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Shorlock(3)
“자, 얘들아. 너희는 저기에 신경 쓸 필요 없어. 이제 다음 앨범 나올 거에 신경 써야지.”
“음…. 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진정되지 않자, 우진 형이 나서서 멤버들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나도, 우리 애들도 자기 자리에 대한 확신이 없다 보니 주변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았다.
“데뷔하고 바로 꽃길 쫙~ 까진 아니더라도 다른 그룹들처럼 방송활동하고 앨범 작업하고 그러면 될 줄 알았는데.”
“우린 처음부터 너무 뭐가 많았지?”
“그게 다 다음 앨범 대박 나려고 그런 거예요!”
“그래, 그게 다 액땜인가 보다.”
한두 마디씩 던지며 서로를 진정시킨 우리는 제논 엔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 우리 앞으로도 달려야 할 길이 구만리인데 남의 사정 생각해 줄 틈이 어디 있어.
더군다나 친한 그룹도 아니고 적인데.
“그럼 이제 팀장님이 이야기 좀 해도 될까?”
“넵!”
그때까지 우리가 진정되기를 지켜보고 있던 팀장님이 힘찬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우리를 바라봤다.
“찬이랑 세빈이, 제영 쌤한테 지금 바로 가봐.”
“네? 저희 왜요?”
“최근에 잘못한 거 없는데!”
제영 쌤에게 가보라는 말을 듣자마자 긴장부터 하는 두 아이들 모습에 소현 팀장님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너희 평소에 얼마나 제영 쌤한테 혼나면 이러는 거야? 연습 시간이 부족해?”
“아뇨! 그냥… 더 신경 쓸게요!”
“얼른 가봐, 이것들아.”
회의실 밖으로 두 막내들을 내쫓은 팀장님은 우진 형에게 눈짓했고, 우진 형은 둘을 데리고 댄스 연습실로 향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영빈 형이 한마디 툭 뱉었다.
“애기들 이번에 안무에 참여시키려고 그러시는 거죠?”
“맞아. 저번에 자체 제작돌이라고 방송에서 언급된 것도 있고 너희도 열심히 하니까 회사도 그쪽으로 밀어보려고.”
영빈 형의 말에 긍정하며 씩 웃던 팀장님은 영빈 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는 듯 팔을 뻗었지만, 안타깝게도 영빈 형이 팀장님보다 20센티는 더 컸다.
“크흠, 어째 키가 더 큰 것 같다, 영빈이.”
“…기분 탓일걸요?”
애써 영빈 형의 어깨를 아무렇지 않은 척 두드리던 팀장님의 두 볼이 조금 붉어졌지만 우리는 모두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힘찬이가 여기에 없어서 참 다행이다….
“빈이도 요새 가사 쓰는 걸 다른 분들한테 배우고 있다고 들었어. 너희 셋이야 계속 곡 만든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는 것도 알고 있고.”
“….”
어색한 침묵이 회의실 안에 내려앉았다.
한참 우리가 독기를 품고 연습에 매진했던 건, 더 이상 남들 사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남들 사정’에는 회사의 입장도 들어가 있던 터라, 이 자리에 없는 두 명, 세빈이와 힘찬이가 없는 자리를 만든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회사에 실망해도 괜찮아, 얘들아. 회사도 너희도 알다시피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너희에게 해로운 건 하지 않아. 이건 내가 보증할게.”
“믿어요. 팀장님이 그동안 어떻게 애쓰셨는지 저희도 알아요.”
최대한 평이한 어조로 말하는 팀장님의 얼굴이 마냥 밝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해주는 것 자체가 차라리 조금은 속 시원했다.
“그러니까 이번 앨범은 더 힘내서 대박 내보자. 내 새끼들 소고기 회식 한 번은 해야지.”
“전 돼지고기도 좋은데!”
“법카 내밀면서 마음대로 먹어! 하는 게 이 팀장님 로망이라 그런다!”
한결 부드럽게 풀린 분위기에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늘해졌던 가슴에 다시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세빈이랑 힘찬이가 아직 많이 힘들 거야. 나보단 너희가 더 친숙할 거고. 혹시라도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줘.”
“옙. 걱정 마세요, 팀장님.”
“저희야 뭐 늘 수다가 일상이니까.”
“그래, 서로 많이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게 정말 중요해. 아주 사소한 거라도 꼭 서로 대화로 풀고. 어휴, 나도 나이 먹었나. 왜 점점 잔소리만 늘지.”
처음 연습생 생활을 할 때부터 늘 소현 팀장님이 모든 연습생들에게 강조했던 것들이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라는 것이었다.
누가 같은 팀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서로 경쟁은 하더라도 서먹한 사이가 되지 말라는 의도였던 것 같았다.
물론 그때의 ‘나’는 이해하지 못한 말들이었지만.
“자, 그럼 일단 각자 연습 가고 경환이는 잠깐 남아.”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작업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보컬 트레이닝 룸으로 돌아갔다.
‘곡 안 만들고?’
‘응. 지금은 곡보다 내 목소리 먼저 다듬어야 할 것 같아.’
‘흐응…. 그럼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음.’
‘숙소 가서 하자, 포잉도 힘들 텐데 조금 쉬어야지.’
총총거리며 뒤를 쫓던 포잉을 위해 잠시 멈춰 서서 팔을 내밀자 폴짝 뛰어올라 팔을 딛고 머리에 올라섰다.
‘안 시끄럽겠어? 숙소 가서 자도 되는데.’
‘괜찮으니까 끝나면 깨우셈.’
처음과 달리 항상 옆에 붙어있는 포잉의 모습이 내심 안심이 되었지만,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다.
방송이 많지 않은 우리 입장에서는 연습에 쏟는 시간이 제일 많았고, 그나마 곡을 만든다고 작업실에 앉아있는 시간이 그 나머지 시간을 차지했다.
하지만 작업실에서 곡에 욕심을 내는 동안 곡 작업을 하지 않는 멤버들은 노래와 춤을 연습하거나 다른 악기를 배우고, 외국어 공부에 더 시간을 쏟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 조급해졌다.
영빈 형은 피아노에 조금 더 시간을 많이 쏟는 것 같았다. 간혹 경환 형이 영빈 형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빈이는 보컬과 일본어에 부쩍 관심이 많아져서 대부분의 연습 시간을 두 가지를 익히는 데 쓰고 있었다.
힘찬이는 일본어를 배운다는 세빈이 말에 혹해서 같이 레슨을 받고 있는 것 같았는데, 잘 늘지 않는다고 자기는 역시 춤이 제일 좋다고 했었다.
하지만 시영 쌤 말로는 둘 모두 노래가 많이 늘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적어도 프로필에 보컬로 되어 있는 내가 춤이 특기인 세빈이나 힘찬이보다 노래를 못한다는 말을 듣는 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스탯은 꾸준히 연습만 해도 조금씩이지만 올라가고 있었고, 숫자가 조금씩 커지는 만큼 노래에 조금씩 보정이 들어가는 것까지는 여태까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멤버들보다 내가 실력을 올리기에 조금 더 편한 상황인 거고, 그만큼 더 잘해야 했다.
그리고 솔직히 지고 싶지 않았다.
더 잘하고 싶고, 리드 보컬이라는 이름보다 메인보컬이라는 이름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점점 더 노래하고 곡을 만드는 이 모든 것들에 욕심이 생겨서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도 했다.
처음엔 우리 애들 잘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였는데.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잡다한 생각을 털어내 버리고, 연습실 가는 동안 이번에 선택된 타이틀에 대해 생각했다.
타이틀로 골라진 두 곡의 멜로디. 하나는 무겁고 거친 사운드였고, 다른 하나는 통통 튀는 느낌의 빠른 곡이었다.
데뷔 앨범의 노래는 서글픈 느낌의 멜로디였고, 여태껏 주로 불러온 노래가 발라드였기에 익숙하지 않은 톤의 발성을 미리 연습하고 싶었다.
“환이 왔어?”
“시영 쌤, 안녕하세요!”
“타이틀 나왔다며?”
“엇, 들으셨어요?”
연습실에 가는 길에 만난 보컬 트레이너 시영 쌤을 만났다.
안무를 담당하는 제영 쌤이 활기차고 카리스마 있는 편이라면, 시영 쌤은 부드럽게 몰아치는 편이었다.
웃으면서 더 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것 같아서 하준 형이 생각난다고 해야 할까….
최근 연습 중에 잘 안되던 부분들과 함께 몇 가지 고민을 함께 이야기했더니, 평소보다 눈웃음이 더 짙어졌다.
어, 이거 위험….
“우리 환이가 드디어 더 진지하게 마음을 먹었구나. 선생님이 전심전력으로 도울게.”
“네?”
“기특한 녀석, 넌 기본이 탄탄하니까 금방 늘 거야.”
“선생님…?”
“가자, 환아. 오늘 한번 불태워볼까?”
“제 말 안 듣고 계시죠…?”
그렇게 선생님에게 끌려간 나는 득음하다 피를 토한다는 게 어떤 건지 간접 체험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확실히 선생님에게 피드백 받으면서 연습하는 게 좋은데, 좋은 거 아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호흡이 딸리는 지점에서는 끝부분 발음을 뭉개는 버릇이 들었다며 혼이 나고, 혼이 났다.
가끔은 곡에 따라 끝부분을 살짝 흐리는 식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그건 곡 분위기에 따른 거고 나처럼 굴면 안 된다고.
혹독한 훈련의 시간이 지나고 10시가 되자 우진 형이 멤버들을 죄다 불러 모았다.
“오늘은 이만 숙소 가서 쉬어, 얘들아.”
“네? 왜요?”
그동안 연습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느라 새벽까지 있어도 지켜보던 우진 형이었는데 갑자기 복귀하라고 하니 멤버들이 형을 보는 눈이 동그래졌다.
“전에 졸업식 OST, 지금 우리 팀이랑 한번 무대 서기로 했었잖아. 그거 내일 할 거야.”
“에? 무산된 거 아니었어요?”
“아냐, 그냥 그동안 시끄러워서 미뤄진 것뿐이야.”
정식 무대가 아닌 이벤트 무대 같은 개념이었지만, 음악방송 무대를 몇 번 서보지 못한 우리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조금 들뜨는 이야기였다.
방송국에서도 망둥이 일 때문에 괜히 역풍 맞을까 봐 잠시 미뤄두었던 것들을 이제 조금씩 다시 풀어가는 것 같다고.
아예 데미갓이나 제논 엔터가 한바탕 난리가 나서 그쪽 연예인들은 한동안 몸을 사릴 테고, 그러다 보니 이번 주 음방 무대도 펑크가 났다고.
급하게 무대를 메우려던 하던 PD 하나가 원래 계획되어 있었던 우리와 드라마 팀의 무대를 떠올리고 회사에 급하게 연락했다고 했다.
땜빵 무대면 어떤가, 무대를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쁜데.
“배우님들 시간이 어떻게 됐나 보네요?”
“다행이지. 만약에 두 분 시간이 안 됐으면 곤란할 뻔했어.”
“오늘 일찍 자야겠네!”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복귀해서 푹 쉬고 일찍 일어나야 해.”
낮에 사고 때문에 초췌하던 우진 형의 얼굴도 시간이 지나서인지 평소처럼 푸근하게 변했다.
한 주 조금 무리했다고 11시 전에 도착한 숙소가 조금 낯설었다.
평소처럼 제일 굼뜬 세빈이와 힘찬이를 씻으라고 등 떠밀어 보내고, 둘이 씻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뭔가, 폭풍이 지나간 거 같아.”
“지나가고 있는 중 아니고 지나간 거 맞겠지?”
“에헤이, 왜 불안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제 끝났겠죠.”
하준 형이 이걸로 정말 그들과의 악연을 털어낸 게 맞는지 불안한 듯 중얼거리자, 경환 형이 하준 형의 입을 막았다.
“다 끝났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하아… 아니, 좀 실감이 안 나서.”
“걔네랑 악연이 좀 길잖아, 우리가.”
씁쓸하게 웃는 영빈 형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진즉 데뷔했어야 할 두 사람이 망둥이와 개미핥기의 수작 때문에 데뷔조에서 탈락한 그 순간. 그들과 우리의 악연은 그때부터였으니까.
두 형들의 악연은 나보다 더 길고 끔찍했으리라.
“아까 찬이가 그랬잖아요. 권선징악. 지들이 뿌린 대로 거두는 거죠. 이제 우리는 잘 될 일만 남았어요.”
두 형님들의 근심 걱정을 덜어주려 부러 더 씩씩하게 말하자, 갑자기 뒤에서 경환 형이 온몸으로 나를 깔고 뭉갰다.
“으악! 형! 무거워!”
“쪼마난 게 기특한 소리 해서 이 형이 할 말이 없잖아. 그래서 응징이야.”
“그게 무슨 논리에요!”
“무논리?”
경환 형 아래서 찌그러진 내가 두 맏형들에게 애타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지만 왠지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왜들 이러는데!
“네가 더 형처럼 굴면 우리가 머쓱하잖아, 지환아.”
“맞아, 넌 조금 더 동생 같아질 필요가 있어.”
“폭력 반대!”
“폭력이라니, 애정이 듬뿍 담긴 포옹으로 치자.”
“이게 무슨 포옹이야!”
내가 두 번 다시 이 인간들을 형 대접 하나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