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불타오르네(2)
우진 형이 우리 주문을 듣자마자 니들이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다녀올 동안 씻고 있으라며 현관문을 나섰다.
“세빈이랑 힘찬이 씻고 나와.”
“왜 맨날 나부터 시켜….”
“네가 제일 밍기적대니까 그렇지.”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우리는 밤사이 긴장으로 굳어버린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고, 하준 형은 요주의 둘을 콕 찍어 욕실로 보냈다.
힘찬이는 내버려 두면 세월아 네월아 하고 뭉그적대서 문제고, 세빈이는 씻고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늘 이 둘이 먼저였다.
이 집은 화장실이 두 개라 얼마나 다행인지….
“아, 삭신이 다 안 아픈 데가 없어.”
“그러게 잘 때 곱게 좀 자지.”
“경환이 형은 세빈이한테 깔려있던데….”
“어제 베개 안겨줬는데도 그러네.”
다들 골골거리고 있어서 오늘 연습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망둥이는 이제 볼일 없겠지?”
“기사 댓글이랑 커뮤들 난리야. 불타던데? 국회의원도 아니고 잡힌 날 또 범죄를 도모한 건데 쉽게 나오겠냐.”
“어휴, 진짜 제발 이제 얼굴 안 보고 살고 싶다.”
앓는 소리와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정말 앞으로 살면서 그 새끼를 다시 마주하는 건 사양이었다.
6명이 먹을 음식을 사느라 시간이 걸리는 건지, 우리가 모두 씻고 나와서 가벼운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는 동안에도 우진 형이 돌아오지 않아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뭐지, 형 왜 전화 안 받지….”
“양손에 음식 든 거 아냐? 그럼 전화 못 받지.”
“아, 맞네. 우리가 한 명 따라 나갈 걸 그랬나….”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다 같은 숙소 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일을 겪고 나니 저 현관문이 유독 낯설고 무서워 보였다.
아무래도 이전과 같아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준 형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고, 우진 형이라는 말에 세빈이가 나가려는 걸 하준 형이 막아섰다.
“밥 먹을 준비해.”
“넵.”
익숙한 손길로 상을 펴고 누구는 수저를 챙겨오는 동안 우진 형이 양손 무겁게 등장했다. 우진 형의 얼굴에는 그사이 땀이 맺혔다.
“고기!”
“그래, 실컷 먹어라. 먹고 아프지만 마라.”
“이야, 감자탕 오랜만이네.”
“불고기도 있어!”
“이걸 어떻게 혼자 다 사 왔어요, 우리 부르지.”
씩씩하게 고기를 외치는 우리를 보며 흐뭇하게 웃던 우진 형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떻게 알고 온 건지 모르겠는데 밖에 기자들 있다.”
“예?”
“너희도 한동안은 혼자 다니지 말고 숙소 와서는 웬만하면 나가지 말고. 일단 밥 먹자.”
새삼스럽게 어제 일이 꽤 큰일이었다는 걸 느끼며 밥솥의 밥을 퍼다 나르고,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오냐, 많이들 먹어라.”
참새 새끼가 밥 달라고 입을 벌리듯 한마음 한뜻으로 인사한 우리 앞에 우진 형이 뼈 한 덩이씩을 나눠주었다. 그 모습에 다들 피식거리며 웃었다.
여태까지는 착하고 잘 챙겨주는 좋은 형이었다면, 어제 일 이후부터는 믿음직스럽고 듬직한 형이 되었달까.
우진 형이 넉넉하게 사 온 덕에 우리는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양껏 먹을 수 있었고, 더 욕심부리는 힘찬이를 억지로 떼어낸 나는 덜어 먹었던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넣었다.
“쟤는 꼭 저렇게 식탐을 부려, 저러면 꼭 탈 나면서.”
“평소에 잘 못 먹으니까 그렇죠….”
“그렇게 먹다가 저번에 탈 나서 밤새 못 잤잖아.”
유독 다이어트와 식단 조절을 힘들어하는 찬이는 한 번씩 고삐 풀린 듯이 먹어댔는데, 그런 날은 꼭 탈이 나곤 했다.
되려 세빈이는 그 작은 몸에 이 음식이 어떻게 다 들어가는지 모를 만큼 많이 잘 먹고 탈도 안 나는 편이었고.
경환 형은 잘 먹는 편이지만 자기 양 조절이 확실했다.
배가 부르면 바로 수저를 놓는 편이었고, 영빈 형도 대식가였다.
자기 말로는 맛있는 건 많이 먹고 맛없는 건 안 먹는다고 하던데 다이어트 식단 빼고 형이 잘 안 먹는 걸 본 적이 없는데?
하준 형은 생각보다 덜먹는 편이었다.
다이어트 빡세게 하기 싫어서 평소에 조금씩 덜먹는다고.
난 그냥 보통? 음식 남기는 건 싫지만 위가 약한 편이라 꾸역꾸역 먹진 않는다.
우리가 뒷정리하는 동안 우진 형은 팀장님한테 전화를 하는 듯했고,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 돼서야 우리는 회사에 도착했다.
“병아리들, 괜찮아?”
“팀장님, 갑자기 웬 병아리….”
“어제 너희 놀라서 삐약거리는 거 보니까 귀엽더라.”
“시커멓고 커다란 남정네들한테 병아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항의를 해도 팀장님은 언제나처럼 웃어넘겼다.
회사에서 다시 만난 팀장님은 새벽의 모습과 달리 평소처럼 말끔했다. 눈에 핏발이 서 있긴 했지만.
“어제 그 일은 정윤 실장님이랑 대표님이 직접 갔으니까 잘 마무리될 거야. 회사 변호사분들도 같이 갔고.”
오자마자 회의실에 데려가길래 이야기를 해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대표님까지 움직일 줄은 몰랐다.
어제 일을 언급하자마자 스스로 인지할 틈도 없이 얼굴이 굳는 멤버들을 바라보던 팀장님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이 일이 너희에게 마음의 상처로 남을 까 봐, 우리는 그게 걱정이야. 그래서 상담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너희 생각은 어떠니?”
“어… 그거 꼭 받아야 해요? 지금 괜찮은데.”
“트라우마는 그 당시에는 괜찮은 것 같아 보여도 어느 날 갑자기 훅 올라와서 너희를 힘들게 할 수도 있어. 그래서 앞으로도 쭉 건강한 마음을 위해서 팀장님은 너희가 상담을 받았으면 좋겠다.”
간혹 회사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심리 상담을 주도해 멘탈 케어를 하는 곳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전에 ON 엔터에서도 상담을 했는지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것도 어제 일이 발생하면서 생긴 새로운 변수일까?
모두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저는 받을게요.”
“저도요.”
혹시나 하는 만약을 위해 상담을 받겠다고 먼저 나서자, 하준 형도 담담한 목소리로 동조의 뜻을 내비쳤다.
“괜찮을 테지만 혹시라도 그런 미친놈한테 데인 일을 상처로 안고 가고 싶지는 않아요.”
어제 일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억눌린 소리가 나왔다.
혹시라도 그때 문이 열렸다면, 정말로 큰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미친놈의 품에서 전기 충격기 말고도 무언가 쇠붙이가 같이 떨어지는 걸 봤기 때문에 더 진저리가 쳐졌다.
“그럼 저도 받을래요.”
다행히도 잠깐 머뭇거렸던 다른 멤버들도 동조의 뜻을 내비쳤고, 소현 팀장님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여기로 오셔서 진행해 주실 거야. 날짜는 조정 중이니까 정해지면 말해줄게.”
“그런데 저희 그 ‘무사이’는 방송될 수 있는 거예요?”
“응. 데미갓만 편집하고 방송 강행할 예정이라고 PD님이랑 얘기했어.”
“남은 멤버들만 불쌍하게 됐네요….”
하룻밤 사이에 두 번이나 경찰서에 간 멤버가 있으니 망둥이만 제명한다고 해도 다른 멤버들이 당장 활동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광고주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최진웅이라고 다른 멤버 하나 더 있는데 걔에 대한 제보도 꽤 많은 모양이야. 이정이랑 그렇게 붙어 다닐 때부터 알아봤지.”
“최진웅이요? 아, 그 개미핥기 닮은.”
“풋, 아 개미핥기? 최진웅이 개미핥기야? 지환아, 너 어디 가서 그런 얘기하면 안 된다?”
“에이, 그럼요. 그냥 저희끼리 부르는 별명이에요.”
팀장님은 개미핥기라는 말을 듣자마자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그러면서 내 말을 듣고 보니 닮은 것도 같다며 한참을 피식거리다 최태성의 별명은 뭐냐고 물어보셨다.
어물쩍거리며 잠시 입을 열지 않자, 빨리 말해보라고 닦달이었다. 결국 망둥이라고 조그맣게 말해주자 팀장님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참 동안 입꼬리를 내리느라 고생했다.
“어휴, 우리 지환이가 이렇게 별명 짓는데 재능이 있는 줄 몰랐네.”
“아니, 그냥 딱 봐도 그 두 동물이 생각나는데 왜 다들 몰랐지?”
팀장님이 겨우 웃음을 멈추고 푸들거리는 뺨을 꾹꾹 누르며, 데미갓은 당장 해체는 안 할 것 같고 두 멤버만 쫓겨날 것 같다고 말해주셨다.
남은 멤버들만으로라도 수습해서 빈자리를 메꿔보려는 것 같다면서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차가운 얼굴로 조소했다.
“일단 회사에서는 흉기를 들고 명백하게 침입을 시도했기 때문에 특수주거침입죄로 보고 있어.”
“그럼 감옥 가는 거예요?”
“특수주거침입은 징역형이야. 가자마자 음주 상태인지도 확인했는데 깨끗했고. 그나마 그쪽이 우겨볼 만한 건 정신질환 정도겠지.”
회사에서도 꽤 무섭게 대응하고 있었다.
손해배상 청구를 위해 민사 소송도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우리 가족들에게는 일이 확인되자마자 팀장님이 모두 전화 돌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재확인 한 거였어. 이 무서운 누님 같으니라고….
계속 진행 상황을 가족들과 우리에게 공유할 거라고 말하는 팀장님은 꽤 듬직해 보였다.
그 덕분에 회사가 우리 편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저희 일정이 많이 틀어질까요?”
“솜뭉치들도 많이 걱정하고 있을 것 같은데….”
하준 형과 영빈 형이 걱정스럽게 물었고 팀장님도 안색이 조금 흐려졌다.
“일단 회사는 너희가 조금 쉬는 게 좋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어. 당장 앨범이나 촬영 진행하기 보다는 며칠이라도 맛있는 거 먹고 푹 자고 하면서. 그리고 앞으로 석환이가 너희 로드로 같이 일할 거야.”
“석환 형도요?”
“응. 너희 인원도 인원이고 우진이 혼자 커버하기엔 버거울 것 같아서.”
“저, 그러면 라디오도 쉬어야 해요?”
“안 그래도 김명진 PD님한테 연락 왔어. 너 이번 주는 쉬라고.”
하준 형은 쉬어야 한다는 게 걱정인 것 같았지만, 김명진 PD님이 직접 팀장님에게 한주 쉬고 다시 보자고 말했다는 걸 알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솜뭉치들한테는 일단 회사 공식 입장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언제쯤 발표해요?”
“오늘 내로 입장문 올릴 거야. 그 후에 짧은 영상을 찍어서 올려주던가 하자. 지금 섣불리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건 좋지 않아.”
“네….”
우리 솜뭉치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을 게 걱정이었지만, 팀장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저어….”
“응, 세빈아 편하게 말해.”
평소에는 보통 의견을 잘 말하지 않던 세빈이가 팀장님에게 말을 걸었다.
“공카에 저희가 글이라도 올려주면 안 될까요? 솜뭉치들도 밤새 엄청 걱정했을 거 같아서….”
“흠. 대신 내용은 내가 체크할 거야. 그래도 괜찮니?”
“네. 그냥 저희 무사히 잘 있고 밥도 잘 먹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서요.”
“그래, 그럼 그 글이라도 올리자. 안 그래도 회사로 연락 꽤 많이 오긴 해.”
기사가 올라가자마자 회사로 수많은 솜뭉치들이 우리 상태에 대해 문의해왔고, 심지어 영어나 일본어 등을 쓰는 해외 솜뭉치들도 다수 문의한 상태라고.
“우리 괜찮으니까 솜뭉치들도 밥 잘 먹고 있으라고 써줘!”
“그러니까 결국 또 쓰는 건 나인 거지?”
“이럴 때 리더가 나서야지.”
의견은 세빈이가 냈지만 결국 우리를 대표하는 건 리더라는 발언에 하준 형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우리를 둘러봤다.
우리는 당당했기에 동생 라인 모두가 꽃받침을 하고 하준 형을 바라봐 줬다.
이번에도 경환 형은 우리 옆에 붙어서 같이 하고 있었다.
“하.”
기가 찬다는 듯 웃는 하준 형과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다시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한 팀장님, 그리고 체념한 듯한 영빈 형까지.
다행히 모두가 평소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