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방백(1)
거실에서 노닥거리던 우리는 컨디션을 회복한다는 핑계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각자 침대로 돌아갔다.
어설프게 상황은 마무리되었고, 다시 이야기를 꺼내도 결국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서 각자 마음에 묻어두기로 했을 뿐이었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서로를 한 번씩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동생들은 동생들대로, 형들은 형들대로 오늘 밤은 생각이 많은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이기에, 상황의 깊은 밑바닥까지 까뒤집을 수 없었던 우리가 택한 방법이었다.
훗날 우리가 스스로의 마음을 조금 더 솔직히 말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그때는 더 솔직하게 분노하고 앞장서 움직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눌러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코미디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꿈 정도는 꿀 수 있잖아?
차라리 지금 이런 모습들이 소설 속 지문이라면, 그래서 속 시원하게 악인들이 전부 죗값을 치르는 사이다 빵빵한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판타지 소설처럼 요정이 함께하고 있지만 이런 부분은 너무 현실적이라 조금 웃어버렸다.
‘?’
지금도 내 눈앞에는 요정님이 그루밍을 하다 말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지금이 더 가혹한가 덜 가혹한가를 생각하고 있었어.’
‘또 이상한 생각하는구만.’
이전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하다 보면, 가끔은 과거가 그립기도 했고 가끔은 지금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구와도 이야기하기 어려운, 모든 것들을 함께 하고 있는 포잉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에 그냥 평소처럼 웃으면서 흘려보냈다.
싸움이라기보다 그냥 모두가 서러웠을 일이었다.
그저 받아들이는 과정 중에 생긴 생각의 차이가 도드라졌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전까지의 관계는 어차피 직접 살아온 삶이 아니니 묻었다.
사고 이후부터 만들어낸 것들이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앞으로 더 얼마나 많은 다툼과 오해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일을 돌이켜보면 앞으로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포잉을 끌어당겨 안았다.
문득, 맥주 한 잔이 간절해졌다.
언젠가는 멤버들과 오늘 일을 이야기하며 ‘우리 그때는 그랬지’ 하면서 웃을 수 있기를.
그때쯤이면 다들 맥주 정도는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있지 않을까.
그런 수많은 상념이 무겁게 내려앉던 밤이 지나고 드디어 소란이 지나간 새로운 하루가 되었다.
그동안 너무 잘 먹은 탓에 아침은 해독 주스 한 잔씩 마시는 것으로 대처하고, 마중 온 석환이 형과 인사도 잘 나누고 회사에 도착했다.
“어제 형이 한 말 기억하지? 다들 잊어버리면 안 된다.”
“어제? 무슨 얘기요?”
“아, 너 잘 때야. ”
하준 형이 경환이 형, 찬이, 세빈이를 잠시 세워놓고 말하는 내용에 갸웃하고 영빈 형에게 묻자, 잠든 사이 준이 형이 회사 사람들한테 쓸데없이 날 세우지 말라고 했다고.
틀린 말은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힘찬이 등에 매달렸다.
“억! 야! 무거워!”
“그짓말하지 마. 이 중에 세빈이 다음으로 가벼운 게 난데.”
“세빈이에 비해 가벼운 거지 네가 가볍단 건 아니거든?”
“아이고, 어지럽다아~.”
힘을 쭉 뺀 채로 힘찬이 등에 매달린 나는 결국 그 상태로 질질 끌리면서 회의실까지 배달되었다.
그러자 세빈이는 내 흉내를 낸다며 경환이 형에 매달렸는데, 형은 세빈이를 잡아서 어부바 해버렸고 세빈이는 신난다고 좋아했다.
형들도 해보라고 재밌다고 말하는 세빈이에게 차마 욕할 수 없었던 두 맏형은 결국 우리를 외면하고 빠른 걸음으로 먼저 가버렸다.
걱정 어린 시선들로 우리를 보던 회사 분들도 왁자지껄한 우리 모습에 조금 안도한 듯 보였다.
“병아리들, 잘 먹고 잘 쉬었니?”
“넵. 어제는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리고 미안하다, 얘들아.”
어제는 애써 냉정하게 말했던 팀장님이, 무례했다고 사과하는 우리에게 조금 더 많은 것들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되레 당황해서 허둥지둥거리는 경환 형과 세빈이 덕분에 분위기는 금방 부들부들해졌다. 팀장님이 오늘은 GIVE 앱과 언래블 스토리 촬영, 개인 연습만 하게 될 거라고 스케줄을 확인해 주셨다.
내일부터는 그동안 쏟아진 인터뷰 요청 중 골라둔 곳과 인터뷰도 해야 한다고.
GIVE 앱 촬영은 회사에서 미리 고지해 준 덕에 시간이 있어 급하지 않았다.
언래블 스토리 촬영을 위해 섭외해둔 조리학원으로 이동하기 전, 서포트 팀의 스타일리스트 누님들이 달려와 촬영에 적합한 몰골로 바꿔주셨다.
“어휴, 진짜. 이렇게 착한 애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저희 괜찮아요.”
의상을 챙겨주고 메이크업을 해주는 동안, 희주 누나는 우리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평소보다 더 반짝반짝한 모습으로 바꿔주었다.
“기죽지 마. 그런 거 다 무시하고 발아래 두자. 너희가 더 잘난 거 보여주면 돼.”
“옙!”
가희 누나는 굳은 얼굴로 희미한 자국만 남은 내 이마의 흉터를 다시 한번 앞머리로 잘 감춰주고는 옷매무새를 점검해 주었다.
그래도 우리 편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속이 든든해지는 것 같았다.
조리학원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다 세빈이랑 눈이 마주쳤다.
베시시 웃는 저 얼굴을 마주했더니 어제의 소동이 다시 머릿속에 생생해져 사고뭉치 3명이 직접 요리에 손을 대는 게 불안했다.
큰 줄기의 진행은 하준 형이, 그 외에 대사는 대본 없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면 된다고 전달받았다.
촬영팀분들은 먼저 와서 카메라를 세팅해두었고, 우리는 다시 한번 희주 누나와 가희 누나의 점검을 받고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섰다.
“그, 전부터 느낀 건데… 우리 대형 좀 바꾸면 안 돼요?”
“왜?”
“나 끝으로 빼줘요….”
“그냥 해, 인마.”
영빈 형 옆에 있으면 가뜩이나 작은 키가 더 작아 보여서 슬펐지만, 영빈 형만큼 큰 하준 형은 이런 내 마음을 몰라주었다.
감독님으로부터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듣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우진 형과 석환 형 모두 현장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언래블 여러분.”
“안녕하세요!”
한목소리로 활기차게 인사한 우리들 맞은편에서 소리 죽여 웃는 스태프분들 덕분에 분위기는 조금 더 화기애애해졌다.
“오늘은 첫 번째 방송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먹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다들 요리는 조금 하시나요?”
“저희 팀에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걸 만드는 건 3명뿐이에요.”
“3명이면 나쁘지 않네요. 두 팀으로 나눠서 1시간 안에 요리를 완성해야 합니다.”
1시간이면 꽤 넉넉하다는 생각을 하며 팀을 어떻게 나누게 될지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렸다.
힘찬이랑 세빈이가 혹시라도 한 팀이 되면 그 팀은 망하는 게 예정된 거나 다름없을 텐데.
“두 팀 중에 우승한 팀은 맛있게 음식을 먹고 바로 퇴근하시면 되고요, 진 팀은 남아서 전체 청소와 설거지를 하시면 됩니다.”
“헐. 음식 하면서 나온 거랑 먹은 거랑 전부 다요?”
평소에도 6인분 설거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 멤버들은 절대로 질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지며 투지를 불태웠다.
밥을 하는 것보다 설거지와 뒤처리가 더 힘들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도 뒷정리는 사양이었기에 적이 될 멤버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최대한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보통 밥을 하는 사람은 뒷정리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숙소에서도 안 하던 뒷정리였다.
“아! 제가 앞치마를 준비했어요!”
세빈이는 어제저녁 준비를 할 때 입었던 앞치마를 언제 또 빨아둔 건지, 빳빳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앞치마 6개를 우진 형에게 건네받아 멤버들에게 내밀었다.
앞치마까지 예쁘게 입고 나니 다들 훤칠한 게 어디 고급 음식점 직원이나 카페 바리스타들 같았다.
입만 안 열면 딱일 텐데.
“그러면 지금부터 각 팀의 주장을 호명하겠습니다. 히스랑 환 나와주세요!”
“역시 제일 밥 다운 밥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장이네요.”
“그래도 밥은 먹을 수 있겠다. 다행이야.”
자기들끼리 신나서 조잘거리는 멤버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잘 정돈된 금속 빛의 조리대가 눈에 들어왔다.
괜히 마음이 들떠서 조리대를 쓰담쓰담하던 나는 주장 호명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뭐야, 우리보다 여기 장소가 더 마음에 드나 봐.”
“환이는 언래블보다 음식이 더 중요한 거야?”
“얘기가 왜 또 그렇게 되는데.”
우리 애들은 그런 상황을 또 그냥 넘겨주는 위인들이 아니었지.
초롱초롱한 눈을 하며 장난치는 찬이랑 경환 형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주고 영빈 형과 마주하자 형의 눈가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첫사랑이라도 만난 줄 알았다.”
“제 첫사랑은 고기고 두 번째는 노래였어요. 몰랐구나?”
“와, 솜뭉치가 첫 번째가 아니라니!”
“지방방송 안 꺼?!”
낄낄대는 찬이 목소리에 준이 형이 결국 한마디 했다.
다행이다, 평소의 우리 애들이라.
“팀원은 각 조 주장이 제비뽑기를 해서 모셔갈 건데요, 팀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제발 세빈이랑 같은 팀 안 되게 해주세요.”
“저도 찬이 형이랑 같은 팀 안 되고 싶어요!”
간절한 두 사고뭉치의 기도가 통했는지 영빈 형, 세빈이, 경환 형이 한 팀이 되었고, 나, 준이 형, 찬이가 팀이 되었다.
“자, 제한 시간은 모두 알고 있죠? 한 끼를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게 이번 주제입니다! 재료는 앞에 있는 것들을 사용해서 자유롭게 만들어 주세요. 시작!”
한 시간이라기에 여유로울 줄 알았더니, 메뉴 선정, 재료 수집, 음식 조리까지 모두 해서 한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같은 팀원들을 돌아보자 무한한 신뢰가 담긴 눈빛이 되돌아왔다.
뭐야, 그렇게 보지 마…. 부담스러워, 얘들아.
“일단 찬이 가서 대파, 양파, 마늘, 양념장 챙겨와.”
“뭐 만들 건데?”
“뭘 하든 그건 기본 재료니까.”
“응!”
내 새끼, 씩씩하게 대답도 잘하는구나.
“준이 형,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음, 축하 파티엔 역시 고기지?”
“콩불 좋아해요?”
“그게 뭐야?”
“모르면 그냥 먹읍시다.”
결국 메뉴는 내 마음대로 정했다.
양념도 간단하고 금방 조리되고 냄새도 그럴싸한 고기 요리가 최고지.
양념할 것들을 챙겨오라고 했더니 고추장, 간장, 소금, 설탕을 품에 안고 온 찬이 모습이 귀여워서, 잘했다고 칭찬해 줬더니 아주 날아갈 기세였다.
그렇다고 그거 들고 춤추진 말고!
“콩나물 불고기, 줄여서 콩불을 할 거야. 지금부터 말하는 거 잘 챙겨와야 된다.”
“오, 좋아!”
“그것만 먹으면 심심하니까 콩나물국도 끓일 거야. 그러니까 찬이는 콩나물 많이 가져와서 씻고 있어.”
“넵, 쉪!”
어디서 본 건지 경례까지 붙이고 뛰어가는 찬이 모습에 웃고 있던 준이 형을 불러 세웠다.
지금 웃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이 형님이?
“형은 돼지고기 중에 비계 적고 얇게 썰린 걸로 골라와 주세요. 대패 삼겹살 있으면 그것도 좀 같이 가져오면 좋고.”
“알았어, 그리고?”
찬이가 들고 온 양념을 훑어본 나는 빠진 재료를 추가로 가져다 달라고 요청하고 아직 많이 남아있는 재료에 의아한 얼굴로 옆 팀을 바라봤다.
“아직도 메뉴 고민하고 있으면 어떡해!”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은걸.”
“다 익지도 않은 걸 먹을 거야? 빨리 정해서 뭐라도 만들어!”
아직도 뭘 만드네 마네 하고 있는 태평한 옆 팀 모습에 환장하는 나.
그리고 다른 팀에 관심 준다고 날 끌고 가는 우리 팀원들.
이 장면 되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하하….
정말 이렇게 촬영해도 괜찮은 걸까…?
하필이면 내가 가진 스킬들은 전부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거나 친분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것들 뿐이라 지금 상황에서는 사용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 두면 옆 팀은 굶게 생겼으니 양을 더 넉넉히 하기로 결심한 나는 재료를 더 챙겨오다 콩나물을 씻는 찬이 모습에 결국 소리 지르고 말았다.
“머리를 다 뜯어버리면 어떡해!”
“이상하게 생겼잖아. 이거 그냥 먹어?”
“콩나물국 안 먹어봤냐!”
누나가 매우 보고 싶어졌다. 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