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지금 널 찾아가고 있어(2)
해가 있는 동안 장비 세팅이 끝난 스태프들과 준비된 식사를 마친 우리는 티저 영상에 쓰일 짧은 컷들을 찍었다.
다행히 경환 형도 조금 쉬고 나니 밥을 먹을 만큼 괜찮아졌다.
감독님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우리끼리 물놀이 하는 모습을 연출해달라고 요청하셨고, 물놀이를 벼르던 힘찬이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이렇게 촬영을 빙자한 물놀이 시간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고운 모래가 가득한 모래사장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는 멤버들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도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올 만큼 행복해 보였다.
운동화가 젖는 게 싫었던 내가 한 손에 운동화를 들고 나한테 물을 뿌리는 찬이를 피하다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
감독님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상 그냥 놀면 된다고 했던 터라, 멤버들은 나를 보며 웃느라 바빴다.
옷 젖는 게 싫다고 뒤에 피해 있던 내가 결국 넘어져서 홀딱 젖은 모습이 재밌었나 보다.
하하,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국 사람이지.
세빈이와 영빈 형이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다가와 내 팔을 잡아 일으켰고, 이미 젖어버린 운동화를 잠시 바라본 나는 그걸 모래사장 쪽으로 던져버렸다.
햇빛에 반짝이며 날아가는 운동화.
운동화를 내던지고 복수심에 몸을 맡긴 나는 결국 뛰어가 힘찬이의 뒷덜미를 잡아 바닥에 주저앉히는 데 성공했다.
“이게 바로 인과응보다!”
“공지환이 미쳤다!”
“네가 먼저 시작했어, 인마!”
“쟤 은근 승부욕 쩌는 거 같단 말야.”
결국 안 젖은 사람 없이 전부 바닷물에 한 번씩 빠지고 나서야 감독님이 컷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분들이 달려왔다.
“감기 걸려, 얼른 가서 옷 갈아입자!”
“아, 더 놀면 안 돼요?”
“가서 얼른 씻고 저녁 촬영 대비해야지.”
“네엥….”
“내일은 물에 들어갈 시간 없겠지?”
“대본 다시 봐봐.”
한참 흥이 올랐던 세빈이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시무룩 해하자 우진 형이 달랬고, 아쉬워하던 경환 형도 중얼거렸다.
세빈이는 온도 차가 조금만 심해져도 감기 기운이 도는 애라 늘 우진 형은 상비약을 들고 다닐 지경이었다.
하준 형과 영빈 형은 벌써 감독님한테 달려가 장면이 어떻게 나왔는지 보고 있었다.
“어때요? 자연스러워요?”
“응. 중간에 넘어져서 더 자연스러워진 것 같아.”
“지환이가 한 건 했네.”
“감사합니다.”
하준 형한테 물었더니 감독님이 칭찬을 해주셨다.
넘어지고 칭찬받는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고개를 꾸벅 숙이자 부끄러워하는 내 모습에 다들 키득거리고 있어서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과 별개로, 솜뭉치들은 괜찮은데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건 익숙해지지 않았다.
꾸물거리며 씻고 나오자 먼저 씻고 나온 영빈 형이 생수병을 내밀었다.
“환이 너 물을 너무 조금 마시는 거 같아. 자주 마셔서 보충해 줘야 된다.”
“물은 맛이 없는걸요….”
“보리차 같은 건 마셔?”
“응. 그냥 생수만 아니면 잘 마셔요.”
“우진 형한테 말해둘게.”
물을 잘 안 마시면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한참 잔소리하는 영빈 형의 모습에 맛없는 생수를 열심히 마셔야 했다.
큰일이었다. 점점 영빈 형의 잔소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하준 형의 잔소리도 만만치 않았는데….
하나둘 애들이 씻고 나왔고, 희주 누나가 준비해둔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나와 하준 형과 경환 형에게는 트레이닝복이, 세빈이랑 영빈 형에게는 긴 바지에 반팔 티가 주어졌다.
“나만 왜 반바지야….”
저녁에 숲에서 촬영하기로 되어 있던 터라, 벌레를 무서워하는 찬이는 반바지를 들고 울상이 되었다.
“막 뱀 나오고 이러지 않겠지?”
“설마. 회사 분들이 사전 답사 다 끝냈다고 했는데.”
“그때 숨어있던 뱀이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떡해?”
“지환이가 잡아줄 거야.”
“갑자기 나는 왜….”
우리 애들 입은 정말 한시도 쉬지 않았다.
매일 같이 있는데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지 온갖 이야기를 하루 종일도 떠들 수 있는 것 같았다.
의상을 갈아입으면서도 투덜거리는 찬이는 내가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을 부럽다는 듯 바라봤다.
저대로 두면 내내 툴툴거릴 것 같아서, 내가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다.
“어차피 진짜 뱀한테 물리는 거면 뭘 입었던 이빨이 옷을 뚫을걸. 너도 뱀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잖아.”
“하 씨, 저게 또 팩트로 때리네.”
벌레가 몸에 들러붙을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으면서 뱀 핑계를 대는 찬이가 가소로웠다.
궁둥짝을 발로 툭 차주며 한마디 하자, 찬이 볼에 불만이 가득 찼다.
“찬이 형 손에 죽을 벌레가 더 불쌍한 것 같은데.”
“나도 죽이고 싶지 않아! 난 평화를 사랑한다고! 내 옆에만 안 오면 되는데!”
우리 중에 유일하게 벌레를 겁내지 않는 세빈이만 여유가 가득했다.
숙소에서도 벌레가 나오면 세빈이가 모두 처리해 주는 터라 다시 한번 나는 막내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진짜 우리 세빈이 없었으면 어쩔뻔했냐….
“자자, 빨리 찍고 저녁 먹자. 대표님이 고기 보내주셨대!”
“네!”
“고기!”
잠시 흔들렸던 우리는 고기로 마음을 다졌다.
까짓 벌레, 흐린 눈으로 넘어가 주마.
그러나 굳게 마음먹었던 것과 다르게, 우리는 촬영 중간중간 짬이 날 때마다 사방에서 들리는 익숙한 비명에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악! 저리 가!”
“미쳤나 봐, 나방이 내 주먹만 해!”
촬영할 때는 어떻게 그걸 참았는지 꾸역꾸역 참더니, 카메라에서 잠깐만 벗어나면 불빛에 홀려 달려드는 날벌레들을 피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진짜 못났다.”
“아까 소리 지르면서 달려온 네가 할 말은 아니잖아.”
힘찬이와 내 분량이 가장 먼저 끝난 덕분에 스태프분들 사이에 숨어서 다른 멤버들의 촬영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쪽엔 벌레들의 습격에 대비해 약도 피우고 잡아줄 사람도 있어서 안심이었다.
다 같이 있던 장면에서 두 명씩 찢어져 갈리기 때문에 둘씩 짝을 지어 촬영을 진행했고, 이제 경환 형과 하준 형의 차례였다.
바닥에 쓰러져야 했던 경환 형은 촬영 전 세상 다산 얼굴로 감독님을 우울하게 바라봤지만, 감독님은 자상하게 어느 지점에 어떻게 쓰러져야 할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어우, 나 같으면 저기 못 눕지.
언제나 가장 든든하고 멋있는 모습을 보여줬던 하준 형도 벌레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부디 이런 모습을 우리 솜뭉치들이 몰라야 할 텐데.
한편, 이번 촬영에서 가장 신기했던 건 세빈이의 연기 실력이었다.
이전 뮤비 촬영 때는 꽤 여러 번 NG를 내고 몇 번이나 같은 장면을 반복했었다.
그만큼 연기는 먹고 죽으려고 해도 못 할 것 같았던 우리 애들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하준 형이 중간은 했고, 세빈이가 제일 자연스러웠는데 오늘은 더했다.
안약 없이도 겁에 질려 우는 연기를 실감 나게 해서 쟤가 따로 연기 수업을 받는지 우진 형에게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그렇게 무사히 저녁 촬영분을 끝낸 우리는 숙소 앞에 스태프분들까지 다 같이 모여 고기 파티를 하며 내일 촬영까지 무사히 끝내자고 다독이고, 앨범 대박을 기원했다.
촬영과 저녁 식사까지 모두 끝난 후, 한자리에 모여 잘 준비를 마친 우리는 세빈이에게 어떻게 그렇게 금방 울 수 있는지 물었다.
“그냥 있었던 일을 떠올렸는데요?”
“응?”
여러 인원이 방을 나눠 써야 하다 보니 멤버 모두가 한 방에 몽땅 모인 우리는 다닥다닥 붙어있었지만, 다행히 선풍기 두 대로도 그렇게 덥진 않았다.
세빈이 대답에 우리가 금방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자, 나이답지 않은 쓴웃음을 지은 세빈이가 조금 더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우리 있었던 일들이요.”
“….”
세빈이 말에 형들도 나도 힘찬이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데뷔 전에는 데뷔할 수 있을까 하고 힘들었다.
바로 직전에는 함께 먹고 자면서 꿈을 키우던 동료가 배신하기도 했고.
겨우 데뷔하고 우리 팬을 만나서 벅차고 기뻤지만, 의도치 않은 사고도 있었다.
찬이는 지금도 가끔씩 그때의 소현 팀장님 얼굴이 떠올라 무섭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람의 악의가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 지도 경험했고, 덕분에 깁스까지 해야 했다.
포잉의 부름으로 눈을 떴던 그 날 새벽일은 살면서 두 번째로 크게 다가온 공포였다.
한 번의 생을 빼앗겼던 나로서는 죽음의 순간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지만, 멤버들은 그때처럼 공포에 질렸던 적이 없었다. 가뜩이나 어린 세빈이는 더 크게 다가왔을 터.
“우리 얼마나 대박 나려고 액땜을 이렇게 하냐.”
“내 말이. 이러다 막 세계 돌면서 공연도 하고, 빌딩 한 채씩 사고 그러는 거 아냐?”
“얘는 꿈이 큰 거야, 작은 거야….”
잠시간의 정적을 깬 건 여느 때처럼 하준 형이었고, 다른 멤버들도 소소하게 한마디씩 던지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리고 나는 이불 안에서 떨고 있었던 세빈이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 앞으로 뮤비는 숲에서는 찍지 말자고 하자. 벌레 때문에 죽겠어.”
“그러다 막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찍자고 하면 어떡해요.”
“어우 씨,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세빈이 손의 떨림도 사그라들었고, 세빈이를 살피던 다른 멤버들의 얼굴도 그제야 조금 편해졌다.
“얘들아, 늦었어. 얼른 자라.”
“네에….”
밤에 찍어야 할 씬들을 모두 촬영하느라 해가 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새벽까지 뛰어다녔던 우리였다.
밥 먹고 기절할 것처럼 굴던 우리가 계속 수다 떨며 시간을 보내자, 귀신같이 알고 찾아온 우진 형이 방의 불을 끄며 결국 한마디하고 나갔다.
“자자. 잘 자, 얘들아.”
“잘 자영.”
“좋은 꿈 꿔요.”
다들 다닥다닥 붙어있었던 탓에 내 배 위에 올라와 있던 포잉은 잠자리가 못내 불편했는지 다른 곳에서 자고 온다고 슬며시 나갔다.
조용해진 방 안, 고른 숨소리가 하나둘 느려지기 시작하면서 상담 선생님을 만났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어쩐지 익숙해지기 힘들 것 같은 경험이어서 멤버들도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하기는 조심스러워 혼자만 속에 담고 있었다.
한참 곡에 매달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팀장님의 부름으로 이동하면서 혼자만 불렀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전에 말했던 상담 선생님과의 면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팀장님의 소개로 만난 선생님은 차분한 인상을 주는 남자 선생님이었다.
소현 팀장님은 별다른 말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고 하셨다.
작은 회의실 정도의 방안에는 작은 테이블 하나와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긴 의자 하나, 그리고 푹신해 보이는 1인용 소파가 군데군데 놓여있었다.
선생님은 테이블 앞쪽에 앉아있었다.
문을 열자 바로 보이는 선생님. 잠시 멈춰 그쪽을 바라본 나는,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방안엘 들어갔다. 그리고 여러 의자 중 약간 거리가 떨어진 소파를 끌어다 마주 보고 앉았다.
가까이서 마주한 선생님의 인상은 조금 더 편안했고, 안경으로 반쯤 가려진 눈매는 유순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지환 군.”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인사는 정중했고 목소리는 부드러워서 호감이 갈 법도 했지만, 그냥 조금 마음 한쪽이 답답했다.
자신을 노찬영이라고 소개한 선생님은 본인을 소개하며 앞으로 어떤 시간을 가질지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하는 내내 유순한 듯 보였던 눈은 나를 떠나지 않았고, 본인의 말을 내가 듣고 있는지, 이해했는지를 중간중간 확인하기도 했다.
상담이라고 해서 조금 긴장이 됐다. 이전의 지환이는 어릴 때 경험했겠지만, 나는 아니었으니까.
알지 못하는 영역의 일이었기에 상담 시간 내내 이렇게 진행돼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동안 선생님은 날씨, 지금 하고 있는 일, 내가 좋아하는 것들 등을 물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싶었지만, 대뜸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난감해서 그냥 그렇게 몇 가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팀장님이 데리러 오자, 다음에 또 보자며 웃는 선생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방을 빠져나왔다.
“뭔가 마음에 안 들어?”
“아뇨, 그냥. 원래 상담이란 게 이런가 싶어서요.”
“뭐, 어때. 그냥 쉰다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나와도 돼.”
정말 한 시간 동안 농땡이 부리다 온 것 같아서 찝찝해하자, 소현 팀장님은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내 등을 토닥였다.
기분은 조금 이상했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애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