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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29)화 (129/456)

129. 열대야(1)

리허설을 무사히 끝내고 잠깐 쉬는 동안 하준은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피곤함을 달래고 있었다.

몸이 지친 게 아니라 생각할 것들이 많아서 정신이 지친 상태였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영빈이는 쪽잠이라도 잔다고 소파에 불쌍한 몰골로 구겨져 있었다. 그 옆에는 지 형 등판을 베개처럼 쓰고 있는 경환이 있었다.

“허, 왜 이렇게 불쌍하게 자고 있는 거야.”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푹신한 소파와 딱딱해도 온기가 감도는 형의 등판이 저 둘에게는 각자 잠자기 좋은 환경이었나 보다.

함께 무대를 할 다겸 씨와 지현 씨는 잠시 나갔다 온다고 각자 사라졌고, 동생 라인의 3명은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더니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석환이 형이 따라갔으니 괜찮겠지 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늘 무언가 사건 사고를 달고 다니는 지환이, 그냥 본인이 사고를 치는 힘찬이, 두 형을 말리기에는 역부족인 막내 세빈이라 일이 안 생기면 더 이상한 지경에 이르렀다.

“휴.”

불편한 듯 찡그린 영빈이와 경환이 자세를 좀 더 편하게 잡아주고 우진 형에게 연락해두었다.

오랜만에 연습생 시절의 인연들을 보고 싶어졌다.

리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리우가 같은 팀 동생들을 달고 찾아왔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

“우와, 진짜 하준 형이다!”

“실존 인물인 게 더 이상해!”

“니네 좀 가만히 안 있을래?”

“진짜 하준 형은 또 뭐야.”

“맨날 얘기 들어서 꼭 우리 형 같아요!”

리우 뒤에서 기웃거리던 빨간 머리와 파란 머리 두 명이 자신을 보자마자 반갑다고 주변을 맴도는데 힘찬이가 두 명인 것 같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너희 애들도 그렇고 우리 애들도 그렇고 저 나이 때 애들은 다 비슷한가 봐.”

“다른 애들은 어디 가고 너 혼자야?”

“동생들은 방송국 구경, 빈이랑 경환이는 자.”

“아, 아쉽다. 친해지고 싶었는데. 휴이가 환 씨 되게 잘생겼다고 막 자랑했단 말이에요.”

동생들이랑 온 이유가 우리 애들이랑 친해지고 싶어서였나 보다.

그룹과 그룹 사이에 서로 친한 멤버가 있으면 그룹끼리 친해지기도 하니까.

“어딨는지 물어볼까요?”

“아, 진짜요? 네네!”

“말 편하게 하세요! 우리 대장이랑 친구면 저희한테도 형님이죠!”

그나마 조금 한산한 구석이라 다행이었다.

사람 많은 데서 떠들기엔 얘네도 우리도 연차든 인기든 부족했으니까.

“얘네 팬분들 보고 있다네요. 조금 있으면 온대요.”

“저희가 갈게요!”

“형 쫌 이따 봐!”

“야! 늦지 말고 와!”

어찌나 기운 좋은지 뛰어가면서 외치는 말인데도 쩌렁쩌렁하다. 성량 하나는 끝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냥 저렇게 보내도 괜찮아?”

“어어. 그냥 둬도 돼. 뭐 어디 가서 주먹질하고 다니는 애들은 아니니까.”

“애들만 보냈다가 사고 치면 어떡하려고.”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애들이니까 괜찮아.”

구석진 복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준은 자신이 너무 멤버들을 끼고도는 건지, 그런 속박이 동생들에게 불편함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됐다.

“난 너무 걱정이 많은 건가. 애들끼리 두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 정도야? 어차피 우리랑 두어 살밖에 차이 안 나는 애들이잖아.”

리우도 하준도 이제는 그룹의 맏형이 되어 동생들을 이끌고 있지만, 막내였던 시절도 있었고 모든 게 불안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워낙 짧은 기간 동안 다사다난했더니 쉽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도 컸다.

“리우, 너 17살 때 연주 형이랑 싸우고 난리 친 거 생각 안 나?”

“야! 쪽팔리게 그 얘기를 왜 꺼내!”

“동생들 너무 닦달하지 말라는 거지, 뭐.”

“나 때에 비하면 쟤네는 천국이야, 뭐래.”

친구가 벌써부터 꼰대의 모습을 보이자 하준은 가벼운 웃음이 자꾸 입술 밖으로 비집고 나왔다.

이래서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하나 보다.

“너희는 별일 없지?”

“어. 너희가 유난히 일이 많은 거지, 우리야 뭐 보통이지. 너네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 우리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닌데. 다른 애들이랑은 자주 연락해?

아무리 친해도 그룹 일을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는 건 부담스러웠던 하준은 슬쩍 말머리를 돌렸고, 리우도 이해했다.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이야기들은 아니었으니까.

여러 회사를 거친 만큼 여러 지인들이 생겼다. 일부는 포기하고 현실로 돌아갔고 일부는 아직도 남아서 새까만 재가 된 가슴을 움켜쥐고 산다.

그리고 그중 일부만 이렇게 방송국 복도에라도 주저앉아 그 시절을 추억한다.

비록 주변에 누가 없는지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남들이 들을까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대다수였지만 이마저도 누군가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걔, 누구야. 그 지수 기억나?”

“지수? 그 소녀혁명에 걔?”

“응. 걔 배우 쪽으로 아예 전향한다더라.”

“거기 잘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사장이 자꾸 다른 데로 돌린다고 연기 필모 쌓더니 H&A랑 말 오간다더라고.”

“계약 기간 남아서 힘들 텐데.”

알고 지내던 다른 데뷔한 친구들의 이야기, 현실로 돌아간 친구들의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다 보니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야?”

“아, 지환인 거 같은데.”

“이야,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부 폰 들고 다녀?”

“대표님이 좀 자유분방하시잖아.”

“니네가 사고 안 치니까 그렇겠지. 나 처음 데뷔 조 짤 때 미친놈 하나가 애인이랑 못 헤어지네 어쩌네 지랄해서 난리도 아니었어.”

“와, 그 정도면 용자 아니냐? 그걸 회사가 그냥 둬?”

“당연히 그냥 안 두지. 걔가 원래 센터 예정이었는데 헤어졌다고 구라치고 몰래 연애하다 걸려서 연습생 잘렸지 뭐. 우리도 처음에는 폰 줬었는데 걔 때문에 다 뺏겼어.”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내용을 확인하니, 지환이가 빨리 와보라는 메시지가 있어서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야, 가봐야겠다. 애들이 무슨 일 있나 봐.”

“왜? 뭐라는데?”

“빨리 오래.”

굳어진 하준의 얼굴에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된 리우는 덩달아 얼굴이 굳었다.

언래블 애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 팀의 말썽꾸러기 두 명이 떠오른 탓이었다.

같이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빨리 오라는 말을 남기는 게 불안했다.

“전화해보는 게 낫지 않겠어?”

“주변에 누가 있을 줄 알고. 일단 같이 간 매니저 형한테 연락하면서 이동하자.”

석환 형에게 전화를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고, 걷는 발걸음은 점점 급해졌다.

전면이 유리로 된 1층에서 두리번거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환아! 찬이랑 세빈이는?”

“형 왔어? 아, 안녕하세요.”

“무슨 일인데 빨리 오라고 한 거야.”

“그게….”

보자마자 환하게 웃는 지환의 얼굴 어디에도 곤란함은 없었다.

사람 심장 떨리게 해놓고 무슨 일인가 싶어 묻자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더니 팔을 잡아끌었다.

코너를 살짝 돌자 유리 벽에 붙어서 손짓 몸짓하느라 정신이 없는 네 개의 뒤통수가 보였다.

“…?”

“그, 솜뭉치들이랑 블리분들이 리더 찾으셔서….”

“아, 낚였네.”

쭈뼛거리며 하준의 눈치를 보던 지환이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여기저기 구경하다 1층까지 내려왔는데, 다른 출입구 쪽에 있던 솜뭉치들을 발견한 세빈이가 유리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고.

그러다 솜뭉치들이 모이고 유리 벽 너머의 팬들과 몸짓과 발짓을 섞은 희한한 팬 서비스가 벌어졌다.

“그 솜뭉치들도 블리분들도 리더들을 찾으셔서….”

“석환이 형은 어디 갔어? 일단 인사부터 하자.”

“우아, 진짜 왔다!”

“여러분 봤죠! 우리가 부르면 온다니까?”

“히스 형이었으면 안 왔다!”

우리를 발견한 이 사고뭉치들은 밖에 팬들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텐데 신나서 방방 뛰고 팬들 앞에서 으쓱거리고 있었다.

그때, 하준의 핸드폰으로 석환 형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갑자기 우진 형에게 연락이 와서 자리를 잠시 비웠다고.

아무래도 아직 일을 배우는 입장이다 보니 온갖 일로 사방에 뛰어다니느라 석환 형은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그만큼 우진 형은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전보다 더 자주 멤버들의 일상과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고.

석환 형은 자신 대신에 멤버들 데리고 대기실로 복귀해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배우님들도 곧 도착할 거고, 영빈이나 경환이도 깨서 몸을 풀고 있다고 했다.

통화가 끝나고 아직 마냥 신나있는 네 개의 뒤통수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리우의 표정도 하준과 별만 다르지 않았다.

저 넷은 언제 친해진 건지 이미 어깨동무하고 낄낄대는 게 누가 보면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줄 알겠다 싶었다.

“화이 님이랑 단경 님이 리더들이 얼마 만에 오는지 내기하자고 그래서 그냥 빨리 오라고만 했어요. 형 많이 놀랐어요?”

“어휴, 또 사고 친 줄 알고 걱정했잖아, 인마.”

“에이, 제가 언제 사고 쳤다고 그러세요. 저만큼 얌전한 애가 어딨다고.”

눈치 보던 지환의 어깨를 토닥여준 하준은 별일 없다는 것만으로 만족했지만, 리우는 두 동생의 뒤로 가더니 둘 머리 위에 공평하게 꿀밤을 먹였다.

“으갹! 아프잖아!”

“와, 성격 더러운 거 봐라!”

“시끄러, 진짜 이게 무슨 창피야? 돌아가자, 블리들한테 인사해.”

“얘들아, 봤지? 우리 형들은 다 이래. 너희는 진짜 팔자 핀 거다!”

그 사이 서로 형들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한 건지 아무래도 오늘 숙소에 돌아가면 힘찬이를 털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솜뭉치들과 우리 애들은 두 눈이 동그래져서 그 광경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고, 블리라고 불리는 DCL의 팬들은 익숙한 관경인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블리들! 우리 갈게요! 빠잉….”

“안녀엉!”

다정한 눈으로 유리 벽 너머의 팬들을 바라보던 리우는 유리 벽에 입김을 불어 하트를 만들더니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동생들을 끌고 지나가던 리우가 하준의 어깨를 툭툭 치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다음에 다른 친구들도 함께 밥이라도 먹자는 신호였다.

그 모습에 피식 웃던 하준은 유리 벽 너머의 솜뭉치들을 애틋한 마음을 담아 바라보았다.

특별 무대라고 해도 갑자기 출연하게 된 이상 땜빵이라는 걸 팬들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고 달려와 응원해 준다.

이게 어떻게 보통의 마음으로 될 일일까.

리우가 했던 대로 유리 벽에 입김을 불어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린다.

고맙다고 보고 싶었다고.

그 모습을 본 솜뭉치들이 무어라 말하며 손에 쥐고 있던 음료 캔을 흔들었다.

이미 다 미적지근해졌을 텐데 아직까지 버리지 않고 쥐고 있다는 게 더 가슴 뭉클했다.

벽 하나를 두고 있지만 그 너머의 마음을 우리도 팬들도 서로 알았으면 좋겠다고, 하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웃으면서 솜뭉치들에게 손을 흔들던 하준은 뒤에서 마냥 싱글벙글한 동생들을 향해 말했다.

“장난질의 대가는 돌아가서 받으마.”

“헐? 이게 다 솜뭉치들을 위한…!”

“쉿. 힘찬아, 형을 놀래킨 대가는 받아야지.”

“난 아무 말 안 했어요.”

“세빈아, 공범은 원래 말을 아끼는 법이야.”

밖에 솜뭉치들을 여전히 다정하게 웃으면서 하나하나 눈을 맞추는 하준의 말이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지 못할 터.

하지만 울상이 된 멤버들의 모습에 지켜보던 솜뭉치들의 머리 위에 궁금증이 몽글몽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발자국 물러나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환이 핸드폰을 꺼내 유리 벽에 가져다 대었다.

“뭐해?”

“핸드폰 화면에 메시지 크게 띄우는 앱이 있어요. 그걸로 하고 싶은 말 적었죠.”

“그런 게 있으면 미리 말 좀 해주지!”

“너랑 세빈이 그러는 게 재밌어서 구경 좀 했지.”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지만 대답해 주지 않고 싱글벙글 웃기만 하는 지환이 모습에 그놈 등짝을 팡팡 두드려주었다.

“가자, 본무대 준비해야지.”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기실로 돌아가는 내내 하준도, 동생들도 아쉬운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그 자리에서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는 솜뭉치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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