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14)화 (114/456)

114. 밤 편지(2)

포잉은 고르게 들려오던 숨소리와 느릿하지만 존재감을 잃지 않았던 맥박이 어긋나는 것을 느끼고 번쩍 눈을 떴다.

계약자의 숨소리는 조금 거칠어졌고, 언제나 본인의 성격처럼 느긋했던 심장 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휴식을 위해 이불 아래 힘을 빼고 축 늘어졌던 팔다리는 어느새 작게 움츠러들어 품에 있는 베개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직 졸린 눈을 몇 번 깜박여 잠을 떨쳐낸 포잉은 가느다란 팔을 벗어나 억눌린 신음 소리를 내며 앓고 있는 가여운 자신의 계약자를 내려다봤다.

무신경한 척 늘 넉살 좋은 척 허허거리며 웃고 있지만, 예민한 신경이 가져다주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탓에 단절과 외면을 택한 아직 어린 계약자였다.

자다 눈물을 흘리는 날도 많았고, 잘못을 비는 날은 더더욱 많았다.

전자는 전생에 남기고 온 가족에 대한 슬픔일 것이고, 후자는 영이 떠난 뒤라지만 자신이 차지해버린 이 육신과 육신의 혈육에 대한 사과.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사과였다.

본래대로라면 요정인 포잉이 굳이 계약자와 함께 동침할 이유가 없었다.

요정계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서 쉬는 게 포잉으로서도 더 편안할 테니까.

다만, 인지하고 사고하며 원을 마음에 담는 종족을 처음 담당하게 되는 포잉으로서는 첫 계약자가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

이래서 선배 요정들이 각 등급별 첫 계약자를 잘 만나야 한다고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을 했던 건가 싶을 만큼.

별별 종족들을 다 만나는 요정인 만큼, 실상 지환이 일으키는 말썽 정도는 귀엽다 못해 흠집도 안날 수준이었다.

다만, 그 말썽이 주변에 영향을 주는 것보다는 자기 스스로에게 영향을 주는 터라 여러모로 곤란했다.

그리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늘 자신이 따뜻하다고 끌어안는 이 계약자가 포잉은 꽤 마음에 들었다.

가만있어도 땀이 날 만큼 더운 여름이었다.

에어컨을 틀어놓은 시원한 공간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포잉을 끌어안는 걸로 심리적 안정을 찾고 있다는 걸 모를 포잉이 아니었다.

‘쯧, 언제쯤 튼실하게 클런지.’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기어코 베개가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포잉은 깨어있는 사람이 있는지 주변을 잠시 확인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아침에 일어나서 한참 동안 피곤해할 것이 뻔했기에 오늘도 직접 손을 쓰기로 했다.

잔뜩 젖어있는 뺨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을 핥아내자, 계약자가 꾸는 꿈이 어떤 것인지 보였다.

계약자가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사람들이 지환을 비난하고 등 돌리는 그런 꿈이었다.

정말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계약자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포잉은 지환의 베개 위에 드러누워 이마를 맞댔다.

순간 부드러운 초록빛의 안개가 포잉의 몸을 타고 이마를 맞댄 지환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환의 표정과 숨소리가 한결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좋은 꿈 꾸길 바란다, 계약자 놈아.’

포잉은 오늘도 누구보다 바빴던 하루의 끝을 이렇게 마감했다.

* * *

연희는 모든 게 다 피곤해서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웃고 떠들고 싶었다.

회사의 중간 관리자는 아래 사원들에게 치이고 위에 상급자들의 샌드백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견뎌지는 날이 있고 오늘처럼 품에 있던 사직서를 던지고 싶은 날이 있는 법이니까.

열심히 아등바득 살아서 직접 얻은 원룸이 오늘따라 더 허전하고 텅 비어있는 기분이라 쓸쓸해졌다.

야근이고 나발이고 뻗치는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퇴근해버렸지만, 아무리 모른 척 하려 해도 내일 돌아올 후폭풍이 걱정되었다.

뜨거운 물로 몸을 씻어내고 편의점 도시락을 데운 후 캔맥주 하나를 옆에 놓고 TV를 켰다.

아무래도 소파 베드를 샀던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며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미궁 탈출을 발견했다.

“아, 오늘이 첫 방날 인가 보네.”

저번 시즌도 재밌게 봤던 연희는 방황하던 손을 내리고 드디어 젓가락을 집어 들 수 있었다.

혼자 지내는 삶이 길어서 그럴까 이제는 혼잣말이 익숙했다.

익숙한 이영진과 류진호의 티키타카에 피식거리며 스팸의 탈을 쓴 조금 더 저렴한 무언가를 씹던 연희는 예쁘장하고 훤칠한 아이들이 나와 인사하는 걸 덤덤히 보고 있었다.

“이번 게스트는 쟤넨가 보네.”

미궁 탈출에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은 물론 아이돌도 심심치 않게 게스트로 나왔다.

뭐, 요새 아이돌 중에선 안 예쁘고 매력 없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드니까.

“세트나 안 부쉈으면 좋겠는데.”

추측하고 퍼즐을 푸는 게 아니라 억지로 해보려다 기물을 부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방송이었다. 머리를 써서 퍼즐을 풀고 탈출하는 것을 선호하는 연희는 지난 시즌의 아이돌을 떠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던 중, 이번 방송의 게스트가 자체 제작돌이라며 꽤 인기 있는 드라마의 OST 이야기를 꺼내기에 코웃음 쳤다.

저 OST는 꽤 좋은 편이라 들어보긴 했지만 직접 제작했다는 말은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자체 제작이라 해도 실상은 회사에서 대부분 다 깔아주고 거기에 수저만 얹는 정도라고.

그걸 자기 이름 달고 나오는 애들이 대부분이라고 친동생이 열변을 토하는 것도 들어본 적 있었다.

그래서 별 기대 없이 보고 있었는데, 그중 유난히 차갑게 보였던 애가 자기 주머니를 뒤지더니 짜 먹는 홍삼을 두 MC에게 건네며 살려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꽤 신선한 모습이었다.

“풉, 쟤 뭐야.”

사전에 이야기가 된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순간 방황하는 류진호의 눈동자와 손길, 화면 하단에 큼직하게 박힌 ‘신인 아이돌의 생존 방법’이라는 글자가 유쾌했다.

그 덕분에 지환이라는 이름이 연희의 머릿속에 남을 수 있었다.

홍삼을 건네던 멤버를 잡아끌면서 울상이 된 다른 멤버의 얼굴도 아직 앳된 것을 보아, 10대 후반에서 20살 정도나 되었을까 싶었다.

오프닝부터 시작된 PD와 출연진 간의 투닥거림이 세트장으로 입장하는 순간까지 쭉 이어졌다.

출입문 앞에서 겁먹은 듯 이영진과 류진호 뒤에 숨은 3명의 남자애들 모습에 자꾸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일 튼튼해 보이는 키 큰애도, 제일 작고 순둥순둥해 보이는 얼굴의 멤버도 홍삼을 건네며 살려달라던 남자애를 붙잡고 있는 걸 보니 쟤가 센터인가 싶었다.

한동안 방 탈출 카페가 유행했기에, 연희도 한 번쯤은 그런 곳을 가볼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머리를 쓰는 게 꽤 재미있어 보인 데다 그런 류에 흥미가 있는 편이라 호기심에 알아보았는데, 한 시간 남짓 즐기는데 무려 인당 2만 원 정도의 금액이 들었다.

고민하다 결국 ‘나중에’라면서 우선순위를 밀어놓고 핸드폰으로 게임을 즐기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일까. 그때 느낀 아쉬움이 미궁 탈출을 보면 꽤 많이 해소되는 것 같아서 연희는 이 프로를 좋아했다.

오프닝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터라, 이번에는 이 멤버 구성으로 어떤 탈출을 보여줄지 기대를 갖고 화면에 집중했다.

한 줄로 서서 안에 들어간 아이돌 멤버들이 미어캣처럼 두 MC 뒤에서 사방을 기웃거리며 관찰하는 게 조금 귀여워 보이긴 했다.

머리 쓰는 게 약하니 힘을 쓰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멤버가 하나, 조곤조곤하게 그런 멤버를 타이르더니 막내가 똘똘하다고 뿌듯해하는 멤버가 하나 있었다.

“아, 쟤네 누구라고 그랬지?”

이번 게스트가 꽤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연희가 동생에게 화면을 찍어 보냈다.

아이돌을 제법 잘 아는 동생이라면 얘네에 대해 조금 알지 않을까 싶어서.

화면 속 아이돌은 이전 시즌처럼 사방에 있는 힌트를 찾으려고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며 천천히 밥을 삼키던 연희는 결국 밥을 밀어내고 캔맥주를 뜯었다.

“치킨 시킬걸.”

이상하기도 하지. 방 탈출 카페에 2만 원 쓰는 건 그렇게 아깝더니, 치킨에 2만 원 쓰는 건 상대적으로 덜 아까웠다.

왠지 처음 보는 저 애들이 이번 에피소드를 꽤 흥미롭게 풀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호감이 생겼다.

동생이 답을 보낸 건지 메시지 때문에 진동이 연신 울렸지만, 지금은 방송에 집중하고 싶었던 연희는 대충 핸드폰을 던져두고 화면을 바라봤다.

답이야 이거 다 보고 보내도 충분할 테니까.

한편, 연희의 동생 연진은 언니가 보내온 본진의 사진에 깜짝 놀랐다.

‘얘들아…!’

이게 소리 없는 아우성일까.

원래 아이돌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던 언니가 얘네 누구야? 알아? 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데서 이건 영업의 기회라는 촉이 왔다.

친언니와 같은 본진 덕질을 한다던 친구들이 내심 부러웠던 연진이었다.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귀찮아할 게 뻔했기 때문에, 위캠 영상 몇 개를 언니에게 보내며 내심 일이 잘 풀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기쁨을 동지들과 나누기 위해 커뮤니티에 들어가니 자신과 비슷한 반응의 솜뭉치들이 다수 있다는 것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혹시 우리 애들에게도 물이 들어오는 것인가!’

연진을 비롯한 일부 솜뭉치들은 시청자 게시판과 미궁 탈출 관련 기사, 게시물들을 확인하면서 뜻하지 않은 호재에 감격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연예란에 떠도는 주택 무단 침입과 관련된 글들, 언래블의 공식 카페에 하준이 올렸던 글, 작은 환의 부상과 관련된 의혹들로 사방이 불타는 것처럼 시끄러웠었다.

회사의 공식 입장이라고 내놓은 글에는 구체적이지 않은 이야기들만 두리뭉실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그 미친놈이 우리 애를 어떻게 하려고 한 게 명확한데 이름도 밝히지 않고,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말뿐이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하준이가 자세하게 말해줄 거라고 했는데, 공지는 전혀 자세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우리 애들에게 어떤 불이익이 생기는 건 아닌지, 회사가 애들을 케어하지 않고 자기들 이익만 챙기고 있는 건 아닌지 손톱을 쥐어뜯으며 걱정하는 솜뭉치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미궁 탈출 촬영분이 방영된 거였다. 순간 솜뭉치들은 모든 것을 잊고 멤버들을 보며 앓기 바빴다.

회사 욕은 나중에 다시 해도 어디 가는 게 아니었으니까.

모든 멤버가 다 나오지 못한 점은 너무 아쉬웠지만, 몇몇 솜뭉치들이 우려했던 것과 달리 멤버들이 방송에 너무 잘 녹아들어서 보는 내내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작은 환이 말도 조곤조곤 잘하면서 멤버들을 잘 이끌고 있었고, 찬이는 먼저 나서서 장애물을 치우고 위험해 보이는 공간을 확인하며 두 MC와 멤버들을 챙겼다.

세빈이는 뛰어난 센스를 발휘해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는 단서들을 쓸어왔고, 작은 환은 방송 내내 작은 노트를 쥐고 메모해가며 열심히 퍼즐을 해체해 나갔다.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생각보다 꽤 긍정적으로 보인 걸까?

가족들이 언래블에 대해 물어왔다는 많은 솜뭉치들의 증언이 있었고, 그 상황들을 어디서 지켜보기라도 한 건지 일순 미궁 탈출과 언래블에 대한 기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실시간 검색어에 언래블의 이름과 함께 ‘홍삼 조공’, ‘살려주세요’, ‘방 탈출', '미궁 탈출’, ‘졸업식’ 등이 올라왔다.

신나 하는 솜뭉치들, 언래블이라는 그룹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대중, 그리고 그걸 지켜보고 있는 회사.

하지만 그날 하루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기로 했던 언래블은 그저 보통의 하루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고, 평범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이 상황을 쭉 지켜보던 정윤 실장은 박정균 대표와 소현 팀장을 바라보며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우리 애들의 포지션이 피해자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 것보다 이렇게 흘려보내는 게 낫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애들이 서운해할지도 몰라.”

“돈 몇 푼 받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게 애들한테는 더 이득이죠.”

“애들도 불쌍한 취급 받는 것보다 이게 더 나을 거예요.”

ON 엔터는 최태성 개인에 대해서는 선처 없이 모든 법적 대응을 하기로 했지만, 제논 엔터와는 척을 지지 않기로 결정을 굳혔다.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언래블과 회사 모두를 위한 결정이라고 믿었다.

“정 실장하고 김 팀장은 오래 살겠네.”

“대표님만 하려고요?”

“허허, 내가 제일 오래 살려나.”

욕먹는 게 가장 익숙한 세 사람의 얼굴에는 서로 닮은 듯한 쓴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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