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CHEER UP(5)
“새집에서 잠들은 잘 잤어?”
“네!”
“완전 푹 잤어요!”
지난밤 무슨 꿈을 꿨는지 설명하는 찬이 모습에, 정윤 실장님의 얼굴에는 말 안 듣는 장난꾸러기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런 표정이 떠올랐다.
저는 좀 빼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미궁 탈출에서 지환이가 강렬한 인상을 주고 왔다고 우진 씨가 그러더라.”
“하, 하하….”
“잘했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임팩트 있었다고 하더라. 이번 주 금요일에 첫방 한다고 하니까 기대할게.”
그게 정윤 실장님에게까지 전해질 거라고 생각 못 했기에 그냥 어색한 웃음으로 때웠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이미 우리가 미궁 탈출에 출연한다고 기사도 내보내고 공식 홈에도 홍보도 했다는 걸 듣긴 했다.
아직은 우리 이름을 검색해보거나 기사를 찾아볼 용기가 부족했다.
내 소중한 멘탈, 지켜줘야지.
“어때, 집은 마음에 드니?”
“네! 전 엄청 마음에 들어요.”
“저도요! 거실이 넓어서 굴러다녀도 돼요!”
“거실이 중요한 거였어?”
멤버들이 각기 새로 이사한 숙소에 대해 조잘거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힌 실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이사한 이유 중에 보안에 대한 부분도 있다고 말했잖아. 너희한테는 이야기 안 했었지만, 이상한 일이 몇 번 있었어.”
“네?”
실장님이 꺼낸 말에 멤버들 모두 의아한 얼굴이 되었고 하준 형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가 숙소 들어가면 밖에 잘 안 나가고, 워낙 숙소에도 늦게 들어가니까 굳이 이야기 안 했던 것도 있긴 한데… 몇 번, 누군가 숙소에 들어가려는 시도가 있었어.”
“헐, 소름….”
“그, 사생이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벌써 사생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하아, 잠금장치가 훼손되고 숙소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몇 명 보였다고 해서 우진 씨가 한동안 계속 체크했어.”
“아, 그래서 형이 가끔 안 보였구나….”
옆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세빈이가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느끼기 전에 회사에서 먼저 막아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간 사생팬은 악질 스토커에 망상 환자에 가깝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런지,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뭐, 깔끔하게 이사했고 그 건물은 외부인 출입이 불가능하니까 한결 나을 거야.”
“네엡.”
“자, 그럼 해산.”
숙소 이전에 얽힌 이야기를 끝내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실장님이 나가셨고, 우리는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사생이면 막 집에 들어와서 옷도 훔쳐 가고 그런다던데.”
“그러기 전에 이사한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찬이 겁 없는 줄 알았더니 사람은 무서워?”
“귀신은 없는데 사람은 아니잖아.”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며 힘찬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더니 볼멘 목소리로 항변하는 모습에 다들 조금 웃었다.
힘찬이가 팀에 있으면 확실히 팀 분위기가 밝아져서 그게 좋았다.
하지만 불안한 요소는 없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한쪽에서 내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포잉을 향해 속삭였다.
‘포잉.’
‘양심 없는 계약자야, 또 나야?’
‘헷…. 우리 포잉은 천재네! 내가 무슨 부탁 할지 알고 있구나?’
‘그렇게 웃지 마셈. 님은 귀여울 나이 지났음.’
‘와, 우리 솜뭉치들은 내가, 어? 응?’
‘나 감.’
차마 내 입으로 내가 귀엽다고 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해 더듬거리자, 포잉은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간다는 말을 남기고 시크하게 뒤돌아서 회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투덜거리면서도 늘 다 해주는 아낌없는 포잉 같으니라고.
이걸로 혹시라도 멤버들이 위험해질 일이 없겠지 하고 마음을 놓았고, 아직 근심 걱정이 가득해 보이는 멤버들을 잘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하준 형은 우리를 해산시켰다.
오늘도 각자 바쁘게 보내야 할 일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환아, 너는 나 따라와.”
“네? 왜요?”
“작업실 다 됐대.”
“오오!”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기존에 쓰던 작업실에 가려던 내 발걸음을 잡은 건 우진 형이었다.
대표님이 약속했던 내 작업실이 완성되었다는 말에 각자 연습실로 흩어지려던 멤버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구경 가자!”
“갑시다!”
“야야, 너희가 더 신나면 어떡해.”
하준 형이 신나서 뛰어갈 것 같은 찬이랑 세빈이 뒷덜미를 잡아 진정시키는 사이, 영빈 형이 내 얼굴을 힐끔 보더니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좋으면 쟤들처럼 뛰어도 되고 표현도 하고 해. 얼굴은 신나 죽을 거 같은데 왜 멍하니 있어.”
“얼른 가자.”
“넵!”
영빈 형 말에 결국 배시시 웃어버린 나는 차마 뛰진 못하고 우진 형의 뒤를 졸졸졸 따라갔다.
그리고 그런 내 뒤로 멤버들이 한 줄로 졸졸 쫓아왔다.
아니 왜 줄 서서 따라와, 창피하게!
작업실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들어갈 수 있도록 잠겨 있었다. 초기 비밀번호는 우리 데뷔 일인 0610으로 해놨다는 우진 형의 말에 다들 조금 웃었다.
작업실 내부 한쪽 벽에는 작업에 필요한 기기들이 가득 차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비어있었다.
“나머지 공간은 네 취향껏 꾸며보라고 대표님이 그러시더라.”
“와…. 뭔가 되게 신기해. 지환이가 여기 있으니까 엄청 전문가 같잖아?”
“전문가까진 아직 못 되는 게 맞긴 한데… 왜 찬이 네가 말하니까 욱하지?”
처음으로 가져본 내 작업실에 긴장했던 마음은 때마침 장난을 걸어온 찬이를 응징하느라 사라졌다.
“어휴, 공 선생님 앞으로 곡 열심히 뽑아내 주십셔.”
“아니, 뭐예요!”
경환 형까지 히죽거리며 어깨를 두드리는데 민망해서 열이 확 올랐다.
“형, 멋있어요! 우와!”
“세빈아, 형도 작업실 있는데.”
“형도 있어….”
“형들 작업실도 구경 가자!”
그동안 하준 형이나 경환 형이 작업할 때는 방해하지 않는다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근처에 잘 가지 않았던 멤버들이, 오늘 내 작업실을 보더니 두 형님을 끌고 나갔다.
다들 이미 한두 번씩은 가봤지만, 그래도 분위기에 휩쓸려 처음 가는 것처럼 신나서 나가는 모습에 우진 형이 피식 웃었다.
“형, 근데 우리 음악 방송은 없어요…?”
“걱정돼서 그래?”
“그냥요.”
멤버들이 모두 나간 후 우진 형을 붙잡아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동안은 내 죄책감 때문에 ‘졸업식’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회사에서도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이상하게 조금 눈치 본다는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관심이 늘 목마른 우리 애들을 생각하면 나 하나 때문에 그러는 것도 배부른 투정이었고, 원래도 언래블이 불렀던 노래니 혼자만 감수하기로 했다.
“OST가 잘되면 음악 방송에도 불리고 하던데 우리는 그 정도는 안 되는 거예요?”
“사실 인터뷰나 드라마 관련해서 좀 엮어서 방송 출연 요청이 조금 있어. 근데 네가 그렇게 아프고 하니까 회사에서는 강요하지 말자는 의견이 더 커서.”
“아….”
회사에서는 내가 그런 관심에 취약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았다. 이미 촬영 중에 다치기도 한데다 그 뒤로는 팬 사인회랑 다른 예능 촬영도 있고 했으니 정신도 없었을 거고.
“저는 형이랑 팀장님이랑 다들 믿어요. 작업실도 받고 하니까 막 더 열심히 활동하고 싶어요.”
“그래, 형만 믿어라. 내가 열심히 영업 다닐 테니까.”
조심스러운 내 말에도 듬직한 우리 우진 형은 걱정하지 말라고 토닥여주고 작업실을 나갔다.
솔직히 저 형만큼 언래블을 가장 가까이에서 겪고 챙겨준 사람도 없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형한테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안해졌다.
내가 더 잘해야지.
그냥 막연하던 생각들이 하나, 둘 조금씩 실현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내가 무언가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올 때마다 이전의 삶을 떠올리게 되었다.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만 지냈을까.
늘 몸은 자잘하게 아프고, 사람 사이의 관계는 버겁고, 감정이 부딪히는 것들은 무서웠다.
가족이 제공해 주는 안락한 보금자리에 숨어 적당히, 대충 삶을 살아갔었던 내가 이제 와서 조금 후회스럽기도 했다.
언래블 덕질을 시작하면서부터 외출도 하고 사람들도 조금씩 더 많이 만나고 했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건 힘들었다.
한 아이돌 그룹을 덕질을 한다는 것 자체가 거대한 공통분모 아래 무수히 다양한 갈래가 나뉘는 것 같아서, 좋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가끔 그때 함께 덕질하던 덕질 메이트들이 그립긴 했다.
언젠가 여기에서 그 얼굴들을 본다면,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자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겁게 가라앉아가기에,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나는 이게 문제야.”
천성이 어디 안 간다는 게 이런 걸까.
혼자 있으면 지나치게 생각이 무거워져 끝없는 어딘가로 떨어지는 것처럼 가라앉아버린다.
늘 멤버들과 함께 있고, 작업할 때도 포잉이 함께 있어서 한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포잉에게 다른 일을 부탁하고 혼자가 되니 또 슬며시 무거운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 핸드폰 진동에 화들짝 놀라 상념에서 깨어났다. 가영 형의 전화였다.
“네, 형.”
- 야! 너 왜 연락 안 해!
“네?”
- 하준이한테 못 들었어?
“아….”
그러고 보니 하준 형이 가영 형에게 연락하라고 했는데 넋 놓고 있다가 잊어버린 것 같았다.
“미안해요, 형. 제가 요새 제정신이 아니에요.”
- 어휴, 이런 걸 동생이라고 내가!
뭔가 또 북적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조금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 야, 가영이 좀 치워봐. 나도 얘기 좀 하자
형들과의 통화는 늘 북적거려서 듣는 나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뭔가 비명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떠들썩한 시간이 흐르고 그나마 차분한 목소리의 세비 형이 전화기를 잡은 것 같았다.
역시 새벽 실세는 세비 형이지.
- 지환아, 몸은 괜찮아?
“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지금은 괜찮아요.
- 그렇게 몸이 약해서 어떡하냐. 회사에 보약이라도 지어달라고 해.
“어우, 그건 싫어요. 쓰잖아요.”
- 그래도 몸은 잘 챙겨야지.
- 얘가 아직 어려서 약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네. 으갹!
- 윤혁아, 한가영 좀 묶어놓든가 해라.
차분하게 걱정해 주는 세비 형의 목소리 사이로 가영 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더니, 이상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담담하게 가영 형을 묶어두라고 말하는 세비 형의 목소리에 왠지 흠칫했다.
세비 형 말은 앞으로도 꼭 잘 들어야지….
- 어휴, 가영이가 자꾸 옆에서 시끄럽게 굴어서 치웠어.
“하, 하하…. 가영 형 죽은 거 아니죠?
- 쟤 죽으면 우리 은퇴해야 해서 아직 안 돼.
“아, 그게 문제구나 ….”
역시 형들의 스케일은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른 게 아니라, 우리 팀 애가 너 보고 싶다고 하는데 언제 시간 되니?
“네? 저를요?”
- 어. 다진이 알지?
“아, 네 알죠.
근데 나를 왜…
그 뒤로 이어진 세비 형의 설명은, 휴가 나온 새벽의 메인보컬 반다진이 이번에 형들이 냈던 미니 앨범을 듣더니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는 것.
- 이번에 정균 아저씨가 곡 내놓으라고 한 것도 있고 해서 회사로 갈 건데, 다진이도 같이 가려고. 애들 다 회사에 있지?
“네. 오늘은 다 회사에 있어요.”
- 그래. 우진 형한테 전화해보고 된다 하면 지금 갈게.
“네? 우진 형 번호가 있어요?”
- 하하, 이런 건 기본이지.
상큼하게 웃으며 통화를 끊는 세비 형의 목소리에 어째서인지 가영 형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
같이 오래 지내면 닮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걸 우리 팀에 대입해서 내가 찬이를 닮는다고 생각했더니 소름이 돋았다.
“안돼, 그건 절대 안 되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세빈이가 힘찬이 닮는 것도 잘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곤 하준 형과 우진 형에게 간단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래도 타이틀곡 때문에 괜찮은 곡 있으면 내놓으라고 새벽 형들에게도 연락이 갔었던 모양이었다.
아, 작업실 보면 또 가영 형이 신나게 놀릴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