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Sherlock(4)
한바탕 난리를 치는 사이 세빈이랑 힘찬이가 씻고 나왔고, 씻으러 간다는 핑계로 간신히 경환 형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 형은 우리랑 똑같은 걸 먹는데 왜 형 혼자 점점 힘이 더 세지는 걸까.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좀처럼 근육이 잘 붙지 않는 몸을 바라봤더니 기분만 더 심란해졌다.
기초 체력을 위해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었고, 댄스 연습 시간에도 몸이 부서져라 추는데 복근은커녕 16살 난 막둥이랑 체격이 비슷한 것 같아서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포기하는 게 편하려나….
가뜩이나 몸 움직이는 게 싫은데 눈에 띄는 효과도 없으니 더 하기 싫었다.
키라도 쑥쑥 자랐으면 좋겠다.
경환 형같이 단단한 몸은 못될 것 같으니 하준 형이나 영빈 형처럼 키 크고 날렵한 몸이라도 되고 싶었다.
적어도 이전 삶에서의 키만큼은 크고 싶은데.
왜 늘 화장실에서 거울 볼 때는 평소보다 내 얼굴이 더 괜찮아 보이는지, 내 키는 언제나 클런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씻고 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내가 나오자 머리가 덜 마른 세빈이가 또 러그에 누워있어서 한숨을 푹 쉬며 끌어다 앉혔다.
“세빈아, 그러다 러그에 곰팡이 핀다니까. 너 머리 이렇게 잘 안 말리고 막 다니면 힘찬이 머리처럼 된다?”
“야! 거기서 내가 왜 나와!”
“아, 그건 좀….”
“희주 누나랑 가희 누나가 니 머릿결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거 생각하면 넌 양심이 좀 없는 듯.”
거의 일주일 만에 이전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우리는 서로 눈만 마주쳐도 그냥 피식거리고 웃었다.
이 악물고 그놈들 이겨보려고 했더니, 정작 그놈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일 때문에 망해버렸다.
그 꼴을 보고 나니 무언가 허탈해졌다.
그렇다고 꽉 조여둔 마음의 끈을 풀 생각은 아니었지만, 조금이지만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특히 일주일 내내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던 세빈이랑 힘찬이가 한결 풀어져서 다행이었다.
“아까 제영 쌤이 뭐래?”
푹 퍼져있는 둘을 겨우 일으켜 세우고 수건을 하나씩 던져준 후 세빈이 손에 드라이기도 쥐여주었다.
뚱한 표정으로 무어라 구시렁거리는 힘찬이는 일단 내버려 두고 세빈이가 휘적거리는 손으로 머리를 말리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쌤이… 찬이 형이랑 저랑 이번 타이틀곡 들어보고 둘 중 뭐라도 좋으니 1벌스 안무를 구성해보라고 했어요.”
“1절 다? 힘들지 않겠어?”
“네, 그… 기존 안무들 참고해도 좋다고, 그중에 한 동작이라도 건지면 좋은 거니까 일단 해보래요.”
“너무 맨땅에 헤딩 아냐?”
“생각보다 그렇게 막 막무가내는 아냐.”
“그래?”
투덜거리며 세빈이와 내 대화를 듣고 있던 찬이가 조금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애당초 진짜 벌스 하나를 우리가 다 완벽하게 새로운 것들로 채워오길 바라시는 게 아니니까. 흐름을 보자는 것 같더라.”
“어후, 난 춤은 정말 모르겠다.”
“난 곡 쓰는 게 더 어려워 보이던데?”
제 일도 어렵지만 자기가 못하는 일은 더 대단해 보이는 게 사람 마음인가 보다.
우리 대화를 들으며 바닥에 녹아 없어질 것처럼 흐물대던 경환 형이 한마디 툭 던졌다.
“그냥 쉬운 게 없어.”
“그게 맞는 듯.”
“아, 뼈 맞았어….”
시시덕거리던 우리는 준이 형이 나오자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바닥에 철퍼덕 누워버렸다.
“뭐야, 왜 다 불가사리 마냥 바닥에 붙어있는데.”
“형 얼굴을 보니까 갑자기 긴장이 쭉 풀리면서 뼈가 흐물흐물해졌어요.”
“그게 왜 내 탓이야.”
“형이 평소에 하도 우리 뼈 때리니까 그렇죠.”
투덜투덜 구시렁거리는 우리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 우리 참 리더 민하준 님 다웠다.
하준 형은 시큰둥한 얼굴로 등판과 바닥이 착 달라붙은 경환 형을 발로 툭 밀어서 거북이 마냥 뒤집어놨다.
“아, 왜 나한테만 그래!”
“니가 제일 커서.”
“경환 형이 한 덩치 하지. 나는 왜 안 크지?”
“다 컸나 보지.”
“인성 보소? 지금 저주 내리냐?”
거울 보고하던 신세 한탄을 다시 꺼내서 중얼거리다 힘찬이의 한마디에 발끈한 나는 결국 이 새끼가! 하는 외침과 함께 쿠션을 던졌다.
퍽 하는 타격음이 찰지기도 하구나.
“그러게 왜 사람 예민한 걸로 놀려, 찬이가 잘못했네.”
“헐. 맞은 건 난데 왜 나한테 뭐라 함?”
“신체적인 약점으로 놀리는 건 뒤통수 깨져도 인정이야, 인마.”
입이 댓 발은 더 튀어나온 것 같은 힘찬이를 최대한 멀리 발로 밀어버리고 넉넉해진 러그 위를 만끽했다.
“너희는 젓가락 들 힘도 없을 만큼 기운을 빼야 얌전히 자는구나.”
“예를 들면 새벽 세 시까지 구른다거나?”
“내가 꼭 팀장님한테 건의하마.”
오랜만에 정말 시답잖은 이야기들로 떠들고 있자니, 투덜대는 누구도, 낄낄거리고 있는 누구도, 얼굴은 이번 주 중 제일 편안해 보였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이제 자라.”
“으, 뭔가 아쉽다.”
“안돼.”
“아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지금 먹으면 못 잔다.”
“….”
하준 형은 하나둘 멤버들을 일으켜 세우다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는 힘찬이 말을 듣자마자 칼같이 잘라냈다.
세상 뻔한 내 새끼….
그렇게 오늘도 숙소에는 작은 평화가 유지되었고, 먼저 잠든 포잉을 품에 껴안은 나는 모처럼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신을 겨우 부여잡았더니 희주 누나가 나한테 교복을 내밀고 있어서 무심결에 받아들었다.
“어…?”
“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기계적으로 내미는 옷을 받아서 입던 나는 그제야 오늘 컨셉은 교복이라는 걸 깨달았다.
“후, 긴장 좀 풀렸다고 정신을 못 차리네요.”
“이제는 정신 좀 들고?”
“네…. 세빈이랑 경환 형은 거의 자고 있네요?”
우리 애들의 이런 모습을 솜뭉치들이 보면 기겁할 텐데 싶을 만큼 몰골들이 아주 가관이었다.
졸고 있는 멤버들을 붙잡고 옷을 입히는 석환 형은 벌써 몇 분째 소리를 지르고 있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경환아! 그거, 야! 하준아, 세빈이 좀 잡아봐. 쟤 저러다 넘어진다!”
“괜찮아요. 지금은 반쯤은 깨 있어서 넘어지진 않아요.”
“반만 깨 있으면 안 되지!”
바로 방송국으로 가나 했는데 의상이 회사로 도착해서 회사로 먼저 왔던 게 간신히 떠올랐다.
특별 무대인 만큼 드라마에서 입었던 하복을 직접 입고 무대를 하기로 했었다.
급하게 진행된 만큼 그쪽에서도 우리 애들 체형에 맞는 교복을 찾아서 보내느라 고생했을 게 눈에 훤했다.
“지환아, 앞으로 힘찬이 머리 감고 나오면 오일 바르나 안 바르나 확인 좀 해줘. 케어받으러 갈 거긴 한데, 평소에도 신경 좀 쓰라니까 말을 안 듣는다.”
“네, 최선을 다해볼게요.”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건 하준 형이랑 힘찬이었다.
경환 형이랑 세빈이야 평소에도 워낙 못 일어나서 그러려니 했는데 영빈 형이 나랑 비슷한 상태인 건 또 의외였다.
힘찬이가 두 눈이 초롱초롱한 게 굉장히 신기한 것만큼이나.
“지환아, 근데 우리 사진은 효정 누님이랑 찍었잖아, 근데 왜 무대는 지현 씨랑 해?”
“그거 드라마 내용 때문에 지금 말하면 스포야.”
“안돼! 나 그거 챙겨본단 말이야. 말하지 마.”
“들었지?”
앞으로 전개와 연관이 있는 내용이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말할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겨우 단장을 끝낸 우리를 차곡차곡 차에 실은 우진 형과 석환 형의 손에 이끌려 험난한 출근길에 올랐다.
“엇, 솜뭉치들 있다?”
“어제 급하게 공지 올렸는데 꽤 많이 신청해 줬다고 하더라.”
원래 제논 엔터의 레이즈가 오늘 무대에 설 예정이었지만, 회사가 폭파되기 직전이라 외부 활동이 올 스톱되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 자리에 졸업식 특별 무대가 들어가는 거고.
그건 그건데 바로 전날 오후에 공지했는데도 이렇게 많은 솜뭉치들이 찾아와 준 건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우리를 부르는 솜뭉치들 목소리에 눈이 번쩍 떠진 건지 세빈이랑 힘찬이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같이 가야지!”
“빨리 와요, 준이 형!”
아직 졸음을 다 떨구지 못한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내리자, 후끈한 공기와 함께 더운 날에도 우리 때문에 밖에서 고생하는 솜뭉치들이 눈에 보였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엄청 덥죠?”
“더 빨리 못 알려줘서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양손을 모아 사과하자, 되려 오늘 착장을 칭찬해 주고 더 씩씩하게 인사해 주는 우리 솜뭉치들 모습에 가슴이 찡해졌다.
우리 솜뭉치들은 어떻게 이렇게 착한 사람들만 모였지?
“아냐, 얘들아! 오늘 교복 너무 예쁘다!”
“무대 열심히 응원할게!”
“세빈아, 여기 봐줘!”
출근길이라고 해도 사실 방송국으로 들어가는 직선의 길을 따라 각 아이돌의 팬들이 줄밖에 주르륵 서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햇볕을 피할 마땅한 공간도 없었고, 좁은 공간에 여러 사람이 모여있다 보니 더더욱 힘들어 보였다.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환하게 웃는 것뿐이라 솜뭉치들 앞에서 예쁘게 찍어달라며 얼굴 가득 미소를 담아 인사를 건넸다.
그때, 석환 형이 뒤에서 애타게 우리를 불렀다.
“얘들아, 이거!”
“아, 맞다! 솜뭉치들, 이거 마셔요!”
“우리가 급하게 오느라 많이 못 챙겼어요, 미안해!”
급하게 공지를 올린 만큼 찾아와 준 팬들에게 시원한 음료수라도 나눠주라는 실장님의 지령이 있었다.
반쯤 졸면서 들은 터라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정윤 실장님이 챙겨줬다는 것들은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석환 형의 부름에 준이 형이랑 경환 형이 잽싸게 다가가 음료수가 가득 든 봉투를 건네받았다.
석환 형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봉투를 나눠 받은 멤버들은 솜뭉치들에게 무언가 줄 수 있다는 게 기뻤는지 이미지 관리고 뭐고 전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각양각색의 음료수 캔에는 언래블이라는 단어가 멋들어지게 적혀있는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아까워서 못 마실 것 같아!”
“고마워, 얘들아!”
하나하나 건네주는 동안 솜뭉치들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다른 가수의 팬들에게도 아낌없이 모두 건넸다.
다행히 뻘쭘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있어도 기분 나쁜 기색은 없었다.
이 정도면 다른 팬들 사이에서도 우리 평판이 나쁜 건 아닌 걸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이 자리에 제논 엔터 소속 가수를 응원하는 팬들이 있었다면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을 테지만, 다행히 음료수를 모두 나눠줄 때까지 평화로운 분위기가 지속됐다.
“저희 이제 갈게요! 조금 이따가 봐요!”
“솜뭉치들 사랑해!”
“우리가 더 사랑해!”
“기다릴게!”
평소에 그렇게나 멋있는 모습만 보이고 싶다던 힘찬이와 세빈이는 오늘은 이미지는 버렸는지 잔뜩 신난 멍뭉이처럼 활달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졸려서 눈도 못 뜨던 영빈 형은 언제 졸았냐는 듯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솜뭉치들 가까이 다가가 한 명, 한 명 시선을 맞추며 웃고 있었다.
하준 형이 뛰어다니는 힘찬이와 세빈이를 진정시키려다 포기하고 한숨을 폭 내쉬자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맑은 웃음소리를 내는 솜뭉치들이 있었다.
그리고 경환 형과 함께 음료수를 나눠주며 와줘서 고맙다고, 무대 기대해 달라고 말하는 동안 몇 번이나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솜뭉치들이 있었다.
그 모든 모습이 너무 반짝거려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마치 우리와 솜뭉치들을 은빛 빛무리가 감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모처럼의 음악방송 무대에 한껏 신난 우리는 마지막으로 솜뭉치들 앞에서 다 같이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인사를 건넸고, 평소보다 배는 더 가벼운 걸음으로 안으로 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