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00)화 (100/456)

100. 외전 - 태어나줘서 고마워(happy birthday to C.I)

일진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드는 날.

오늘이 유독 그런 날이었다.

평소라면 하준 형이나 영빈 형이 모두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갑자기 눈이 떠졌다.

보통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잘 깨지 못하는 터라, 연습생 생활하는 내내 아침마다 형들의 목소리에 겨우 잠에서 헤어 나오곤 했다.

그러다 아주 간혹 이렇게 혼자 잠이 깨곤 했는데, 그런 날은 유독 종일 자잘한 사건 사고가 많았다.

일종의 징크스 같은 거라 괜히 기분이 찝찝해졌다.

작은 한숨을 내쉬고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며, 눈을 감고 주변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들을 바탕으로 방문 밖의 모습이 그려보았다.

지환이랑 하준 형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듯한 웅얼거림. 고소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둘은 벌써 일어나서 멤버들의 아침을 챙기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서글서글하게 멤버들을 대하는 지환이 모습이 처음 며칠은 낯설었지만, 모두 그러려니 했다.

죽을 고비, 혹은 죽을 뻔한 경험을 하면 사람이 바뀐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었으니까.

그래도 걱정이 돼서 한동안은 지환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항상 차가운 얼굴로 멤버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실은 겁이 많고 사람에게 정을 주는 걸 잘 모를 뿐 나쁜 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환이 몸에서는 늘 희미한 파스 냄새가 났다.

몸을 움직이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내가 처음 춤을 배울 때도 저랬었고, 아마 모두가 그랬을 테지.

차가운 듯한 얼굴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차가운 게 아니라 그냥 표정이 없는 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사람의 눈은 생각보다 많은 감정들을 이야기해 주곤 했다.

지환이의 눈은 겁에 질린 것처럼 방황하는 날이 많았다.

사고 이후 며칠간도 여태까지처럼 눈동자가 흔들리는 날들이 많았지만, 어느 순간 마음이 단단해졌는지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올곧은 시선으로 멤버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금 안심했다.

다시 문밖에서 하준 형과 지환이가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준 형이 지환이가 마음을 잡도록 도와준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아직 나는 동생들에게 믿음직스러운 형이 되지 못하나… 라는 미약한 실망감이 가슴 속에 번졌다.

“으어…. 으응.”

힘찬이는 또 잠꼬대하는 것 같은데, 와중에 말을 시키면 간혹 대답하기도 해서 몇 번 놀려먹기도 했었다.

오랜만에 일찍 눈 뜬 김에 멤버들에 대해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하준 형은… 이 사람이 나보다 고작 한 살 더 많다는 게 가끔은 놀라웠다.

뭐든지 솔선수범했고, 연습하는 와중에 회사와 부딪히느라 피곤할 텐데도 시간을 쪼개 꼭 작업을 했다. 그런 모습들에서 늘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히스 형을 처음 만나던 날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학교 갔다가 숙소에 왔더니 처음 보는 사람이 거실 벽에 기대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순간 내가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

때마침 고개를 돌린 히스 형과 눈이 마주쳤고, 날카로운 눈매와 꾹 다문 입술이 고집스러워 보여서 나도 모르게 허둥지둥 말을 했던 것 같았다.

그때, 형이 뭐라고 했었지? 어서 와 라고 했던가?

너무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해서 벙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나중에서야 듣게 된 일이지만, 새 숙소라 조금 긴장해서 마음을 다잡으려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곰 같은 애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자기를 쳐다봐서 긴장했다고.

그래서 뭐라도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긴장해서 말이 헛나왔었다고 했다.

역시 사람을 생김새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 추억이었다.

힘찬이랑 세빈이는 형들에 비하면 비교적 본지 얼마 안 된 애들이었지만 이런 애들이 동생으로 들어와서 천만다행이었다.

힘찬이는 평소 하는 짓과 다르게 굉장히 예민한 감정선을 갖고 있었고 다만 그걸 웃음과 장난으로 숨기는 편이었다.

세빈이는 낯을 많이 가리고 말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기준이 확실한 애라 고집도 제법 있었다.

대표님은 어디서 이런 사람들만 모아다가 팀을 만들었지….

잠들면 정말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지금까지의 연습과 멤버들의 처음 모습을 떠올리고 있자니 드디어 하준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들 깨워야겠다.”

“밥 먹여야죠.”

옆방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히스 형 목소리가 들렸다.

곧 웃음을 머금은 하준 형의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감겼던 내 눈도 떠졌다.

“어? 일어났어? 가서 밥 먹자.”

“네….”

잠긴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나니 철제로 된 이층 침대가 덜컹거렸다.

“혀엉… 10분만 더….”

“찬아, 일어나야지. 더 늦으면 밥도 못 먹고 간다?”

그렇게 아주 보통의 아침을 시작했다.

중간에 칫솔이 변기에 떨어져서 그걸 건져다 버리느라 고생했지만, 그쯤의 해프닝은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경환아, 오늘 왜 이렇게 집중 못 하니.”

“죄송합니다.”

“진짜 데뷔 코앞이다. 신경 쓰자.”

“네!”

본격적으로 일정이 꼬인다고 느낀 건 제영 쌤 연습 시간부터였다.

평소보다 더 공을 들여 안무를 따라 했는데도 자꾸 조금씩 어긋났다.

결국 그날 연습 시간이 끝날 때까지 제영 쌤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고, 지환이랑 힘찬이가 눈치를 보는 게 느껴져서 남몰래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후로 이어진 일정 내내 크고 작은 부분들을 계속 지적받다 보니 정신적인 피로도가 급격하게 높아졌다.

그 와중에 작업하던 파일이 잘못 저장돼서 다른 파일에 덮어쓰기 되었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컴퓨터를 부술 뻔 하기도 했다.

온전한 내 실수로 발생한 일이라 작업시간 내내 쥐어뜯은 머리카락만 한 움큼은 될 것 같았다.

속이 답답하고 두통이 심해져서 우진 형에게 부탁해 두통약을 챙겨 먹었다.

데뷔가 코앞이라 이런 컨디션으로 있을 수 없는데 좀처럼 평소의 상태로 돌아올 생각을 안 해서, 다 그만두고 빨리 숙소에 돌아가 눕고 싶어졌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왜 하필….

가장 큰 사고는 뮤비 추가 촬영 때 발생했다.

세트장에서 감독님 요청으로 안무 부분을 재촬영하고, 스토리 전개를 위해 추가 장면을 넣자는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조금 늦은 시간에 움직이게 됐다.

내가 집에서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거리를 떠돌다 깡패들에게 맞고 있는 하준 형을 구해서 도망치는 신이었다.

숙련된 배우분들이 함께하는 자리였지만, 그래도 소현 팀장님과 우진 형은 걱정이 많았는지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도망치듯 집 문을 열고 뛰쳐나와서 임대 아파트의 긴 복도와 계단을 뛰어 내려가야 하는 장면.

아버지 역의 배우님과 몇 번 연습 후 감독님의 레디 소리와 함께 시작한 연기는, 10번이 넘는 NG 끝에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문에 걸쇠가 잘못 걸려서 밀었는데 열리지 않거나, 열고 뛰쳐나왔는데 미끄러져서 넘어지고, 동선 안에 갑자기 스태프가 찍혀서 다시 찍고, 배경 안의 액자가 떨어지고, 상이 넘어가면서 상대 배우님이 넘어지고….

마지막으로 계단에서 내가 구를 뻔했지만 어찌 겨우겨우 촬영은 끝났다.

“경환아, 너 괜찮아? 병원 가봐야 하지 않겠어?”

“괜찮아요. 미끄러지긴 했는데 다행히 안 다친 것 같아요.”

“형, 괜찮아?”

“다친 거 아냐? 병원 가야지!”

컷 소리가 나자마자 멤버들이 우르르 뛰어와 내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한마디씩 보태는 모습이 귀여워서 조금 웃었다.

우진 형과 소현 팀장님이 다가와 멤버들을 떼어놓고 내 상태를 점검했지만, 크게 이상한 점은 찾지 못했는지 아프면 숨기지 말고 바로 이야기하라는 말을 남기며 물러섰다.

그 후로도 촬영은 이어졌으나, 이상할 정도로 그날은 크고 작은 사고가 많이 생겼다.

소품용 각목이 제대로 부러지지 않아 배우 한 분이 다쳐서 급히 우진 형이 응급실로 달려갔고, 하준 형을 구해서 도망치는 장면에서는 예정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잘못 들어가서 NG를 내기도 했다.

형을 끌어당기는 장면에서는 어떻게 된 건지 소매 부분이 찢어지면서 나만 뒤로 넘어지기도 했다.

“경환아, 너 진짜 괜찮냐? 오늘 영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아까부터 두통도 있다며.”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우진 형에게 고개를 저어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까부터 발목이 욱신거리는 게 살짝 삔 것 같았다.

다행히 더 이상 뛰는 장면은 없었고, 서로 의지해서 절뚝거리고 걸어가는 장면이라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내 양쪽 어깨에 기대 잠든 지환이와 찬이 얼굴에도 피로가 가득해 보였다.

“애들이 왜 또 그러고 자냐. 너도 피곤할 텐데.”

“형은 왜 안 자고.”

“지금 자면 조금 있다가 푹 못 잘 거 같아서.”

“오늘 유난히 하루가 지랄 맞다, 형.”

“그런 날이 있지. 오늘 고생 많았다.”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하준 형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고, 중간중간 우진 형이 한마디씩 보탰다.

겨우 숙소에 도착해서 아침에 새로 꺼냈던 칫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무슨 액땜인지 모르겠지만 이전에도 2년에 한 번씩 생일에 온갖 사건 사고가 발생해서 하루를 날리곤 했었다.

달력도 시계도 잘 안 보고 매일 비슷한 하루를 보내다 보니 생일인 것도 잊고 있었다.

어릴 때는 생일이 이렇게 엉망이 되는 게 유독 더 억울하고 서럽고 했는데, 이제는 그냥 이렇게 무덤덤하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미역국 없는 생일 아침도 이미 익숙해져서 그냥 그렇게 잊고 있었나 보다.

씻느라 물에 흠뻑 젖은 거울 속의 나는 조금 풀이 죽어 보이기도 했다.

적당히 물기를 털어내고 버릇처럼 영빈 형이 선물로 안겨주었던 쿠션을 들고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나둘 씻고 나온 멤버들 사이로 힘찬이가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기 시작했고 저녁을 건너뛴 모두가 팀장님한테 물어보자며 하준 형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씩 웃던 하준 형은 편의점을 털어오자며 같이 갈 멤버로 날 지목했고 뭘 얼마나 사려나 싶어서 웃으며 따라나섰다.

“미안하다, 경환이 너 오늘 생일인데 챙겨주지도 못하고.”

“아, 괜찮아요. 어차피 잘 안 챙겨요.”

“그래도 고기반찬에 미역국은 먹어야 하는데.”

“저 미역국 별로 안 좋아해요.”

정확히는 아버지가 미역국이 든 냄비를 나한테 집어 던진 날부터 미역국이 싫어졌다.

하준 형이 머리를 헝클어주는 게 느껴져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어차피 모두 다 과거고 이제는 괜찮아졌으니까.

편의점에서 이거저거 챙기던 형이 편의점 조각 케이크를 발견하고 물었다.

“이거라도 사갈까?”

“저 혼자 먹는 건 별로. 나중에 큰 거 사서 다 같이 먹어요.”

멤버들을 위해 신중히 고른 간식거리와 음료수 봉투를 달랑거리며 하준 형과 조용히 익숙한 길을 걸었다.

오는 길에 지환이가 그렇게 학을 떼던 진실의 공원도 보였다.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즐겁게 나눌 수 있게 되어서, 늘 균형을 잘 맞춰주는 하준 형이 있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다행이었다.

“생일 축하해요, 경환이 형!”

“happy birthday!”

과자 봉투를 달랑거리며 숙소 문을 활짝 열자 입구에서부터 세빈이랑 힘찬이가 폭죽을 터트렸고, 지환이가 웃으며 고깔모자를 씌웠다.

“어…. 그러니까 깜짝 생일파티, 뭐 그런 거야?”

“와, 너무 재미없게 말한다!”

어어? 하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멍하니 있는 사이에 자리에 앉혀졌다. 상이 펴지더니 소불고기와 흰쌀밥, 미역국, 겉절이가 상 위에 펼쳐졌다.

그리고 아까 내가 말했던 커다란 케이크도.

“다 팀장님한테 허락받고 하는 거니까 마음껏 먹어.”

“어….”

“뭐야, 경환이 고장 났어? 말을 못 하는데?”

평소보다 조금 더 기분 좋아 보이는 영빈 형이 웃으면서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지환이가 케이크에 불을 붙이니 세빈이는 불을 끈다고 달려갔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경환 형!”

“와아!”

“생일 축하한다. 오늘 하루 고생 많았어.”

나를 가운데 두고 환하게 웃으면서 노래를 부르는 멤버들의 모습도, 불이 빛나는 케이크도 조금 현실감이 없어서 눈을 꿈벅거렸다.

“뭐해, 소원 빌고 불 꺼야지.”

“앗, 촛농 다 떨어진다! 형, 빨리!”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다 다시 불빛이 번지는 초를 바라보았다.

‘멤버들이랑 앞으로도 쭉 다 같이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

소원으로 빌고 불을 끄자 자기들이 더 신나서 재잘거리는 세빈이와 힘찬이가 있었고, 자꾸 아빠 미소 지으면서 고기를 내 쪽으로 밀어주는 지환이가 있었다.

즐거움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반짝거리는 영빈 형의 눈. 영빈 형의 시선에도,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서 내 앞에 놔주는 하준 형의 시선에도 신뢰가 담겨있었다.

“고마워, 역시 우리 멤버들이 최고네.”

생애 가장 행복한 생일이 될 것 같았다.

힘찬이가 케이크만 못 만지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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