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방백(2)
콩나물이 문제가 아니었다.
고기 다듬는 건 못할 것 같아서 준이 형이랑 야채를 다듬으라고 시켜놨더니 옆에서 준이 형이 환장하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려왔다.
“찬아, 그걸 그렇게…. 아니, 칼을 그렇게 잡으면 안 돼!”
“이케? 아냐? 형?”
스태프들은 풉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바빴고, 우진이 형은 힘찬이를 오래 봐 온 터라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되려 석환이 형이 안절부절못해서 당장 달려 나갈 것 같은 얼굴로 우진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 준이 형이 환장하는 걸 못 본척했던 나는 고기 손질이 다 되고 나서야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있었는데, 음. 모르는 게 나을 뻔했다.
“찬아, 저기 떡 있지? 저거 씻어서 물에 담가놔 줄래?”
“응!”
“내 새끼, 대답은 참 잘하지.”
자기도 직접 무언가 음식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건지 간단한 심부름을 더 좋아했다.
양파와 대파를 썰어달라고 했는데, 고기 밑에 깔아야 할 대파가 짓눌려져 있었다.
양파는 초심자가 썰기 힘들 거라 준이 형이 한다고 해서 그렇구나 했는데.
“하, 하하. 대파를 다져놨네….”
“어슷썰기 하라고 알려줬는데 칼이 잘 안 든다고. 응, 그렇대….”
같은 칼로 양파를 썰어본 하준 형은 할 말이 많지만 차마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치, 카메라 앞에서 욕하면 안 되지.
크게 어슷썰기로 잘라둘 생각이었던 대파는 뭉개져서 쓰기 힘들 것 같았다. 준이 형이 쓸쓸한 뒷모습으로 대파를 다시 가지러 가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양념장은 어떻게 만들어?”
“고추장, 고춧가루, 설탕, 간장이 1:1 비율로 들어가면 돼요.”
“생각보다 쉽네?”
“네. 그래서 제가 가끔 누나한테 만들어 주고 그랬어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을 아는 하준 형은 기특하다는 얼굴로 내 머리를 헝클었다.
사실 원래 지환이는 너무 어렸을 때고, 지금 나는 솔직히 내 부모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괜찮았다.
하지만 대략적인 것들을 아는 멤버들은 내 앞에서 가족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던 나로서는 그런 배려가 고마웠다.
찬이 어머님이 김치와 반찬을 잔뜩 챙겨주셨을 때도 엄마 생각나서 울컥했었으니까.
커다란 웍을 꺼내 콩나물과 준이 형이 다시 정리해 준 야채를 밑에 깔자 그새 찬이가 옆에 붙어서 구경하고 있었다.
“우와, 엄청 많은데?”
“음식은 모자란 것보단 많은 게 낫지.”
“찬아, 감자 껍질 벗길 수 있어?”
“아, 나 그건 할 수 있어.”
감자 칼도 잘못하면 손이 베이기 때문에 조금 걱정됐지만, 자신만만한 찬이 모습에 감자 4개를 껍질 벗겨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저것 넣으면 고기가 조금 부족해도 배는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오, 우리 찬이한테 감자 껍질 벗기는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
“이건 많이 해봤어.”
해맑은 우리 찬이 목소리에 준이 형도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늘 저렇게 밝고 활기찬 모습을 보여줘서 덕분에 우리가 고된 연습생 생활도 잘 버티고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감자를 조금 얇게 잘라 약간의 물과 함께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시간 내에 익히기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전자레인지로 익히고 같이 끓이면서 양념만 스며들게 할 생각이었다.
넉넉히 하면 스태프분들께도 맛은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커다란 웍 가득 야채를 쌓고, 전자레인지로 설익힌 감자를 넣고 고기를 얹었다.
이것만 해도 10인분은 넘을 것 같았지만, 우리 애들 먹는 걸 보면 이 정도는 금방이지.
넉넉하게 만든 양념장을 붓고 약한 불로 바꿔서 볶기 시작하자 금방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오오… 그럴듯해.”
“준이 형, 콩나물국 끓일 줄 알아요?”
“아니. 잘 몰라.”
“하하, 네….”
집안일 엄청 잘하게 생긴 얼굴로 당당하게 못 한다고 말하는 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조리 방법을 알려주고 옆 팀을 기웃거리는 찬이를 불렀다.
“찬아, 준이 형 도와줘. 옆 팀 괴롭히지 말고.”
“안 괴롭혔거든?”
“그건 네 생각이고.”
입이 댓발은 나온 상태로 툴툴거리던 찬이는 금방 준이 형 옆에 가서 자잘한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아니, 준이 형이 내가 알려준 대로 찬이를 부리고 있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
어떻게든 가르쳐보려는 노력 같은데 조금 있다 한번 봐야겠다.
군침 도는 냄새와 함께 잘 익어가고 있는 콩불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확인한 나는 슬그머니 옆에 온 세빈이 머리를 톡톡 건드려주었다.
“잘 돼가?”
“히스 형이 전 아무것도 손대지 말래요.”
“뭘 했길래.”
우리는 방송에서는 활동명을 부르기로 미리 이야기를 끝냈다.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이름은 그룹명과 활동명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자기 이름을 언급하며 별거 안 했다는 얼굴로 세빈이가 어깨를 으쓱하자, 옆에서 간장 불고기 냄새를 풍기던 영빈 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양념장 섞으라고 줬더니 엎어버렸어.”
“응? 왜요?”
“그걸 알겠냐. 칼은 위험해서 당면 씻어서 불리라고 했더니 다 부러트려 놓고.”
경환 형이 웃으면서 세빈이가 한 실수들을 읊었다.
목덜미가 붉어진 세빈이가 내 뒤로 숨자, 찬이는 그걸 또 놓치지 않고 놀리고 있었다.
“네가 지금 남 비웃을 처지야?”
“맞아.”
금방 준이 형한테 끌려가서 혼났지만.
정말 이대로 방송이 돼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날뛰는 멤버들 모습에 난 그저 웃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콩불이나 볶아야지.
“10분 남았습니다! 정리해 주세요!”
어차피 예쁘게 무언가 하는 건 내 손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여러 번의 검증을 거쳐 배웠던 터라, 나는 테이블에 웍 채로 놓고 각자 덜어 먹는 걸 택했다.
“찬아, 즉석밥 돌려놔!”
“하고 있어!”
밥 먹는 건 누구보다 빠른 우리 찬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써 전자레인지 앞에 있었다.
저 행동력이 왜 평소에는 안 나오는 거지?
간이 센 콩불과 약간 심심하게 한 콩나물국을 내려놓고 앞접시로 쓸만한 것들을 하준 형에게 챙겨달라고 말한 뒤 옆 팀에 다가갔다.
“다했어요?”
“거의. 나 얘네랑은 밥 못하겠어….”
영빈 형이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경환 형은 불고기를 접시에 담으면서 자기는 그래도 세빈이보다 낫다고 항변하고 있었다.
“C.I는… 그래, 그럴듯한 모양을 내는 건 하더라. 그런 거라도 도와달라고 하겠는데.”
영빈 형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서 세빈이가 그릇들을 죄다 꺼내서 늘어놓고 살펴보고 있었다.
“세빈아, 뭐해?”
“앞접시로 어떤 게 예쁠지 고민하고 있어요!”
해맑게 웃으면서 왜 간장 종지를 들어, 야, 인마.
“평소에 형들이 건져 먹으라고 앞에 놔주는 그릇 있지? 그거랑 제일 비슷한 걸로 가져와.”
“아, 네!”
“형, 밥 돌렸어요?”
“아, 밥 돌려야 된다.”
애들 뒤를 쫓아다니느라 음식에 집중하지 못했는지 혼이 쏙 빠진 듯한 영빈 형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불고기를 슬쩍 떠먹었다.
“켁!”
“?!”
“왜 이렇게 짜?”
“짜다고?”
국물만 슬쩍 떠먹었는데 소금물을 삼킨 것 같은 맛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게 뭐야!
“아까까지 괜찮았는데?”
전자레인지에 즉석밥을 넣고 달려온 영빈 형은 내가 내민 수저를 받아 한입 먹더니 나랑 같은 꼴이 되었다.
“5분 남았습니다!”
“아까 설탕 넣고… 세빈아, 아까 어떤 거 넣었어?”
“이거요. 이거 아니에요?”
야채 손질한다고 두 형님이 자리를 비우면서 세빈이한테 설탕 두 수저를 더 넣으라고 했는데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세빈이 손바닥 위에 곱게 놓은 병은 소금이었다.
소금과 설탕은 생긴 알갱이가 다른데 도대체 왜 그걸 구분 못 하는 거야….
“모르겠으면 먹어봤어야지, 세빈아.”
허망하게 불고기와 소금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영빈 형은 조용히 감독님을 불렀다.
“감독님, 저희가 진 게 확실한 것 같은데 시간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이거 어떻게 수습해서 먹어야….”
“그 정도예요? 아예 못 먹을?”
“네. 어떻게든 수습해서 먹어야 할 거 같은데 지금은 못 먹는 거예요.”
평소에도 음식 남기는 걸 싫어하던 영빈 형은 눈앞의 불고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으음. 그럼 뒷정리는 히스 팀이 하는 걸로 하고 일단 수습을 해볼까요?”
“감사합니다!”
자신이 덤벙거린 탓에 졌다는 걸 아는지 세빈이는 풀이 죽어 있었고, 지금이라도 조금 정리해야 한다며 경환 형은 우리 팀이 쓴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랑 히스 형이 수습해볼 테니까 일단 세빈이는 저기 가서 앉아있어.”
뜻밖의 새로운 미션이 생긴 나는 영빈 형과 함께 기존에 짜디짠 국물을 절반 정도 버려버리고 새로 물을 부었다.
그 상태로 끓이며 요리당을 조금 더 넣고 간장으로 간을 맞추니 얼추 먹을만한 상태가 되었다.
세빈이가 손가락만 하게 부러트려 놓은 당면들이 다 불어버렸지만, 못 먹을 수준은 아니었다.
준이 형은 그사이 콩불과 콩나물을 조금 덜어 세빈이랑 찬이한테 스태프들에게 한입씩 드리고 오라고 시키고 있었고, 경환 형은 널려있던 도구들 정리를 끝냈다.
“밥 먹자.”
“잘 먹겠습니다!”
“맛있겠다.”
“고생했어!”
각자 자리 잡고 선 멤버들에게 준이 형이 외치자 다들 감사 인사와 함께 약간 식어버린 즉석밥을 하나씩 들었다.
“다음부턴 더 조심해서 챙길게요!”
“요리 학원을 다닐까? 나도 잘해보고 싶은데.”
“그건 나중에 해. 지금은 다른 게 더 바쁘잖아.”
“아, 진짜 배고팠어요. 음식 냄새만 맡고 있으려니.”
시무룩해 하던 세빈이가 스태프들의 위로와 형들이 그릇에 쌓아준 고기에 기운을 차리고 씩씩하게 외쳤다.
다행히 어느 정도 수습된 불고기도 멤버들은 맛있게 먹었다.
우리 애들이 먹을 거에 예민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평소에 안 하던 거 해보니까 어땠어?”
“재밌긴 했는데 자꾸 결과가 안 좋으니까 조금 속상해요.”
“다음에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
준이 형이 열심히 그릇을 비우고 있던 세빈이와 찬이에게 넌지시 묻자 둘 다 재밌다는 반응이었다.
준이 형 시선이 경환 형에게 돌아가자 경환 형은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배달 잘 되는 나라에 살아서 다행이야.”
“그게 뭐야!”
“사실 C.I형 말이 정답 아냐?”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다들 웃느라 바빴고 질문했던 하준 형만 이마를 짚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뒷정리 안 해서 좋네요.”
“맞아. 밥하는 것보다 그게 더 힘든 것 같아.”
“찬이 너는 밥도 안 하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엉망이 된 조리대를 바라본 내가 솔직하게 청소 안 해서 좋다고 말하자 찬이는 같이 묻어가려다 영빈 형의 지적에 툴툴거렸다.
“그래도 재밌었다!”
“난 이거 어떻게 나올지 심히 걱정되는데.”
우당탕 흘러간 시간이 사실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옆 팀에서는 어떻게 됐는지, 자신이 음식에 신경 쓰는 사이 멤버들이 뭘 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난다.
“저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
“응, 해봐요.”
콩불이 마음에 들었는지 젓가락을 들고 오신 감독님에게 나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저희 애들, 편집 잘 부탁드려요….”
내 말에 조금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감독님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석환이 형은 입을 떡 벌리고 우진 형에게 무언가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우진 형은 익숙한 듯 해탈한 듯 그저 웃고 있었다.
결과만 좋으면 됐지, 뭐.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