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32)화 (132/456)

132. 지금 널 찾아가고 있어(1)

최종 트랙 리스트를 건네받은 우리 얼굴에 각양각색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경환 형의 얼굴에는 약간의 아쉬움과 뿌듯함이 서려있었고, 나는 손이 조금 떨렸다.

고작 종이에 출력된 글자들일 뿐인데.

우리 앨범에 내가 직접 만든 곡이 들어있다는 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남이 만든 곡이 아닌 내가 만든 곡.

그것도 두 곡이나 들어있다는 사실에 종이를 쥔 손목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번에 진짜 너희 실력을 대중들한테 다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골랐어. 자신 있어?”

“자신 있어요!”

“최대한 다 털어 넣겠습니다.”

평소처럼 팀장님이 들어오실 거라고 생각했던 회의실에 박정균 대표님이 들어왔을 때, 멤버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티 나게 우왕좌왕하지는 않았다.

처음처럼 마냥 쪼그라들어 있지 않은 우리 애들 모습에 대표님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심지가 더 단단해진 모습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소문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앨범 발매하고 곧바로 정식 팬클럽 모집 시작할 거야. 그리고 너희 활동 끝나고 나면 창단식 할 거고. 앞으로 일정이 좀 빡빡하니까 조금만 고생하자.”

이때는 조금만 고생하자는 말처럼 정말 조금만 더 고생할 줄 알았지.

데뷔 때 앨범보다 더 죽어라 구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역시 대표님 말은 믿는 게 아니었어….

그 후로 우리들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연습하느라 부스에서 나오지 못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멤버들 모두가 하나같이 지난 설움을 곱씹으며, 우리도 당당히 개인 대기실 받을 만큼은 커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녹음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파트 녹음 시간이 아니더라도 전체적인 흐름을 알아야 하니 함께 있었다.

‘Question’ 때 직접 녹음이라는 걸 경험해보고서야 노래 한 곡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을 거쳐야 하는지 깨달았었다.

그 상황을 진두지휘하는 디렉팅은 특히 더 많은 것들을 알아야 해서, 아직은 내가 욕심낼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졸업식의 경우는 에단 선생님께 디렉을 맡겼고 믹싱은 회사 소속 전문가들이 직접 진행해 주셨다.

처음에는 디렉팅을 볼 자신이 없어 의견만 건네고 회사에 요청할 생각을 했었지만, 에단 선생님이나 하준 형이 경험을 해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직접 진행해보라고 다독여주셨다.

직접 곡의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 가는 역할을 맡게 되자 설레기도 했지만, 그 말만 듣고 내가 만들었던 곡의 녹음을 이끌어가다 탈진할 뻔하기도 했다.

왜 형들이 자기 작업실에 접이식 침대 놔두는지 알 것 같아….

“지환이는 세련되진 않았는데 감각이 있어.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간신히 1차 녹음을 끝낸 나는 반건조 오징어처럼 휴게실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눈만 꿈벅꿈벅 거리면서 머릿속에 떠다니는 온갖 소리들을 이리저리 조합해보느라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때, 휴게실에 들어온 영빈 형이 내 몰골을 보더니 웃으며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넌 솔직히 곡을 만든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래서 부르는 입장에서는 투박한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거든.”

“아, 뭔지 알 것 같기는 해요.”

“응. 근데 우리는 파트를 쪼개서 부르잖아. 그래서 어떤 특정 파트만 들었을 때는 투박한가 싶은데 전체로 들으면 괜찮단 말이지.”

“다음부터는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는 게 좋겠단 뜻이죠?”

“응. 근데 너무 거기에만 집중하지는 말고.”

늘 들고 다니던 텀블러 대신 캔 커피를 든 영빈 형이 다른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들은요?”

“준이는 에단 쌤이랑 할 얘기가 있다고 하고, 찬이, 세빈이는 제영 쌤한테. 경환이는 곧 여기로 올걸?”

영빈 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경환 형이 들어왔다.

“와우, 한치도 우리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경환이 형.”

“뭐야, 내 얘기 했어?”

“형 곧 여기 올 거 같다고 빈이 형이 말했거든요.”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던 경환 형도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녹다운됐다.

“다시는 더블 타이틀 하지 말자….”

물론 한 곡 한 곡 녹음할 때마다 거기에 정성을 쏟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타이틀곡이라는 이름표가 붙으면 어쩔 수 없이 더 많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해도 뭔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계속 다시를 외치고, 그게 반복되다 보면 몇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걸 두 배로 하려니 눈물이 절로….

“무대는 확실히 멋있겠더라. 찬이가 그렇게 이 악물고 덤비는 거 처음 봤어.”

“찬이랑 세빈이 시너지가 이렇게 클 줄 몰랐는데.”

둘 다 춤에 욕심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결과물을 실제로 눈으로 보게 됐을 때의 감상은 또 달랐다.

“우리 이번 앨범, 쪼금 기대되지 않아요?”

그동안 부정 탈까 봐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다.

주저하던 두 형님들도 내 눈빛을 보더니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녹음과 안무 연습, 다이어트의 절정을 찍었던 어느 날.

우리는 아침부터 이전에 ‘I'm OK’를 촬영했던 그 숲에 다시 서 있었다.

“어휴, 여기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난 올 것 같았는데?”

“벌레 생각하면 다시 오고 싶지 않았어….”

이전 ‘I'm OK’와 연결된 곡은 폭풍전야(暴風前夜)였다.

그리고 폭풍전야의 끝을 하준 형의 Confusion으로 받아내는 게 이번 앨범의 흐름이었다.

“감독님, 잘 부탁드립니다!”

“어이쿠, 나도 잘 부탁해요.”

이전에 한번 합을 맞춰봤던 감독님과 스태프분들은 다행히 우리에게 서글서글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사실 뮤직비디오 촬영에 제일 들뜬 건 멤버들이었다.

아직 날은 더웠고, 여기는 바다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

촬영이 진행되는 작은 섬 자체가 개인의 소유였고, 소유주가 대표님과 친분이 있는 분이셔서 첫 촬영 때와 이번 촬영 모두 어렵지 않게 장소를 섭외했다고 하셨다.

덕분에 여기에서 촬영하는 동안에는 스포 때문에 노심초사할 일도 없었고, 장소 섭외에 비용도 많이 절약했다고 팀장님이 좋아하셨다.

더군다나 섬 안쪽에는 섬 소유주가 별장으로 쓰는 건물이 있어서 다행히 텐트 속에서 벌레와 싸우며 잠들지 않아도 되었다.

그동안 연습과 녹음에 찌들었던 멤버들은 예쁜 풍경의 섬에서 시간 나면 물놀이를 할 거라고 부푼 마음을 안고 있었지만, 글쎄.

내 생각에는 다 같이 물놀이하는 건 무리고, 개인컷 촬영을 먼저 끝난 사람이나 물에 발을 담가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특히 제일 신나 하는 힘찬이… 음. NG 낼 거 생각하면 약간 막막하기도 하고.

팀장님은 섬에서 촬영이 진행되는 터라 넉넉하게 2박 3일 일정으로 잡았다고 하셨는데, 왕복 이동시간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넉넉하게 잡았다는 말은 순 거짓부렁이었어….

미리 도착해있던 스태프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배 타는 동안 멀미 때문에 고생한 희주 누나 대신 가희 누나가 의상을 챙겨주었다.

“얘들아, 영상 남겨야지!”

“아 참. 네네!”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할 솜뭉치들을 위해 영상을 남기기로 했다.

“둘, 셋!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여러분, 여기 어디게요!”

“1번! 휴가. 2번! 방송 스케줄. 3번! 뮤비 촬영!”

“에이, 그렇게 말하면 솜뭉치들이 당연히 다 알지.”

잔뜩 신난 힘찬이와 세빈이는 싱글벙글해서는 카메라를 향해 장난을 쳤다.

“이 영상이 공개됐을 때는 어차피 뮤비도 공개됐을 테니까 의상 보여도 되겠죠?”

“그럴걸? 팀장님한테 물어봐야 하나?”

“괜찮겠지 뭐!”

영빈 형과 준이 형도 대화를 주고받는데 회사가 아닌 다른 장소에 왔다는 것 때문인지 들뜬 게 눈에 보였다.

“아, C.I는 멀미를 해서 지금 잠깐 쉬고 있어요. 심한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요, 여러분.”

경환 형이 누적된 피로도 때문인지 평소보다 골골대더니 기어코 멀미로 앓아누웠다.

그래서 숙소에서 잠깐 쉬도록 했고 지금은 현장에 없었다. 혹시나 나중에 이 영상을 본 솜뭉치들이 걱정할까 싶어 준이 형이 덧붙였다.

저 다정함이 솜뭉치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걸, 우리 솜뭉치들은 알까….

날이 갈수록 뼈 때리는 솜씨가 수준급이 되어가는 하준 형의 모습에 우리가 얼마나 초췌해져 가는지 솜뭉치들도 진실을 알아야 할 텐데.

“여러분, 여기 조금 익숙하지 않아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죠?”

“저번 ‘Question’ 앨범 때 저희가 도망쳐 왔던 곳인데 기억나요?”

“이번에는 저희가 도망쳐야 했던 이유와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줄 건데요.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메이크업 받은 모습을 서로 가리키며 낄낄대기도 하고 폴짝폴짝 뛰기도 하던 세빈이랑 힘찬이는 간단하게 촬영이 끝나자 카메라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세빈아, 그거 아직 올리면 안 된다? 알지?”

“에이, 당연히 알죠.”

“조금 있다가 우리끼리 사진 찍어서 올리고 솜뭉치들 놀려주자!”

요새 들어 솜뭉치들이랑 서로 놀리는데 재미 붙인 힘찬이는 벌써부터 솜뭉치들을 골려줄 생각에 신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꾸 이상한 사진 찍는 건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는데….

* * *

그렇게 멤버들이 촬영에 열심히 온 힘을 쏟는 사이, 언래블의 공식 SNS에는 3분이 못 되는 짧은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어두운 실내에 희미한 실루엣만 보였고, 마이크를 톡톡 치는 것 같은 울림이 들리더니 테이프가 돌아가는 것 같은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화면이 조금 더 밝아지면서 높은 의자에 걸터앉은 지환이 단정한 옷차림을 한 채로 웃고 있었다.

한 손으로 마이크를 조심스럽게 쥐고 고개를 끄덕이자 어디선가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옅은 분홍색의 입술이 열렸다.

“나의 가장 화려한 시절을 함께한 그대가

가장 꿈같은 날에 내 곁을 떠나가네요.”

지금 30대들에게는 익숙한, 그리운 시절의 발라드였다.

“나를 가장 귀하게 바라보던 눈빛이

숨 쉬는 것보다 당연하게 내 삶을 차지했는데

이렇게 4월 내렸다던 그 눈처럼 흔적도 없어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던 목소리는 어느새 가슴이 아릿하게 만들던 옛사랑을 떠오르게 할 만큼 서글퍼졌다.

“그대가 있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는 걸

이렇게 지난 후에야 깨달아요.”

고작 10대의 소년이 부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감정이 절절해서, 이 사람이 지독한 이별을 겪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작은 방안 가득 온통 당신의 삶이 내 매일에 남아있는데

연약한 날갯짓이 안타까워 나비가 싫다던 당신이 없어요.”

그렇게 이 사람이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던 노래가 끝났고, 꿈에서 깨어나듯 눈을 두어 번 깜박인 영상 속의 지환은 조금 멋쩍은 듯 웃었다.

그렇게 다시 까맣게 암전된 화면 위로 원곡의 제목인 ‘이별’이라는 이름이 반짝이다 다시 하나의 글자를 이루었다.

‘Dear. 솜뭉치/ From. 환’

다음 앨범을 기다려주는 솜뭉치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적다며 지환이 내내 시무룩해서, 우진 형이 커버 송을 불러서 올려주는 것은 어떻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오늘 그 결과물이 언래블의 공식 SNS와 위캠에 업로드되었다.

내 가수의 앨범을 기다리던 솜뭉치들에게는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기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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