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36)화 (136/456)

136. 지금 널 찾아가고 있어(4)

스스로가 그리 대단치 못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둘 중 하나가 되곤 한다.

질투에 미쳐 흑화하거나 내가 더 노력해야겠다고 스스로를 불태우거나.

원래 나였다면 대단한 사람들의 옆에 갈 일도 없고 그저 멀리서 어쩌다 한번 지켜보기나 할 뿐이었을 텐데, 지금 나는 그들을 매일매일 보며 함께하고 있다.

자기 꿈을 위해 온전히 내던지고 가장 찬란한 시절을 불태우는 사람들, 그들이 연예계에 산재하는 수많은 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매일매일을 나의 별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준이 형, 진짜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짓지?”

“내 말이. 난 나무토막인가.”

“어우, 저번에 어떻게 찍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이틀간 섬에서 시달린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다들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컨셉 포토 촬영으로 스튜디오에 와 있었다. 어? 하고 의식하기도 전에 의상을 다 갈아입은 우리는 메이크업을 위해 얌전히 앉아있었다.

준비가 끝난 첫 주자로 하준 형부터 개인 촬영이 시작되었고, 나와 찬이는 형의 촬영을 모니터링을 위해 지켜보고 있었다.

군데군데 찢어지고 해진 낡은 셔츠 주변은 피가 묻어 굳은 것처럼 검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힘없이 늘어트린 두 팔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동그랗고 부드러웠던 눈가에는 처연한 슬픔이 걸렸고, 부드럽게 반짝이던 연한 갈색의 머리칼도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몰두해 있는 하준 형의 모습에, 찬이와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긴장되는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역시 내 최애님은 남달랐다.

다음 차례인 경환 형은 촬영 의상이 한없이 어색했는지 끊임없이 움직이다 결국 가희 누나한테 혼났다. 그만 좀 움직이라고

“그렇게 짠하게 쳐다봐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경환아.”

“우진 형, 너무해….”

경환 형의 셔츠는 등 쪽 천은 어딜 갔는지 절반이 찢겨 있었고, 목에는 붕대 비슷한 걸 감아놨는데, 피가 군데군데 묻은 것처럼 칠해져 있었다.

등이 휑한 것이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지 경환 형은 우진 형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우진 형은 허허하고 웃으며 방어에 성공했다.

어떻게 저렇게 실감 나는 소품들을 만들어내는지….

“그래도 우리 옷은 좀 깨끗한 편인 건가?”

“준이 형이랑 경환 형 의상이 유난히 좀 많이 구른 느낌이지.”

경환 형이 말은 저렇게 해도 카메라 앞에서는 열심히 할 테니 더 이상 불쌍히 여기지 않기로 했다.

당장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이 더 큰 것 같으니까.

나는 우진 형이 프린트해 건네준 대본과 설정이 적힌 종이 뭉치를 다시 뒤적거렸다.

그동안 너무 손에 쥐고 다녔는지 꼬깃꼬깃해지긴 했지만 글자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어서 괜찮았다.

오늘 내가 카메라 앞에서 보여야 할 모습은 원망과 억울함에 가득 찬 공지환이었다.

준이 형이 체념에 가까운 감정이라면 경환 형은 반항심이었고.

억울했던 상황들을 떠올려볼까 하고 생각했다가, 자잘한 기억들이 불쑥불쑥 치솟아서 포기했다.

분위기를 이해하기 전에 내가 화병이 날 것 같았다.

포잉이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조금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다 결국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포잉, 왜?’

‘스킬 쓰면 되잖아.’

‘응?’

‘계약자야, 본인의 상태를 언제나 체크하고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기야 하지….’

‘알면 쫌!!’

내가 너무 구렁이 담 넘듯 스륵 넘어가려고 했을까.

내 태도에 포잉이 하악질까지 하며 성질을 부렸다.

가진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나에게도 도움이 될 텐데 왜 이렇게 주어진 것들을 거북해 하냐는 이야기로 이러다 또 싸울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어. 최대한 열심히 궁리해볼게. 작가님이나 스태프들 마음을 확인해보라는 거지?’

‘하아…. 내가 님 때문에 화병 걸릴 것 같음.’

‘허허…. 화병이 한국 사람들 민족 병이라던데. 포잉, 대한민국 고양이였구나?’

‘그놈의 조동이!’

긴장 푼답시고 포잉한테 조금 깐족거렸다가 괜히 입술만 솜 방망이로 한 대 얻어맞았다.

포잉한테는 맞아도 메이크업이 안 지워져서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느새 다가온 영빈 형과 세빈이까지 형들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며, 우리는 컨셉 포토의 설정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된 순간, 포잉의 조언대로 그동안 손 한번 대지 않았던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번 데뷔 앨범에 함께 했던 박연우 사진작가님이 아닌, 새로운 사진작가님이셨다.

J(제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사진작가님은 풍경보다 인물에 조금 더 강점을 가진 분으로, 인물의 감정을 사진에 적나라하게 남기는 편이라고 했다.

차갑다 싶을 정도로 조금 매서운 인상이었지만, 인상 가지고 내가 남 말하면 그런 내로남불도 없으니 넘어가야지.

사전 미팅 때 우리 한 명 한 명에게 각자의 포지션과 자신이 구상하는 모습에 대해서도 세세한 설명을 해주셨던 분이다.

박연우 사진작가님과는 또 다른 타입의 사람이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우리를 능수능란하게 휘어잡고 적절하게 지시사항을 내리는 걸 보고 있자니 멋있기도 했다.

포잉과 이야기를 나눴던 대로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스킬을 발동시켰다. 이전과 달리 상대방은 카메라 렌즈 너머로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단 한 명이었다.

“조금 더 왼쪽으로 틀어주세요.”

[아, 시선이 밑으로 향하는 게 나을… 좋아!]

준이 형, 경환 형과 달리 나와 찬이 의상은 깨끗한 편이었다.

검은 셔츠가 잔뜩 구겨져 있었지만, 피까지 묻힌 형들 옷 보다야….

철근처럼 보이는 쇳덩이가 사선으로 바닥에 꽂혀있었고, 그 위에 걸터앉은 내 발목엔 여러 색상의 가죽이 겹겹이 묶여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방에서 뻗어 나온, 타인의 욕망에 제한된 움직임. 그 특정 그림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던 문구를 떠올렸다.

이에 억울함을 도대체 어떻게 얼굴에 드러내는지 고민하다가, 나는 내가 가장 억울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억울한 순간이야 지금 생에도 많았지만, 여태까지 내 삶에서 가장 억울했던 건 역시 그 순간이었다.

피켓팅까지 실패하고 누나의 도움으로 간신히 거머쥐었던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펼쳐졌을 이전 생 언래블의 콘서트.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저 넓은 경기장에 내 자리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냐고 얼마나 분통을 터트렸던가.

플로어 석을 바란 것도, 2층 1열을 바란 것도 아닌데 번번이 ‘이선좌’(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를 마주하다 초대석 티켓을 쥐었을 때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렇게 도착한 주 경기장 밖에서 세빈이를 만났을 때 놀랐던 마음은 또 어떻고.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날아간 교통사고.

죽는구나, 라는 걸 알았을 때 나를 휘감고 있던 감정은 슬픔보단 억울함이었다.

하다못해 공연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도로에서 당한 사고였으면 이해하는 시늉이라도 해봤을 텐데.

하필이면 지금 세빈이도 스튜디오의 왼쪽 끝부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탓에 그때의 감정이 더 쉽게 나를 찾아왔다.

울컥하고 올라온 감정. 분노와 원망, 억울함이 뒤범벅되어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아래쪽으로 시선 돌릴게요. 좋아, 조금 더 세게 쥐어보세요.”

[하, 스튜디오가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

‘…님 괜찮?’

‘응. 아직 괜찮아.’

포잉의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들려오는 셔터 음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작가님의 말풍선에 집중했다.

작가님은 이후로 몇 가지 자세를 더 요구했고, 그 뒤로 떠오르는 말풍선 덕에 디테일한 자세에 더 공을 들일 수 있었다.

다행히 만족스러운 장면을 뽑아낸 것 같았다.

내 순서가 끝나고 찬이 차례가 되었다. 조금 심란해 보이는 찬이 얼굴에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표정에 본인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걸 잘 못하는 찬이는 주어진 대본 안에서 연기해야 하는 이런 촬영을 힘들어했다.

프로필 사진 촬영 때와 데뷔 앨범 때도 이것들 때문에 고생해서 그 후로 틈틈이 표정 연기와 행동 교정을 배워왔지만, 여전히 어렵다고.

그랬던 우리 찬이가 생각보다 포즈를 잡는 것도, 표정을 만드는 것도 생각보다 많은 지적을 받지 않고 끝냈다.

긴장하고 지켜보던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른오징어가 되어 돌아온 찬이를 마구 칭찬했다.

기특하다, 내 새끼!

“와씨, 우리 찬이 이제 프로 아이돌 다 됐네!”

“얼씨구? 얼어 죽을….”

“그래도 저번에 비하면 진짜 빨리 끝냈잖아. 혼나지도 않았고. 뭣보다 표정 진짜 무섭던데?”

다음 촬영 순서인 영빈 형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다가와 찬이를 마구 칭찬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스태프분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모습이라 우리끼리 구석에 숨어서 목소리를 낮춘 칭찬이었지만, 힘찬이 얼굴은 이미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아, 다 왜 그래!”

“기특해서 그러지.”

“우진 형이랑 영빈 형이 도와줘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데?”

부끄러웠는지 우리를 피해 도망가려던 찬이가 준이 형의 손에 잡혀 실패하더니, 순순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털어놨다.

타이틀곡이 정해진 그날 따로 우진 형에게 촬영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고, 우진 형은 차라리 얼굴에 어떤 표정을 지으려 하지 말자는 답을 줬다고 했다.

어차피 밝고 화사한 컨셉이 아니었기에,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말고 아예 비워버리면 자연스럽게 무표정이 될 것 아니냐는 조언이었다.

무표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찬이를 우연히 발견한 영빈 형이 거기에 한마디를 더했다고 했다.

어떤 포즈를 잡는 걸 춤 동작이라고 생각하고 해보는 건 어떻냐고.

비보잉에도 프리즈라는 동작이 있지 않냐는 데서 떠오른 생각이라고 했다.

춤을 출 때도 일정 시간 멈춰서 특정 동작들을 구사해내는 경우가 있으니,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차라리 춤 동작이라고 생각하라는 조언이었다.

그 조언이 힘찬이에게 상당히 큰 힘이 되었다고 했다.

물론 단시간에 모델들처럼 유려한 포즈를 만들어내고 시선 처리를 할 수는 없었지만, 첫 촬영 때를 떠올려보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오죽하면 작가님도 사전에 전달받은 것들이 괜한 우려였다면서 찬이를 칭찬해 주셨다.

아직 어설프지만 충분히 모델로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 우리 때문에 붉어졌던 찬이 얼굴은 한 알의 홍옥처럼 참 예쁘게 익어버렸다.

우리 애가 이렇게 귀여운 면이 있네, 허허.

그 후로도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촬영에 전념해야 했고, 의상도 두세 번 더 갈아입었다.

더블 타이틀곡인 만큼 각각의 곡에 따른 촬영이 필요했고, 상반되는 두 개의 곡에 맞추기 위해 그만큼 우리는 더 열심히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멤버들이 새로운 앨범을 위해 하얗게 불태운 그 날 자정, 언래블 공식 SNS와 위캠 채널에는 하나의 영상이 다시 업로드되었다.

영상의 제목은 ‘Act II - 여로’

영상은 안개로 뒤덮인 섬을 한차례 훑더니 숲과 모래사장의 경계면으로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는 이들을 비추었다.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끌면서 나타난 여섯 명의 뒷모습이었다.

검은 로브를 두른 그들이 카메라를 인식하기라도 한 듯 뒤를 돌아서자 익숙한 그 가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상을 보고 있는 사람을 향해 마치 가면 너머의 눈이 웃는 것 같았다고 느껴지던 순간, 화면은 검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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