌다.

“연습 순서는 영상에서 알려준 것처럼 자음과 모음, 그다음은 단어, 문장 순서로 진행하면 될 것 같아.”

“최대한 글자 높이를 맞추고 또박또박 쓰면서 너비를 맞추라는 거였지?”

영상의 설명을 확인한 멤버들이 각자 한마디씩 본인이 확인한 포인트를 집어냈고, 소현 팀장님은 커다란 종이에 멤버들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크게 써주셨다.

그랬더니 우진 형이 테이블 위에 작은 거치대를 세웠고, 그 위에 소현 팀장님이 번호를 매겨가며 적어준 종이를 올려두었다.

도대체 저 봉지 안에 어디까지 들어있는지 궁금해졌다.

세팅이 모두 끝난 회의실은 어느새 공부방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필기 잘 안 하는데….”

“자랑이냐? 너 성적표 나오기만 해.”

“아니, 나만 그래?!”

“응. 너만 그래.”

사소한 소란이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찬이의 반항은 손쉽게 제압되었다.

괜히 반항하면 손해 볼 게 뻔한데 왜 덤비는 거야, 으휴.

반듯하게 펼친 노트에 제일 위에 평소 쓰던 대로 ‘I'm OK’의 가사를 네 줄 적었다.

“와, 나한테만 뭐라 그럴 게 아니었네.”

“그 와중에 영빈 형 왜 이렇게 예쁘게 쓰는데….”

“세빈이는 글자가 아주 힘이 넘치는구나.”

서로 적은 글씨를 보며 품평을 해대던 우리는 반듯하고 정갈한 영빈 형의 글자에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형이 우리를 가르쳐줘야 할 것 같은데?

준이 형의 글씨는 약간 흘려 쓰긴 했지만 본인의 개성이 있어 팬심을 빼고 봐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세빈이는 귀여운 평소 모습과 달리 글씨는 어른스럽고 힘이 넘쳐 보였다.

하지만 경환 형이나 찬이는 나한테 글씨 못쓴다고 뭐라 하면 안 될 수준 같았다.

“그럼 오늘은 영빈이가 진행하고 준이가 보조해 주면 되겠네.”

부드럽게 웃는 영빈 형의 미소가 평소와 달리 사악해 보였다.

아무래도 쉬운 시간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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