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불타오르네(5)
“병아리들, 형 왔다!”
“실례합니다.”
과연 가영 형과 키스 형은 숙소에 들어오는 모습부터가 달랐다.
가영 형은 열린 문을 쉽게 통과하며 기운차다 못해 자기 집처럼 편한 모습으로 들어온 반면, 키스 형은 입구에서 예의를 차려 인사를 하더니 커다란 박스 하나를 내밀었다.
“형, 이게 뭐예요?”
“집들이 선물? 이사 선물? 뭐 어쨌든 처음 온 거니까.”
“내 건 택배로 올 거야.”
“그런 거 안 사 오셔도 되는데….”
“다른 사람 집에 처음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가는 거 아니다, 인마.”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사이, 갑자기 5년쯤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석현 형이 시들시들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형, 쉬었다 가지 왜….”
“아냐…. 오늘 우진 형님 안 계셔서 내가 더 움직여야지.”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지만 그냥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석현 형은 문을 꼭 잘 닫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비척거리며 엘리베이터 너머로 사라졌다.
키스 형이 등 뒤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게 들리는 걸 보면, 가영 형이 무언가 했나 보다 하고 그냥 수긍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호기심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힘찬이는 키스 형이 건넨 박스의 물건을 확인하고는 탄성을 질렀다.
“와! 키스 형 쩐다!”
“뭔데?”
“그냥 너희 필요할 것 같은 거 이거저거 담았어.”
오다가 마트라도 털어온 건지 박스 안에는 구호 용품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온갖 물건이 담겨 있었다.
지퍼백, 비닐장갑을 비롯한 일회용품과 세제, 섬유 유연제, 햇반, 즉석식품 등등.
“역시 숙소 생활해 본 짬바가 느껴지는 선택이네요.”
“짬바?”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몰라요?”
물건들을 보고 감탄하던 내 말에 가영 형이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묻자, 옆에 있던 찬이가 가영 형의 옆에서 알짱거리며 장난을 쳤다.
‘와, 또 업보 쌓을 뻔했네.’
‘님은 학습 능력이 없음…?’
‘아냐…. 잠깐 잊었을 뿐이야.’
전생에 흔하게 쓰던 단어나 밈을, 이제는 쓰기 전에 이게 지금 시기에 나왔던 말인지 항상 검색하고 찾아봐야만 했다. 그게 너무 힘들어 언제부턴가 인터넷 용어도 줄임말도 대부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실수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삶은 너무나 고달팠으니.
그런데도 잠깐 방심했다고 또 의식의 흐름대로 뱉고 말았다.
‘바른 말 고운 말 쓰자, 계약자야.’
‘으응. 이렇게 사는 게 힘들다, 포잉.’
그나마 다행인 건 방금 전 단어는 이미 쓰이고 있는 말이라는 것.
흐물흐물해졌던 정신을 다시 한번 부여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가영 형은 뭘 시켰길래 택배로 와요?”
“비밀이야. 오면 깜짝 놀랄걸?”
음흉하게 웃는 걸 보니 영 불안해지는데, 알면서도 당해야 하는 게 동생 된 사람의 입장이니… 찬이도 입술만 불만스럽게 튀어나왔을 뿐, 무의미한 반항을 하진 않았다.
이상한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근데 애들 잘 잔다. 이 정도 요란하면 깰 법도 한데.”
“영빈이는 방에 있는 거야?”
“네. 빈이 형은 방에서 자고 이 둘만….”
가영 형과 키스 형이 들어오면서 왁자지껄해진 거실에는 여전히 세상 달게 자고 있는 세빈이와 경환 형이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세빈이 다리는 경환 형의 몸 위에 올라가 있었고, 그 덕에 가위라도 눌리는지 경환 형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지만, 내버려 뒀다.
몰라, 세빈이 자는 거 깨면 무서우니까 안 하고 싶어….
경환 형도 세빈이도 한번 잠들면 깨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만, 둘 다 잠에서 잘 깨지 못하는 건 동일했지만, 일어났을 때 반응은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경환 형은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세빈이는 억지로 잠에서 깨우면 극도로 날카로워져서 얼굴이 아예 다른 사람처럼 살벌해졌다.
예전에 한 번, 세빈이가 잠에서 깨면서 자기도 모르게 욕을 했고, 때문에 당시 세빈이를 깨웠던 지환이가 기분이 한껏 상해서 대판 싸운 적도 있었다.
물론 내가 있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기한 건 세빈이도, 경환이 형도 준이 형이 깨우면 그나마 얌전하고 곱게 일어난다는 점이었다.
영빈이 형이 깨울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둘이 준이 형이 깨울 때만 얌전히 잘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둘을 챙기는 건 하준 형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너네 점심 언제 먹었어?”
“저희 아까 회사 가기 전에 먹었으니까 1시 조금 넘어서려나….”
“배고파?”
“아뇨. 배는 안 고픈데 그냥 입이 심심해요.”
“오, 되게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네요.”
“이 정도야 껌이지.”
형들은 자연스럽게 세빈이랑 경환 형을 피해 거실 바닥에 앉았다.
그 모습에 감탄하자 키스 형은 씩 웃더니 형들이 지내는 숙소는 더한 난장판이라는 말을 남겼다.
아무래도 단체 생활인 숙소 사정은 다들 비슷한가 보다.
“애들 잠든 지 얼마나 됐어? 깨워야 되나.”
“조금 있으면 한 시간쯤 될 거 같은데. 낮잠이니까 뭐.”
“그럼 조금 더 있다가 깨우자. 너희 뭐 먹고 싶어?”
“가영 형이 쏘는 거예요?”
“그럼 네가 쏠래?”
“어휴, 제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가영 형 옆에 앉은 찬이는 우리들끼리만 있다가 처음으로 친한 형들이 숙소에 놀러 오자 제법 신난 것 같았다.
평소보다 까불거리는 게 1.5배 정도 증가한 걸 보니.
둘은 오늘도 낄낄대며 온갖 이야기로 수다를 시작했고, 키스 형은 그 둘과 멀리 떨어진 하준 형 옆에 앉았다.
이거 나만 중간에 낀 모양샌데.
방으로 도망갈까….
딱 봐도 둘둘 나뉜 사이에 내가 낀 모양새라, 이러다 새우 등 터지는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해졌다.
“그래도 너희 무사하니 다행이다. 연락 없어서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
“허허…. 핸드폰을 볼 정신이 없었어요.”
“없을 만하지. 이번에는 지환이가 사고 안 쳤어?”
“미수로 그쳤으니 천만다행이죠.”
“아니, 저기요! 사고라뇨! 전 언제나 얌전한데요.”
“퍽이나 얌전하겠다. 얌전한 놈이 이마 찢어지고 다리 깁스하고 하냐.”
키스 형은 하준 형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팩트로 나를 후드려 패기 시작했고, 말도 안 되는 모함이라고 외치던 나는 부질없는 반항은 그만두기로 했다.
우기기에는 우리를 처음부터 지켜본 이 형들이 나를 너무 잘 아는 게 문제였다.
아니, 근데 준이 형은 왜 형 동생이 혼나고 있는데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너무하네!
“진짜 형이니까 말하는 건데, 이번에도 밖으로 뛰쳐나가서 엄청 놀랬어요.”
“그 미친놈들이 밖에 있는데 거길 나갔다고?”
“네. 우진 형이랑 경찰들이 와있어서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다니까요.”
“와, 기대를 저버리질 않네.”
“아니, 우진 형이 위험한 줄 알고 그랬죠….”
그 뒤로도 한참을 혼났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영 형까지 합세해서 조심성이 부족하다느니, 제일 비실한 게 겁도 없다느니 하는 얘기까지 들었다.
세상에, 가영 형한테 조심성이 없다는 얘기를 듣다니.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안 되겠어. 너희도 집에 무기를 둬.”
“무기요? 무슨 무기요?”
“야구 방망이 같은 거 있잖아. 집에 소화기는 있냐?”
“없어요.”
“요새 세상에는 정당방위여도 까딱하면 내가 감옥 가던데요?”
“위협 용인 거지 뭐.”
한마음 한뜻으로 내 행동에 대한 잔소리를 퍼붓던 두 형님은 갑자기 우리 숙소의 보안에 대해 쑥덕거리더니 야구 방망이를 어떤 재질로 주문하느냐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준이 형, 이건 말려야 하지 않아요?
이대로 두면 숙소로 이상한 것들이 배달될 것 같다는 생각에 간절한 두 눈으로 하준 형을 바라봤지만, 하준 형은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설득된 건지 그걸 또 같이 고르고 있었다.
“왜 우리 중에는 정상인이 하나도 없는 거야….”
“나 있잖아.”
“….”
“뭐야, 왜 그렇게 봐!”
아무래도 조만간 이비인후과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찬이가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하는 헛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안타깝게도 그나마 정상인인 줄 알았던 하준 형까지 찬이와 가영 형에게 물들어 버린 것 같았다.
이 많은 인원 중에 정상인이 나밖에 없다니.
새삼 앞으로의 활동이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여기는 터가 문젠가. 왜 다 이 모양이지?’
‘응? 왜?’
‘…에휴. 아니다, 계약자야.”
가영 형이 오자 시끄럽다고 우리 침대에 가 있던 포잉은 보안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건지 방 밖으로 나와 우리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포잉의 시선이 아주 불순했지만 보이지 않은 척하기로 했다.
내가 유일한 정상인이라고 주장해봤자 저 냥아치 요정이 수긍해 줄 리 없으니까.
기어코 알루미늄 배트를 주문한 형들은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배부른 포잉처럼 웃고 있었다.
그 후에는 배달 앱을 켜고선 세상 진지한 얼굴로 치킨과 피자를 고르기 시작했다.
분명 저 음식들을 먹으면 내일, 혹은 이번 주 내내 감당해야 할 운동량이 수직 상승할 게 뻔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우리 식단 조절해야 하지 않냐고 준이 형에게 의견을 피력해봤지만, 키스 형이 세상 진지한 얼굴로 맛있게 먹으면 살 안 찐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키스는 그냥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이야. 나보다 두세 배는 잘 먹는데 늘 살은 나 혼자 빼거든.”
“기만자….”
“왜, 뭐.”
가영 형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깜빡 속을 뻔했네!
피자 두 판에 치킨 세 마리.
그나마 일인 일 닭을 외치는 가영 형을 키스 형이 때려서 말린 게 이 정도였다.
어차피 앞으로 긴 시간을 쉬지는 않을 거라는 건 서로가 알고 있었다.
우리가 카메라 앞에 전혀 설 수 없는 상태가 되지 않는 이상은, 회사의 방침이 정해지는 순간부터 그 방향에 맞게 다시 활동을 할 터.
키스 형이 구호 물품처럼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것도, 야구 배트를 주문한 것도 우리를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까 싶어서 새벽에 일어난 일들은 거의 언급하지도 않았고, 되도록 가벼운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모습에 배려가 묻어났다.
그저 평소와 같은 일상인 것처럼, 친한 동생들 집에 집들이 온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 줘서 오히려 더 고마웠다.
내가 냥톡에서 확인도 하지 않고 나가기 했던 다른 채팅방들처럼, 자신의 흥미를 채우기 위한 질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런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이렇게 함께 지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새로 부여받은 지금의 삶은 꽤 운이 좋은 편 아닐까?
“애들 슬슬 깨우자. 잠이 좀 깨야 뭘 먹어도 먹지. 자고 일어나서는 입맛 없잖아.”
“저희 애들은 자다 깨서도 잘 먹더라고요….”
“역시 너희는 우리랑 비슷하다니까. 내 동생들답다!”
“그런 걸로 의기투합하지 마. 애들 앞에서 창피하게.”
투덜거리는 키스 형도, 금세 찬이랑 무언가 신나게 이야기하는 가영 형도 다 고마워져서 근질거리는 입술을 참지 못하고 툭 한마디를 꺼내고 말았다.
“고마워요, 우리 걱정해 줘서.”
멈칫하는 멤버들의 모습과 나에게 꽂히는 형들의 시선이 너무 뜨거워서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으악! 부끄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