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밤 편지(3)
잠결에 침이라도 흘린 건가…?
베개가 축축한 느낌이 들어 베개를 만지작거리다가 괜히 방안을 둘러봤다.
아무리 우리 애들이랑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지낸다고 해도 침 흘리는 건 좀 그렇잖아.
다른 멤버들한테 걸리면 2년은 놀림당할 감이었다.
왜 유독 나한테만….
별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몸을 몇 번 움직여주자 뻐근하게 굳어있던 몸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밤새 뭘 했는지 일어나서 몸을 푸는 동안에도 꿈쩍도 안 하고 늘어져 있는 포잉의 모습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포잉이 사진에 찍히면 좋을 텐데.
내 고냥님 예쁜 자태를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고냥님은 요정이라 자랑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만 보고 아껴드려야지.
포잉이 더 자도록 이불을 살짝 위로 올려 덮어주었다.
옆에는 경환 형이 팔다리를 자유분방하게 두고 뻗어있었는데, 그 팔다리 사이에 이불이 희한하게 끼어있어서 저걸 제대로 덮어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괜히 건드려서 자는 거 깨우느니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두는 게 낫겠지.
이제 아침으로 먹을 주스를 챙기고 식빵을 굽거나, 다이어트용 닭 가슴살과 샐러드를 챙기고 씻고 나온 순서대로 입에 물리면 평소와 같은 아침이 된다.
다만 오늘따라 몸이 무거운 것 같고, 머리도 지끈거리는 것 같아서 씻고 난 후 거실 벽에 기대앉았다.
“지환아, 잘 잤어?”
“으… 잘 모르겠어요. 머리가 아직 무거워요.”
“너 열나는 거 아냐?”
지끈거리는 머리를 비교적 시원한 벽에 기대고 눈을 감고 있자, 하준 형이 준비하고 나온 건지 아직 잠겨있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열이요? 모르겠는데. ”
원래 사람은 자고 일어난 직후에는 체온이 조금 높아지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환아, 준아, 일어났어?”
“넵. 영빈 형 잘 잤어요?”
“어, 난 괜찮은데 세빈이가 좀 아픈 것 같아.”
“에?”
하준 형이 급하게 우진 형에게 연락을 했고, 영빈 형이 구급함 안에 있던 체온계로 모든 멤버들의 체온을 확인했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멤버들뿐만 아니라, 나와 멀쩡한 듯이 서 있던 하준 형과 영빈 형까지 모두 체온이 꽤 높은 것으로 나왔다.
소현 팀장님과 우진 형, 석환 형이 같이 숙소로 찾아왔고 결국 우리는 잠든 멤버들까지 깨워서 다 같이 대표님이 따로 연락해두었다는 병원으로 향했다.
“으이구,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러면서 무슨 촬영이야, 이것들아.”
“환자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요, 소현 씨.”
그리고 6명 모두가 한 병실에 드러누워서 링거를 맞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다들 자다 병원으로 끌려온 터라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의사 선생님을 대면한 후에야 자기들이 병원에 왔다는 걸 깨달았다.
“6인 병실이 있는 게 다행이네요, 하하.”
“지환아, 차라리 한숨 자라.”
“형은 나한테만 뭐라 해….”
나와 하준 형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한숨 더 자라는 말에 그대로 다시 꿈나라로 떠났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몸도 정신도 이제 위험한 순간이 지나갔다고 판단해서 그동안 축적되어 있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져 나와서 그런 거라, 링거 한 대씩 맞고 푹 자면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
아무리 선생님이 그렇게 말해도 우진 형이고 소현 팀장님이고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석환이 형만 회사로 먼저 돌려보내더니 두 분 다 병원에 남았다.
유독 열이 많이 나는 세빈이랑 찬이가 걱정되는지 소현 팀장님은 둘 사이에 아예 자리 잡고 앉았다.
“이래서 너희 다른 거 하지 말고 푹 쉬라고 했던 거야. 많이 놀라면 애들은 자다가도 경기하고 그런단 말이야.”
“그냥 정말 괜찮을 줄 알았어요….”
“지환아, 너는 네 통증에 너무 둔감하게 반응해. 그러다 큰일 난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었던 터라 고개를 갸우뚱하고 소현 팀장님을 바라봤다.
그런 내 모습에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하준 형과 우진 형, 소현 팀장님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어서 무어라 말하려던 내 입은 자동으로 다물어졌다.
“아프다는 건 몸이든 정신이든 문제가 있다는 거잖아. 더 아프기 전에 눈치채라고 몸에서 신호를 주는 건데 넌 그걸 너무 가볍게 여겨.”
“기계도 고장이 나는 데 사람 몸은 오죽하겠어?”
“우리는 멀리 보고 멀리 갈 거잖아. 네 몸을 아끼자. 그래야 나중에 콘서트도 하고 해외 투어도 하고 하지.”
소현 팀장님과 우진 형의 말을 얌전히 듣다 보니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조그맣게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대답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얼굴에서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전 생에서는 뭐든지 혼자 해결해야 했다.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가장 많이 나와 시간을 보내준 누나도 바빴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게 어색하고 힘들었던 나는 학창 시절에도 반 애들과 잘 섞이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조별 과제가 가장 싫었다.
그렇게 지냈어도 큰 문제가 없었어서, 혼자 뭐든 해결하는 게 익숙해서, 이번에도 그렇게 대충 넘어갈 거라고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어딘가 가슴 한복판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고, 발바닥 가운데를 누가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문득 숙소에서 자고 있을 포잉이 보고 싶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무언가 능력이 주어지면 써보려고 난린데 너는 왜 그 반대냐며 핀잔을 주던 포잉.
처음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을 텍스트로 읽었을 때는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이 버거워서 모른척했다.
내 성격이 모난 탓인지 글자 형태의 속마음에 서린 감정들이 전부 부정적인 것들로 느껴져서 힘들었다.
웃으면서 어깨를 두드려주던 사람이 속으로는 아직 데뷔하지 못한 우리를 비웃고 있는 걸 알게 된다든가, 상냥하게 대해주던 사람이 속으로는 급수를 매기면서 더러운 상상을 하는 걸 알게 된다든가 하는 일들로 스킬을 더더욱 멀리하게 되었다.
그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을 뿐인데, 나는 스킬을 사용하고 나서 그날 먹은 모든 것들을 게워내야 했었다.
다행히도 그때 확인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사가 힘들었던 시기에 잘려 나갔는지 최근에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이 모두 같았던 사람들이지만 단편적인 그 순간의 내용만 확인할 수 있었던 터라 전적으로 믿기는 어려웠다.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멤버들뿐이었다.
하지만 멤버들과는 스킬에 의존해서 관계를 쌓고 싶지 않았다.
어렵다. 그냥 사람과 사람이 엮이는 게 나에게는 너무 어렵다.
적당히 그냥 웃고 흘리면서 지내는 건 잘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지금 생은 그게 조금 힘들었다.
몸이 아프단 걸 깨달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정신력이 조금 무너진 건지 모르겠지만 바쁘게 일상을 보내는 도중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하나둘 떠오르면서 눈앞이 어지러웠다.
“환아, 너도 한숨 자. 형이 깨워줄게.”
“형은 안 자요?”
“응. 난 별로 잠이 안 오네.”
눈꺼풀이 무거운 게 어지러워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졸음이 몰려와서인 건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오늘따라 하준 형의 목소리가 더 듬직했고, 병실 안이 그래도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쉬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잘게요….”
“그래. 조금 있다 애들이랑 다 같이 밥 먹자.”
“저 불고기 먹고 싶어요. 당면 들어간 거.”
“그래, 팀장님한테 형이 말할게.”
그 와중에 내 대답이 엉뚱했던지 기막혀하는 소현 팀장님의 얼굴이 흐릿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자야지.
* * *
지환이가 고른 숨을 내쉬면서 잠든 걸 확인한 하준은 이불을 한 번 더 정리해 주더니 소현과 우진을 불렀다.
“팀장님, 우진 형 얘기할 게 있어요.”
고른 숨을 내쉬며 안정적으로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던 우진과 소현이 하준의 곁으로 모였다.
색색거리며 금방 잠이 든 지환이의 숨이 조금 뜨거웠다.
아직도 열이 내리지 않은 것 같아서 우진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너도 조금 쉬는 게 좋지 않겠어?”
“몸이 조금 무겁긴 한데 잠은 안 올 것 같아서요. 애들에 대한 이야기라 빨리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멤버들이 누워있는 침대들을 잠시 바라보던 하준이 몸을 일으켰고, 우진이 부축해 주었다. 아무래도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뜻이었다.
대표님의 지인이 운영한다는 이 개인 병원은 다행히 주변이 한산했고, 병원 뒤편에 환자들이 앉아서 쉴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애들이 많이 힘들어하니?”
늘 냉정하고 단단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던 소현의 얼굴이 흐려져 있었다.
신인 그룹치고는 초장부터 너무 다사다난한 것 같긴 해서 하준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팀장님, 저희 진짜 굿해야 할까 봐요.”
“어휴, 너까지 왜 그래.”
하준의 등판을 찰싹 때린 소현은 우진이 내민 캔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악! 진짜 아프다니까요!”
“엄살은!”
“팀장님, 팀장님 손 엄청 매워요.”
우진까지 하준의 편을 들자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힌 소현은 슬그머니 손을 뒤로 감추었다.
“어휴, 두 번 말했다가는 척추 나가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다른 게 아니라….”
이어진 하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소현과 우진의 얼굴이 조금씩 심각해졌다.
영빈은 좀처럼 잠을 깊게 자지 못했고, 찬이는 자다 한 번씩 깨서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있다고 했다.
둘 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속마음을 잘 말하지 않는 멤버들이라 혹시 무슨 고민이 있는지 팀장님이 한 번쯤 면담을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특히나 영빈의 경우, 동갑인 하준이 리더로서 너무 많은 것들을 안고 가려고 한다며 자신의 힘든 점을 말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준은 영빈에게 전해 들었던 지환의 이야기도 털어놨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영빈이 전해준 모습들을 둘에게 이야기하는 하준의 얼굴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하준의 이야기가 끝나자 벤치에 앉아있던 세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래, 먼저 이렇게 얘기해 줘서 고맙다, 준아.”
“별말씀을요. 이게 제가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가 힘든 것들도 꼭 이야기해줘.”
소현은 하준이 고마운 만큼 미안했다.
이제 고작 20살인 아이였다.
소현의 눈에는 하준도 아직 어린애인데, 동생들이 득실거리다 보니 갑자기 듬직한 맏형이 되어주었다.
“안 그래도 대표님도 실장님도 멤버들과 주기적으로 면담을 하는 걸 이야기하시더라. 여태까지처럼 나 혼자 하는 거 말고.”
“조금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애들이 회사 일에 더 많이 익숙해지려면 지금부터라도 적응시켜야 할 것 같아.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지.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준이 너는 잘 알잖아.”
“….”
자신이 멤버들을 너무 품에만 끌어안고 있으려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하준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굳어진 얼굴의 우진과 하준을 바라보며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현의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어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