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CHEER UP(6)
세팅된 컴퓨터와 기기들의 위치를 조금씩 바꿔서 최대한 내가 편할 것 같은 형태로 재구성해두었다.
내 공간이 생긴다는 것.
어릴 때 누나랑 같은 방을 쓰는 것도 싫었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주어진 내 공간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이 남달랐다.
지금도 숙소에서 멤버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지만, 사실 내가 그렇게까지 잘 적응할 줄은 몰랐으니까.
이전의 삶에선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어서 그게 더 심했고, 지금은 밖에서 지칠 때까지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고 돌아와 숙소에서 간신히 쉴 수 있어서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왠지 심장이 벌렁거리는 느낌이라 아직은 허전해 보이는 작업실 사진을 찍어서 누나에게 보냈다.
[이거 봐라! 내 작업실 생겼다! 내가 이정도임ㅋㅋㅋㅋㅋㅋ]
누님[ㅇㅇ]
[아 쫌….]
울 누나 [괜찮네]
[ㅎ…. 영혼 1그램은 담김?]
누님[ㅋㅋ근데 너무 허전하다]
[앞으로 채워야지. 대표님이 내 맘대로 꾸미랬어]
누님[뭐 필요한 거 있음 말해.]
[비싼거 말해도 괜찮?]
누님[ㅎㅎ ?]
누나의 영혼 없는 반응에 마음의 상처가 모락모락 피어날 때쯤, 작업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쾌활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 이제 작곡가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진짜 오자마자 놀릴 거예요? 아니, 근데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새벽 형들이 찾아왔다. 난 당연히 우리 애들인 줄 알았는데?
“그냥 찍었는데 맞더라? 너무 뻔한 거 아니냐. 얼른 바꿔.”
“보통 그렇게 쉽게 맞추는 거예요…?”
세비 형을 바라보며 눈으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늘 상냥했던 세비 형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 저 사람이 이상한 거 맞구나….
형들 뒤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고, 그 사람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는 사이 가영 형의 품에 있던 조금 커다란 고양이 인형이 갑자기 내 품으로 옮겨졌다.
“웬 인형이에요?”
“풉, 너 이거 모르냐? 검색 안 해보는구나?”
“아, 설마.”
“검색은 안 하는 편이 낫지. 가영 형은 너무 네티즌이야.”
가영 형은 언제 저장까지 해놨는지 손등에 있는 호랑이 스티커를 보이며 웃고 있던 팬 사인회 때의 내 사진을 보여줬다.
“너희 팬들이 너보고 호랑이가 되고 싶은 아깽이래.”
“후…. 그런 건 도대체 왜 찾아보시는 거예요.”
“이게 다 동생을 걱정하는 형의 마음 아니겠니.”
도움이 필요하다는 간절한 눈빛을 키스 형에게 보냈는데 뒤에서 구릿빛 팔이 날라와 가영 형의 뒤통수를 때렸다.
“아야, 누구야!”
“야, 이 리더 놈아. 초면인 후배 앞에서 내가 인사를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하냐.”
“아, 맞다. 지환아. 전 우리 메보, 현 군바리 반다진이야. 너 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어.”
“안녕하세요, 언래블 지환입니다.”
“다행히 우리 팀 애들이랑 다르게 예의가 바르구나. 반가워. 애들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왜인지 모르게 피로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두 눈동자만 호기심에 반짝거렸다.
뭐지, 왠지 모르겠지만 무섭다.
“하준이랑 애들 다 연습 중이야?”
“어, 아마 하준 형이랑 경환 형은 자기 작업실에 있을 거 같은데. 영빈 형이랑 찬이 세빈이는 보컬 룸에 있을 거 같아요.”
“애들한테 톡 해봐. 안 바쁘면 온 김에 얼굴 좀 보자고.”
“니가 연락하지 왜 애를 시키냐.”
여전히 키스 형은 가영 형을 타박했고, 입술이 댓발은 튀어나올 것 같았던 가영 형은 결국 하준 형에게 전화를 걸면서 내 작업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는 반다진이라는 선배님의 시선이 너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키스 형 뒤로 숨어버렸다.
“뭐야, 왜 피하냐.”
“형이 애를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니까 그러지. 형은 좀 문제가 있어.”
“니들이 그렇게 물고 빠니까 궁금해서 그러잖아.”
“다진아, 처음 보는 후배 앞이니까 말을 좀 예쁘게 하는 게 어떠니. 그러다 처맞으면 아플 텐데.”
“율이 너는 왜 나한테만 뭐라 하냐.”
세비 형에게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다진 선배님의 모습에 멍하니 키스 형을 바라보자, 형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형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좀… 음… 힘찬이 같아.”
“아, 이해했어요.”
지극히 호기심 위주고 감정적이라 남들이 보기엔 왜 저래 싶기도 한 사람이구나.
“군대도 우리나 회사랑 상의한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군대를 가야겠다고 통보한 새ㄲ… 후, 사람이야.”
“고생이… 많네요. 형들도.”
“그러니까 힘찬이는 미리 잘 교육해놔. 그래야 우리 꼴 안 난다.”
“그런데 정말 그냥 궁금하다고 오신 거예요?”
귀하디귀한 휴가를 그런 데다 쓴다고?
“어. 너 우리 앨범에 피처링 했더라. 목소리 쓰는 게 좀 신기해서? 그래서 그러는데 내 곡 하나 줄까?”
“너, 쫌! 앞뒤 잘라먹고 말하지 말랬지!”
세비 형이 분노에 찬 샤우팅을 지르자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가영 형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덩달아 형 뒤에 있던 우리 애들도 주춤거렸다.
오늘 세비 형 이미지가 많이 망가지는구나. 형, 미안해요….
“대표님이 이번에도 곡 하나 팔 생각 없냐고 물어보셔서 우리가 각자 만들었던 곡 좀 뒤적거리고 있었거든. 근데 다진 형이 들어오더니 자기 곡을 너한테 주고 싶다고 하더라고.”
“갑자기요…?”
“이 형은 원래 그래.”
“일단 우진 형한테 말을….”
키스 형의 설명을 들으니까 그제야 조금 상황이 정리됐다.
왠지 가영 형이 안겨준 고양이 인형을 쓰다듬고 있자니 심신의 안정이 오는 것 같았다. 포잉 대신인가?
좀 찐빵같이 생긴 게 포잉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이 난장판에 엮이고 싶지 않아진 나는 허허롭게 웃으며 고양이만 쓰다듬고 있었다. 모두가 들어오기엔 작업실 너무 좁았던 탓에 우진 형의 인솔하에 회의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힘찬이는 어느새 다진 선배님과 쿵짝이 맞아 영혼의 단짝처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그 중간중간 경환 형이 한마디씩 던지는데 다진 선배님은 그게 마음에 드는지 빵빵 터지는 중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하준 형과 세비 형의 표정이 비슷한 걸 보면, 하준 형이 힘든 게 꼭 리더여서라기보다 천성이구나 싶었다.
영빈 형과 세빈이는 가영 형에게 발성에 대해 질문하느라 바빴고 키스 형은 나랑 비슷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진 형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어. 나도.”
우진 형은 곡 얘기는 팀장님과 하는 게 좋겠다면서 소현 팀장님을 부르러 갔다.
문득 이 풍경이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자극이 되어주며 먼저 간 길을 알려주는 선배들이 있었고, 의욕 넘치는 동료들이 있다.
심지어 같은 소속사도 아닌데.
이 상태라면 어느 날 두 회사가 합쳐진다고 해도 그렇구나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평화롭네요.”
“…?”
내 중얼거림을 들은 키스 형은 얘가 어디 아픈가 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시장통처럼 시끄럽고 온갖 이야기가 떠돌아다니긴 하지만, 그냥 늘 있는 풍경인걸?
“늘 이렇잖아요. 그럼 평화로운 거죠, 뭐. 하하.”
“그래, 그렇게 포기했구나.”
포기가 아니라니까요.
“얘들아, 안녕! 새벽도 오랜만.”
“안녕하세요!”
“소현 씨는 그사이 더 늙었네요!”
“어느 집 하룻강아지가 또 덤벼드는구나.”
반다진 선배님이 우리 팀장님에게 건네는 말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새벽 멤버들은 그러려니 하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소현 팀장님이 다른 회사에 잠깐 계실 때, 다진이가 거기 연습생이었어. 팀장님이 회사 떠나면서 다진이도 연습생 때려치웠고.”
우리 팀장님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신 걸까.
팀장님의 등장에 우리 애들은 전부 자세를 바로 하고 얌전해졌지만, 새벽 형님들은 평소와 같았다.
“곡은 그냥 메일로 보내줘도 될 것을 굳이 찾아왔어.”
“어울리는 사람인지 눈으로 한번 보고 싶어서요.”
“하준이가 작업 때문에 물어본 것도 있었고.”
그러니까 곡이 주목적이 아니라 그냥 놀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래. 뭐 서로 교류하는 건 좋은 일이니까. 그건 그렇고 내 새끼들, 음방에 나갈래?”
“갑자기요?”
하준 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팀장님에게 물었다.
내가 우진 형에게 말하긴 했지만… 이건 우진 형이 아니라 팀장님 쪽으로 따로 연락이 온 건가 싶어서 얌전히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졸업식 순위가 조금씩 계속 올라가고 있는 건 알고 있지? 드라마 주인공들이랑 같이 부르는 무대를 갖고 싶다는 요청이 있어서.”
드라마 스토리가 절정을 향해 가는 상황이라 겸사겸사 홍보를 하고 싶은 듯했다.
드라마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사방에서 들리는 이야기들만 조합해도 그럭저럭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었으니까.
“뭐, 병풍이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서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할래요!”
어디든 불러주면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게 또 우리니까.
예능도 좋고 뭐 다른 것도 다 좋지만, 우리 멤버들도 나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소가 많이 고팠다.
첫 앨범이 꽤 괜찮은 성적을 거뒀지만, 노래가 너무 무거워서 여름 시즌에 어울리지 않아 들어오는 행사도 없었다.
하준 형이랑 경환 형이 그래서 더더욱이 이번 앨범의 곡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우리가 방송 출연을 안 하니까 너희한테 썩 도움도 안 되네.”
“에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같이 작업한 것만 해도 큰 경험이었어요.”
새벽은 공중파 방송에 잘나가지 않았다.
데뷔 초반에 방송국 쪽 수작에 많이 질려서 되도록이면 방송은 나가지 않았고, 가끔 음악 방송 무대에 나가거나 라디오에 간간이 출연하는 정도였다.
회사도 작아서 을도 병도 아닌, 갑을병정 중 정의 ‘ㅇ’ 정도 위치였다고.
그 후에 새벽이 잘나가게 되자 출연을 요청하는 프로도 늘어났었다고 했다.
방송국에 질려서 출연을 거부했던 게 어느새 음악에만 빠져있는 신비주의 그룹이 되어 있었고.
그중 몇 번 재밌게 봤던 예능 프로그램에 섭외 요청이 와서 다시 나가봤지만, 같이 초대된 신인 아이돌들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놓는 걸 보고 그 뒤로는 아예 접었다고 들었었다.
“그냥 음악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 게 어딘가 싶어. 다행히 회사도 그런 면에서는 많이 받아주는 쪽이고.”
“맞아. 그러다 보니까 너희랑 어디 같이 출연해 주지도 못했네.”
갑자기 가영 형과 세비 형이 미안하단 듯이 말해서 당황한 우리는 형들을 둘러싸고 쩔쩔맸다.
“형들이 저희한테 얼마나 큰 의지가 되는데요. 진짜 그런 말 마세요.”
“맞아요! 왜 그런 말을 해요. 속상하게.”
시무룩해 하는 형들을 달래느라 뒤에서 얼굴을 부여잡는 키스 형을 보지 못한 게 실수였다.
“저희는 형들이랑 같이하는 건 뭐든지 다 좋아요!”
“그렇대요, 팀장님.”
“네?”
“하, 내 새끼들은 왜 이렇게 순진한지.”
팀장님의 탄식과 함께 씩 웃던 세비 형이 웬 종이를 팔랑거렸다.
그 종이의 표지로 추정되는 겉면에는 어떤 프로그램 이름이 적혀있었다.
“슬기로운… 탐구생활?”
“응, 우리랑 너희랑 같이 출연할 프로그램이야.”
이렇게 갑자기요?
순진해 빠진 우리 멤버들과 나는 얼떨떨한 얼굴이 되어 두 형님과 팀장님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고, 팀장님은 씁쓸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휴가를… 보내준다는 그런 프로그램인데, 음…. 얘들아 힘내, 파이팅.”
음악 프로그램 나가고 싶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