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밤 편지(6)
희미한 탄 냄새와 소란스러운 느낌.
그리고….
‘계약자야! 일어나!’
다급한 포잉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불?!”
침대에서 주방으로 뛰쳐나가는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불? 왜? 누가 가영 형처럼 잠든 걸까? 애들은 무사하겠지? 포잉은 요정이니까 다치지 않겠지?
급하게 방문을 열어젖히자 눈에 보이는 모습은 뭔지 모를 것들로 불꽃놀이를 하고 있는 세빈이와 생수병을 급히 뜯어서 세빈이에게 던지는 경환이 형.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쌈 야채를 챙기다 나랑 눈이 마주친 힘찬이었다.
“그거 다시 씻어서 가져와. 어딜 그냥 놓으려고.”
“어, 깼어?”
“네. 그, 큼…. 세빈아, 집게 내려놓고 불… 저거 뭐야, 탄다! 불 꺼!”
탄 냄새가 더 심해져서 사방을 확인했더니, 양은 냄비 하나가 안쓰러운 덜컹거림과 함께 탄내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아, 밥!”
“불만 꺼! 손대지 말고!”
겁도 없이 냄비를 집으려는 힘찬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다 가라앉아 버렸다.
“찬이랑 세빈이 저기 앉아있어. 위험해.”
“나도 할 수 있어!”
“알아, 할 수 있는 거. 근데 지금은 위험하니까 잠깐만….”
“잘 모르니까 알려주고 가르쳐 줘. 우리도 잘 할 수 있단 말이야.”
정신이 없어서 손으로 휘휘 저으며 머리를 부여잡자 울 것 같은 힘찬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억울했던 지 입술을 꾹 깨문 힘찬이 눈이 빨개져 있었다.
“너 입술 물어뜯지 말랬지, 또 피나잖아.”
주먹을 꾹 말아 쥔 힘찬이 손을 세빈이가 잡고 있는 모습이 묘했다.
툭하면 둘이 티격태격하느라 바빴는데 오늘은 둘이 한 팀인가 보다.
억지로 눈물을 참는 듯한 찬이 모습에 한숨을 삼킨 나는 휴지를 뜯어 찬이 입술을 꾹 눌렀다.
“따거….”
“알아. 따가우라고 한 거야.”
“나쁜 놈.”
“이제 알았냐.”
조금만 불안해지면 무언가를 물어뜯는 힘찬이었다. 빨대를 압수했더니 이제는 자기 입술을 물어뜯는다.
손톱 물어뜯을 때도 있었는데, 볼 때마다 멤버들이 잔소리하고 계속 크림 발라놨더니 덜해지긴 했다.
오늘 너무 스펙터클해. 아 지친다….
내가 지친 얼굴로 벽에 기대 주저앉아, 세빈이랑 힘찬이가 쭈뼛거리며 옆에 와서 앉았다.
그런 둘의 모습을 피식거리며 구경하던 경환이 형이 영빈 형의 방으로 들어갔다.
“둘 다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속상하게.”
“티 나?”
“어. 보나 마나 영빈이 형이 얼음팩 줘서 그거 대고 있으라고 했지?”
“형, 아까 내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속상해서 그랬어요….”
형들한테 혼나고 울었나 싶어서 둘을 달래주려고 했더니 세빈이가 선수쳤다.
갑자기 시무룩한 얼굴로 미안하다고 하는 모습에 당황한 내가 어? 하고 되묻자 옆에 있던 힘찬이도 눈꼬리를 힘없이 늘어트리고 이야기했다.
“너랑 형들이 고생하는 거 아는데, 우리한테도 의지해 줬으면 좋겠다. 별로 듬직하지 않아 보여도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데.”
“뭐야, 왜들 이래.”
“우리도 답답해서 그랬어. 넌 자꾸 다치고 팀에 안 좋은 일 생기니까 걔네가 더 밉고….”
신세 한탄하듯 중얼거리는 힘찬이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힘이 하나도 없어서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처럼 희미한 느낌이 들었다.
“다치는 거야 뭐 어쩔 수 없는 일들이었고.”
“그렇게 얘기하지 마요.”
“세빈아.”
“형은 왜 형이 다친 일을 그렇게 가볍게 얘기해요.”
힘찬이를 위로하려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했더니 이번에는 세빈이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타박했다.
“정말로 괜찮아서 그래. 우리 일을 하다 보면 사고야 어쩔 수 없잖아? 그런데 난 전부 큰 사고 없이 넘어갈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진심을 듬뿍 담아 눈앞의 두 녀석에게 이야기하자 둘 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도대체 왜?
한숨 쉬는 우리 막둥이들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아서 그들 너머에 앉아있는 포잉을 바라보았지만, 포잉도 한숨만 내쉬었다.
포잉은 나랑만 대화하는데도 어째서인지 지금은 모두와 똑같은 심정이라는 눈이어서 눈만 꿈벅거리고 애들을 바라봤다.
“형, 형은 우리가 다치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놀라고 걱정할 거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우리도 그렇다고요.”
“맞아, 너 다치면 우리도 걱정한다고. 속상하고 힘들고. 어? 넌 다른 데서는 눈치 빠른척하면서 왜 니 일만 되면 둔해!”
세빈이랑 힘찬이가 차분하게 이야기 하나 싶었는데, 찬이는 결국 소리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야, 그래도 삿대질은 좀.”
“니가 지금 할 말이야!”
“미안해.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네.”
왜 이렇게 동생들이 평소보다 더 흥분했었는지, 형들은 왜 동생들한테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표정이 왜 그토록 처연했는지.
이제야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웃어? 이거 이거, 또 웃어넘기려고.”
“아냐. 좋아서 그래.”
흥분해서 겨우 굳었던 입술의 상처가 또 터진 건지 피가 맺히는 찬이 입술을 휴지로 꾹 눌러주면서 대꾸했다.
“우리 멤버들이 이렇게 나를 아끼는구나~ 하고 기쁘고 좋다고.”
오해는 풀면 되고 싸우면 타협점을 찾고 사과하면 된다.
하지만 멤버들이 다치는 건 끔찍하게 싫었고, 그건 멤버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
입술이 따갑다고 투덜거리던 찬이는 결국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빈이는 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지만 얌전히 앉아서 내 등짝을 때리는 걸로 우리의 소소한 다툼은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물론 가슴에 맺혀버린 감정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 드라마 다 찍었냐.”
슬그머니 영빈 형 방에 들어가 있었던 경환 형이 나오면서 툭 뱉은 말에 힘찬이가 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형이 같이 밥 준비하자고 해놓고 혼날 거 같으니까 도망가는 게 어딨어.”
“대화로 잘 풀라고 자리 비켜준 거지.”
힘찬이가 머리로 들이받는 걸 피식거리며 받아준 경환 형이 난장판이 된 거실을 둘러보았다.
“깜짝파티를 해주고 싶었는데 쉬운 일이 아니네.”
“맞아! 저 냄비에 뭐 올린 거예요? 뭔데 이렇게 탄내가….”
고기를 구워 먹으라고 소현 팀장님이 한 보따리 사주고 가셨으니 준비하던 게 고기였다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뭘….
환풍기를 켜고 냄비를 조심스럽게 열어본 나는 불쌍한 쌀알들의 모습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전기밥솥이 있는데 왜 냄비에….”
“캠핑 가면 냄비 밥 같은 거 먹잖아. 그게 맛있다고 그래서….”
“그럴 거였으면 조금 더 신경 써서 봤어야지. 이건 버려야겠다.”
나는 이 사건의 처음을 계획한 경환 형을 원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저 허허로운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형을 더 이상 추궁할 수는 없었다.
“내 라면 냄비가… 하.”
“형, 내가 냄비 멋있는 걸로 하나 사줄게요.”
“아냐, 세빈아. 형이 냄비 밥, 그거 해줄 테니까 자리 정리하자.”
일어나자마자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들을 해결했더니 급격하게 당 떨어지는 기분이 느껴졌다.
“자, 얼른 밥 먹고 쉽시다. 찬이는 설거지하고 세빈이는 바닥 정리해.”
“넵!”
“이거는?”
바닥에 떨궜던 쌈 야채들을 주워놓은 꼴을 보니 상추에게 미안해졌다.
“그것도 깨끗하게 씻어서 다시 물 빼놓고. 경환이 형, 어딜 도망가요. 세빈이랑 같이 바닥 좀 치우고 버너에 불 켜지 말고!”
불판에 기름칠을 한다는 발상은 좋았지만, 그걸로 불꽃놀이를 한 세빈이에게 버너를 맡길 수는 없었다.
불꽃놀이 하다 숙소 다 태워 먹을 일 있나.
그동안 몇 번 먹으면서 학습했는지 고기를 굽기 전에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두어서, 그걸 칭찬해 줬더니 세빈이는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웃었다.
반찬들을 통째로 꺼내놓지 않고 그릇에 옮겨서 담아뒀길래 기특해서 누가 했는지 물었더니 의외로 찬이가 해둔 거라고 했다.
덤벙거리긴 해도 꽤 섬세한 구석이 있는 놈이라 기특하다고 한마디 했더니 억지로 툴툴거리는 척하는 게 아직 애 같아서 웃어버렸다.
그 와중에 제일 신기했던 건 경환 형이 불판과 버너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거였지만, 그 말을 하면 형이 화낼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평소의 숙소 모습으로 돌아가자 그제야 폴짝 뛰어오른 포잉이 내 머리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안 깨우고 내버려 두려고 했었는데, 불낼 것 같아서 깨웠음.’
‘잘했어. 그냥 뒀으면 정말 큰일 날뻔했네. 가영 형을 비웃을 게 아니었어….’
일어나자마자 너무 놀라서일까?
잠들기 전 먹먹했던 감정들도, 심장의 통증도 모두 가라앉아서 연습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을 때처럼 편안해졌다.
깊이 가라앉아있는 것들을 건드리면 또 치밀어 오르겠지만 되도록이면 이대로 가장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녹아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멍해지려는 찰나, 세빈이가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The truth is i’m in a little bit of a funk
그리고 이젠 비밀이 아냐, 너에게 고백할 거니까.”
아직 미성숙한 맑은 목소리가 흥겹게 팬송의 한 구절을 부르자 찬이가 평소보다 가벼운 목소리로 다음 구절을 받았다.
“여섯 송이 새하얀 백합을 들고
부는 바람에 살랑이는 네 뒷모습을 보고 있어.”
그리고 둘의 시선이 경환 형에게 꽂혔고, 형은 웃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다음 구절을 불러주며 나를 바라보았다.
“Can you please stay with me?”
“너와 내 눈이 마주치는 이 순간
오직 진실만을 말하게 되는 마법”
하필이면 고음 파트를 넘겨주는 센스에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화음 넣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뒤통수를 한 대씩 때려줘야 할지 거참 고민이 되는구나.
원래 영빈 형 파트잖아, 여기….
“크, 역시 리드 보컬은 달라, 그치?”
“내가 했으면 삑사리났을 거 같은데.”
“메보 파트도 소화할 수 있는 우리 리드 보컬 환이!”
“…그만해, 이 인간들아!”
금세 낄낄대느라 바빠진 멤버들과 대충 정리가 되자 방에서 걸어 나온 좀비 같은 맏형들, 모두 둘러앉은 소중한 저녁 식사 시간은 다행히 즐거웠고 행복했고 맛있었다.
냄비 밥이 더 맛있는 것 같다고 힘찬이가 다시 도전할 기미가 보여서 절대 손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갑자기 냄비 밥을 한 것에 어떤 비하인드가 숨겨져 있는지 몰랐던 하준 형과 영빈 형이지만, 신난 세빈이가 자기 입으로 모두 고해바치는 탓에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다.
“너네 앞으로 요리에 손대지 마!”
“꼭 지환이나 형들 있을 때만 해!”
“경환이 형이 있을 때 했는데!”
“쟤도 똑같은 놈인데 뭘!”
억울함이 담긴 힘찬이 외침은 하준 형의 분노가 담긴 목소리에 흔적도 없이 묻혀버렸다.
그러게 왜 그걸 너희 입으로 말을 꺼냈어.
그런 일엔 엮이는 거 아니랬어, 우리 누나가.
세상을 살아갈 삶의 지혜를 진즉 알려준 전생의 누나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표하며, 두 맏형이 정리하는 거실을 가만히 구경했다.
우리끼리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테니 형들이 정리하겠다고 해서 나와 힘찬이, 세빈이는 한쪽 구석에 얌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경환 형은 괜히 팔랑거리다 괘씸죄로 하준 형에게 붙잡혀가서 쓰레기 담당이 되었지만.
모든 게 마무리되고 거실 바닥에 각자 편한 자세로 퍼진 우리는 그제야 데뷔 후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간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앞으로 그냥 우리는 우리끼리만 믿고 가면 될 것 같아요.”
낮과 다른 편안한 공기를 즐기던 내가 문득 든 생각을 중얼거리며 멤버들을 바라봤다.
다행히 모두가 끄덕거렸고, 경환 형과 찬이는 자유분방한 팔다리를 휘적거리고 있었다.
하, 누가 저 인간들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