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Sherlock(5)
저번에는 넓은 공간에 파티션 사이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특별 무대라고 함께 무대 할 배우분들과 개별 대기실을 받았다.
개별 대기실을 받은 멤버들은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들뜬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눈이 평소보다 1.5배씩은 더 커져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최다겸 배우님과 김지현 배우님이 우리를 보며 웃고 있었다.
“저희 멤버들이 원래 좀 부산스러워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다들 너무 귀여워요.”
“진짜 동생들 같아서 너무 좋은데요?”
하준 형이 부끄러웠는지 배우분들께 말을 건네자 두 분 다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대기실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니는 힘찬이 모습은 나도 부끄러운데 좋게 봐주시니 이거 참 다행….
“역시 진짜 학생들이 교복을 입으니까 느낌이 다르네.”
“오빠는 당연한 소릴 해.”
“야! 너도 마찬가지면서!”
“다겸 오빠가 방송에서는 맨날 젠틀한 척, 똑똑한 척하는데 사실 다 연기에요. 이 오빠 완전 허당.”
우리는 잘 모르는 드라마 현장의 일이나 배우분들의 일을 이것저것 얘기해 주시는 두 분의 활약에 세빈이는 가뜩이나 큰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더 커졌다.
“어휴, 요새 아이돌들은 다 너무 잘생겼어. 언래블도 나중에 연기할 생각 있어요?”
“저희는 지금 저희 것도 잘 못하는데요, 뭐….”
“언젠가 좋은 기회가 오면 도전해보고는 싶은데, 저는 제 한계를 잘 알아서요.”
연기 욕심은 없는지 묻는 질문에 다들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아무래도 서바이벌 프로그램 진행 당시 영상을 위캠에서 본 충격이 강하게 머리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아깝다, 나중에 기회 되면 같이 촬영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
“같이 촬영하다가 저희가 NG 몇 번 내면 생각이 달라지실 수도 있어요….”
다겸 배우님 말에 우리 중에 가장 거짓말 못 하고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티 나는 힘찬이가 풀이 죽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 모습에 한참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서포트 팀 인원들도, 배우님들도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다들 애써 웃음을 참으려 했다.
어깨가 축 내려간 우리 힘찬이 모습에 앞에서 대놓고 웃기가 미안했던 것 같았다.
“우리 찬이는 참 자기 자신을 잘 알아. 그치?”
“너한테는 그 말 듣고 싶지 않아!”
그래서 마음껏 웃으실 수 있도록 내가 이 한 몸 희생했다.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 터져 나왔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찬이 덕에 대기실 내부 분위기는 한결 더 훈훈해졌다.
“갑작스러워서 제대로 맞춰보지도 못했는데, 지금 연습 좀 할까요?”
“오빠랑 노래 연습은 조금 하긴 했는데 영 그래요. 우리 때문에 무대 망치면 어떡해.”
다겸 배우님이 슬며시 말을 꺼내자 지현 배우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맞장구를 쳤다.
안 그래도 동선을 맞춰보고 파트를 다시 점검하고 싶었던 우진 형은 반색하며 다 같이 연습해보자며 최대한 공간을 확보해 줬다.
“여기에서 다겸 님이랑 지현 님이 듀엣으로 나오고, 영빈 형이랑 제가….”
“누구 님 이러니까 너무 거리감 느껴진다. 효정 언니한테는 누나라고 한다면서요?”
“엇, 네. 누님이 그렇게 부르라고 허락해 주셔서요.”
“세영이 형한테도 형이라고 한다면서요?”
“네. 세영 형님이랑 민영 누님이랑 진우 형은 방송에서 만났는데 다들 너무 다정하게 잘해주셨어요.”
“와, 우리만 거리감 유지하는 거예요?”
“아뇨! 그게 아니고요!”
우리 애들이 워낙 예의 바르고 반듯하다 보니 어디 방송 한번 갈 때마다 같이 출연했던 출연진분들이나 스태프분들이 다들 친절하고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더군다나 워낙 활달한 찬이나 유난히 귀염받는 막내 세빈이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영빈 형이나 경환 형도 생각보다 연상의 형님들에게 꽤 예쁨을 받았다.
그런데 그게 언제 또 여기저기 소문이 돌았는지 다겸 배우님과 지현 배우님이 자기들에게만 거리 둔다며 멤버들에게 서운하다고 콕콕콕 찌르고 있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멤버들을 구하기 위해 재빨리 한 발 앞으로 나선 내가 허락만 해주시면 저희가 더 영광이라고 열심히 우리 애들의 무해함을 어필했다.
겨우 서로 호칭도, 말하는 것도 편하게 정리가 되자 다겸 배우님이 씩 웃는 걸 보니 왠지 작정하고 온 것 같았다.
“진우 걔가 원래 잘 안 돌아다니고 완전 집콕 타입인데 웬일로 SNS에 다른 사람 얘기도 쓰고 하나 했거든.”
“아, 진우 형이 저희 되게 좋게 봐주셔서요. 저희가 많이 의지하는 선배님들이랑도 친분이 있으시더라고요.”
와, 이 바닥 무섭다.
진짜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구나….
연습 전에 족보 정리를 끝낸 우리는 리허설 전까지 남은 시간은 모두 연습에 몰두했다.
“잠깐 한숨 돌리죠!”
다행히 두 배우분들도 동선을 금방 파악했고, 노래 연습도 많이 하셨다는 게 농담은 아니었는지 각자 파트가 넘어갈 때도 꽤 자연스러웠다.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
“길 알아?”
“에이, 제가 경환 형도 아니고.”
“같이 안 가도 괜찮아?”
“금방인데요, 뭐.”
처음 방송국에 왔던 날, 적응 못 하고 구석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달달달 떨던 경환 형이 화장실 가다 길을 잃었던 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원래도 형이 길을 좀 못 찾는 편이기는 한데 그날은 긴장해서 더 길을 헤맸던 것 같았다.
핸드폰도 안 들고 있었던 형을 구해준 것은 드라마국 스태프분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가면 거기까지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도 안 보이고 휑한 길에 한껏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넋이 나간 듯한 형을 봤다고.
더 재밌었던 건, 경환 형처럼 방송국에서 길을 잃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는 일이었다.
그때 스태프분은 경환 형을 무사히 배달해 주시면서 그렇게 한 번씩 헤매고 다니는 그룹들이 나중에 잘 되더라 하는 덕담도 남겨주셨었다.
우진 형을 달래놓고 화장실로 향하는 걸음이 빨라졌다.
후다닥 화장실 갔다가 포잉에게 연락을 해둘 생각이었기에 마음이 조급했다.
너무 긴 시간 연락을 안 하면 사서 걱정하는 우리 요정님이 전전긍긍할 게 뻔했으니까.
원래도 잠이 많다고 하긴 했는데 나랑 지내면서 마음 편히 잠들 시간이 줄었는지, 한 번씩 본인의 의지랑 다르게 잠에서 못 깨어나곤 했다.
억지로 움직이면 다음에 더 오래 피곤해하기에 함께 하지 못하는 날은 내가 틈틈이 메시지를 보내 무사함을 알리기로 했다.
오늘 방송국 온다는 건 알고 있으니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포잉이 전생의 우리 엄마보다 나에게 더 많은 잔소리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빈칸에 들어가 문을 닫고, 메신저를 열어보니 포잉이 보내온 이모티콘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얘 이거 결제는 어떻게 한 거지?
빵실빵실하고 생기다 만 병아린지 토낀지 알 수 없는 덩어리가 바닥을 기면서 울고 있는데, 왜 이러는 거지?
포잉의 이모티콘을 접한 나에겐 혼돈만 남았다.
[포잉,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난 무사해.]
메시지 앞에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아 잠시 기다려봤지만, 여전히 미확인을 나타내는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잠들어 있는 걸까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뭐 큰일이야 있을까 싶어 일단은 당장 해야 할 일부터 해결하기로 복잡한 머릿속을 툭툭 털어냈다.
빨리 돌아가서 연습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손에 묻은 물기를 휴지로 대충 닦았다.
평소처럼 옷에 문질러 닦을 뻔했는데, 다행히 실행 직전에 내 옷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의상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오늘은 제발 무사히 넘어가자고 중얼거렸다.
“어, 언래블이죠? 안녕하세요! DCL 휴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언래블 환입니다!”
화장실과 대기실이 멀지 않아 방심했던 사이 올해 봄쯤 데뷔한 다른 그룹의 멤버와 마주쳤다.
당황해서 복도가 쩌렁쩌렁할 만큼 큰 목소리로 인사해버렸다.
부디, 제발 대기실에 우리 애들이 못 들었기를.
“에이, 선배는 무슨. 어차피 몇 달 차이도 안 나요. 저희 리더 형이 언래블이랑 거기 리더님 얘기 많이 해요. 엄청 곡 잘 만진다고.”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DCL 선배님들 이번 신곡 잘 듣고 있어요.”
실제로도 간혹 댄스 연습에도 쓰는 곡이었기에, 곡 제목을 몇 개 같이 이야기하며 정말 좋았다고 말씀드렸다.
데뷔가 비슷하면 보통 친하게 지내거나 라이벌 구도로 짜인다는데 DCL 그룹은 우리보다 세 달 정도 먼저 데뷔한 그룹이었다.
멤버들이 다들 성격이 개성 넘치고 활달하다는 얘기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는데, 오늘 처음 직접 인사를 나누고 나니 어떤 이야기였는지 알 수 있었다.
찬이랑 세빈이를 반반 섞은 듯한 느낌을 주는 분이었다.
또래를 만나서 반가웠던 걸까, 나에게 잠시 이런저런 얘길 하던 선배님은 찾으러 온 DCL의 리더님에게 잡혀갔다.
정말 목덜미를 낚아채서 끌고 갈 줄은 몰랐는데….
끌려가는 쪽도, 끌고 가는 쪽도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손을 흔들어주는 데 당혹스러워서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했다.
멍청한 얼굴로 어? 어? 하다 보니 코너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만 남았다.
“환아, 왜 이렇게 늦었어? 무슨 일 있었어?”
“그, DCL이라고 선배님들 있잖아요.”
“아, 어어. 거기 사람들 만났어?”
“그, 휴이님을 만났는데 거기 리더… 그….”
“리우?”
“아, 맞아요. 그분이 휴이님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가셨어요.”
평소에 회사에서, 혹은 숙소에서 말 안 듣는 멤버들을 응징할 때 가끔 준이 형이 그러는 모습을 본 적은 있는데 밖에서는 최대한 이미지를 관리했기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당당하니까 멋있어 보이잖아?
“…어휴, 그놈 성질머리는 거참.”
“아, 아는 분이에요?”
잠시 우진 형과 스태프들을 확인한 준이 형은 영빈 형이 제논 엔터 오기 전 회사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후에 영빈 형을 통해 준이 형이랑도 친해져서 가끔 만나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고.
“아하…. 휴이 님이 그러는데 리우 님이 형이랑 우리 칭찬 많이 해주셨대요.”
“누가 우리 칭찬을 해?”
화장실 간다고 나가서 늦게 들어온 내가 준이 형이랑 구석에서 쑥덕거리고 있으니 영빈 형과 세빈이가 쫓아왔다.
그리고 돌아온 날 확인한 우진 형이 다가오며 왜 이렇게 늦었냐며 걱정했다고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최근 있었던 우리 그룹의 대부분 사건 사고가 나랑 연관되어 있다 보니 걱정됐던 모양이었다.
“아, 지환이가 복도에서 DCL 분들 마주쳤는데 우리 칭찬해 주셨다네요.”
“아아. 거기가 너희랑 데뷔가 얼추 비슷하지. 이번에는 활동 시기 안 겹칠 텐데, 이렇게도 만나네.”
다행히 우진 형은 별말 없이 리허설 순서가 얼마 안 남았으니 준비하라는 말을 남기고 석환이 형과 함께 대기실을 잠시 빠져나갔다.
“어땠어?”
“네? 뭐가요?”
곧 있을 무대 생각에 잡생각을 모두 버린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준이 형을 바라보자, 조금 떨어져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 배우님들까지 조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보통 이 나이 때 애들은 또래들 보면 막 반가워하고 그러지 않아?”
“보통 그런데 저희 애가….”
“저 완전 멀쩡하거든요? 준이 형은 내 편을 들어야지!”
“넌 너무 내향적이야. 밖에도 좋은 게 참 많단다, 얘야.”
“이상한 컨셉 잡지 말고!”
두 배우님들과 언제 쿵짝이 잘 맞는 사이가 된 건지 두 맏형은 배우님들과 나를 앞에 두고 내 흉을 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뭔가 우리 애들이 내 기억 속의 멋진 모습과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서 이것도 내 탓인가 하고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우리 애들, 이상한 데서 팔불출이 돼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