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CHEER UP(1)
“저어…. 많이 무서워요?”
“응? 아, 지환 군도 무서운 거 잘 못보는 편이구나?”
소탈하게 웃으면서 내 등을 두드려주는 사람은 MC로 몸값이 국내에서 손꼽힌다는 이영진이었다.
어느새 나와 찬이, 세빈이는 미궁 탈출의 촬영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미 이 프로그램에 대해 빠삭한 사람인만큼, 내가 의지할 사람도 메인 MC인 이 사람뿐이었다.
“제가 좀비물이나 그런 건 좀 괜찮은데 귀신은 조금….”
“어쩌나. 좀비물은 저번에 해서 그거 안 할 거 같은데….”
“형, 우리가 있잖아요!”
오프닝 촬영을 위해 세트장 한편에 마련된 공간에서 사전에 미팅을 했다. 그때 대화도 조금 나눈 덕분에 혼자 내적 친분이 생겨, 이영진에게 슬며시 말을 걸었다.
뭐라도 알아야 최대한 덜 쫄보 같아 보일 것 같았던 안쓰러운 내 몸부림이었다.
프로그램의 방향은 처음 시즌과 동일했다.
거대한 미로 같은 세트장에서 중간중간 몇 가지 퍼즐을 맞춰야 올바른 길에 연결되고, 퍼즐을 맞추지 못하면 함정이 발동하거나 막다른 길로 연결된다고 했었다.
제한된 시간은 없었지만, 그 말은 퇴근도 언제 할지 모른다는 거였다. 더불어 탈출에 성공하면 상금 오백만 원이 출연진의 이름으로 기부되고, 실패할 경우에는 출연진 측에서 이백만 원에 상당하는 금액을 기부해야 했다.
부상으로는 한우나 백화점 상품권, 전자기기 등이 출연진에게 주어져서 사실상 재미와 대외적인 이미지 모두 잡겠다는 게 이 프로그램의 취지였다.
덕분에 이 프로그램은 고정 시청자층이 탄탄한 편이었고, 메인 MC 격인 두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 에피소드 새로운 사람들을 투입해서 뻔한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조정하고 있었다.
사전에 미팅을 통해 출연 일정과 앞으로 전개에 대해 충분히 들은 데다가, 회사에서도 이전 시즌의 내용을 요약해서 우리에게 최대한 맞춤 교육을 해주었다.
덕분에 힘찬이랑 세빈이는 퍼즐게임을 한다는 생각에 들떠서 조금 신나하고 있었다.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스태프분들에게 말을 걸고 인사하고 인싸다운 면모를 뽐내는 찬이, 내 옆에 딱 붙어 낯선 사람들을 어려워하면서도 눈 마주칠 때마다 꾸벅거리며 인사하는 세빈이.
이미 한차례 인사를 다 돌았기에 구명줄 같은 메인 MC 옆에 붙어서 살 궁리를 하고 있는 나.
이런 우리가 조금 웃겼는지 스태프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대외적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성격이 나쁘지 않은 편인 듯 이영진도 우리에게 호의적이었고 스태프들과도 친밀해 보였다.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심란한 눈으로 바라보는 우진 형까지.
그렇게 첫 촬영이 시작하기 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영진입니다!”
“류진호입니다, 반갑습니다.”
“진호 씨, 그동안 좀 잘생겨진 거 같아요?”
“불안하게 왜 그러세요. 저 함정에 버리려고 벌써부터 사전 작업하시는 거예요?”
“에헤이, 설마요.”
능글맞게 웃으며 류진호의 옆구리는 찌르는 이영진은 굉장히 넉살 좋게 생긴 옆집 아저씨 같았다.
편안하고 조금 흔하게 생겼다는 게 보통의 평이었다.
옆자리에 앉아서 잠시 대화를 해본 바로는 몸 관리도 꽤 열심히 하는 것 같았고, 활달한 성격인 것 같았다.
“자자, 우리가 이럴 게 아니라 새로운 친구들 소개를 해드려야죠.”
“너무 잘생긴 사람은 부르지 말라니까, 김악규 PD. 하, 진짜.”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과장된 서러움 표출하는 사람은 류진호로, 호쾌한 미남 타입이지만 이 프로에서는 겁이 많은 포지션이었다.
실제로도 공포물은 손도 안 댄다고 하더라.
“요즘에 이 친구들 이름이 꽤 많이 들려요, 그렇죠?”
“몇 달 안 된 신인이라는데 벌써 자체제작돌이라는 별명도 있다고 하고, 그 뭐야 드라마 OST도 이 친구들이 만들었다던데.”
“아, 나 그거 알아요. 졸업식이라고 되게 좋아요.”
“우리끼리 수다 떨 게 아니라 빨리 소개합시다. 김악규 저 인간이 또 대본 가지고 삿대질하네.”
만담처럼 주거니 받거니 우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깔아준 두 MC가 우리 이름을 불렀다.
“언래블, 어서 오세요!”
두 MC의 박수와 함께 무대용 메이크업이 아닌 방송용 메이크업을 마친 우리 셋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그들에게 다가갔고,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둘, 셋!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어휴, 역시 신인이라고 아직 군기가 바짝 들어있네.”
“이런 친구들도 저기 들어가면 다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긴 할 텐데.”
“그전에 개인별로 소개해볼까요?”
서글서글하게 웃던 찬이가 먼저 인사를 하고, 조금 수줍게 세빈이가 인사를 한 뒤, 나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홍삼 액기스 소포장을 꺼내 두 MC에게 내밀었다.
“언래블 환이라고 합니다. 살려주세요.”
오프닝은 큰 제한 없이 적당히 자기 개성을 표출하라는 메인 PD님의 말이 있었기에, 나는 거리낌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물론 내가 내민 홍삼을 받아든 두 MC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빵 터져서 웃기 바빴다.
“환아, 살려주세요가 뭐야….”
“맞잖아. 우리 살아나가야지.”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내 옷을 잡아끄는 찬이에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멀리서 나를 지켜보던 우진 형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와, 진짜 이 친구들 마음에 드네!”
“맞아,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지. 제대로 알고 왔네.”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두 MC와 갈 길 잃은 세빈이의 동공, 담담하게 웃고 있는 나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찬이가 카메라 안에 꽤 재밌게 담겼는지 김악규 PD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출발 아닌가? 아니면 어쩔 수 없지….
“오늘은 다들 지갑 열어야 될 겁니다.”
“그 멘트 좀 식상하지 않아? 우리가 그래도 제작진보다는 많이 이긴 것 같은데.”
“제발 세트 부수지 말고 정석으로 탈출하시라고 드리는 말씀이잖아요.”
“아아니, 우리가 부쉈나? 힘 넘치는 애들이 이케, 어? 하다 보니까 막 그런 거지!”
조금 느릿하게 어깃장을 놓듯 투덜거리는 이영진의 말에 복장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는 PD. 연출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재밌었다.
“그래서 이번엔 더 튼튼하고 복잡하게 만들었으니까 제발! 머리 써서 탈출하세요!”
“그래서 이번엔 뭐가 나와요?”
“그거야 들어가 보면 알겠죠.”
능글맞게 웃으며 우리에게 세트장의 출입구 문을 가리키는 PD의 모습이 왠지 얄미워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지환 군, 너무 걱정하지 마요. 어떻게든 되더라고.”
“저희가 한참 배워야 하는데 말 편히 해주세요.”
“어어, 그럴까?”
촬영장 밖에서 이미 말 편히 해달라고 대화도 나눈 사이라 많이 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사람이야 적응한다 치지만 거대한 건물 같은 이 세트장은 좀처럼 적응이 안 될 것 같다 싶었다.
우리 애들과 두 MC 다섯 명이 조심스럽게 출입문으로 향했다.
처음이다 보니 우리 애들은 두 MC 뒤에 빼꼼 숨어있는 모습이었다.
찬이야 튼튼하니까 그렇다 쳐도 세빈이는 아직 작아서 걱정이 된 나는 세빈이를 슬쩍 내 등 뒤로 보냈다.
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 세빈이 모습에 나도 같이 웃어버렸다.
귀여운 내 새끼.
그 와중에 힘찬이는 낯선 공간이 조금 걱정되었는지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고, 나는 슬며시 찬이 손을 빼내며 왼쪽 팔을 내밀어 줬다.
옷자락을 뺏기자 조금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찬이도 내민 팔을 잡더니 방긋 웃었다.
“보통 처음은 문 열자마자 뭐가 튀어나오진 않아서 괜찮아. 들어가서가 문제지.”
“일단 지금은 안전한 거네요?”
“그렇지. 그게 얼마나 갈진 모르지만….”
그동안 데인 게 많은지 조금 툴툴거리면서도 씩씩하게 문을 연 류진호 앞에는 고 저택의 응접실을 옮겨다 놓은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모두가 천천히 응접실에 들어서자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철컥하면서 문이 잠겼다.
이제부터는 어딘가에 있는 탈출구를 찾아서 나가든가 건물을 부수고 나가든가 둘 중 하나였다.
“이제부터 이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단서가 될만한 내용들을 찾아야 해요.”
“일종의 방 탈출 같은 거죠?”
“그렇지. 언래블은 이런 거 잘 아나?”
“전 머리 쓰는 건 약하니까 힘쓰는 걸 할게요!”
“찬아, 그거 그렇게 막 당당하게 할 얘기는 아니잖아.
저는 퍼즐게임을 좋아하는 편이고, 저희 막내가 좀 똘똘해요.”
“이번엔 제대로 데려왔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우리는 각자 흩어져 테이블, 소파, 선반 등을 뒤지고 다녔고, 힘찬이는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자기가 둘러보겠다 말하더니 씩씩하게 올라갔다.
“쟤는 진짜 겁도 없어.”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속에서 한숨을 푹 내쉰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낡은 수첩의 내용을 빠르게 뒤지기 시작했다.
“이건 일지 같아요. 왜 이 저택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 같은데.”
“문은 다 잠겨있어요. 각각 열쇠를 찾거나 퍼즐을 맞춰야 풀리는 것 같아요.”
“저쪽에 뭔가 맞춰야 하는 게 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
사람들은 각각 정찰 결과를 하나둘 설명하기 시작했고, 일지를 꼼꼼히 살핀 나는 류진호가 뭔가 맞춰야 한다고 말했던 퍼즐 쪽으로 수첩을 들고 다가갔다.
“여기에 있던 대부호가 말년에 불로장생에 눈이 멀어서 금단의 시술에 손을 댔다고 해요. 이 수첩은 그 사람의 실험을 돕던 어떤 연구원의 일지고요.”
나는 수첩을 통해 확인한 내용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며 3X3의 칸마다 어떤 도형이 그려진 퍼즐 앞에 섰다.
“여기서부터가 시작인 것 같아요.”
“맞아. 다른 곳은 전부 잠겨있어서 다른 힌트가 없어.”
“이 층도 전부 문이 잠겨있어요.”
⊙⊙⊙
⊙⊙⊙
⊙⊙⊙
문에 놓은 퍼즐은 [◎ ⊙◆]세 개의 그림이 돌아가면서 계속 나오는 형태라, 저 퍼즐을 제대로 맞추면 문이 열릴 것 같았다.
이전 생에 나는 아싸였고, 혼자 놀기를 좋아해서 퍼즐 게임을 꽤 즐겨 했던 경험이 남아있었다.
“지하에서는 연단술과 생체 실험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실험은 각각의 방에서 각기 다른 케이스를 두고 진행되었다. 지하실로 가는 문을 그렇게 숨길 기술을 가진 김부호의 능력이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내용을 멤버들에게 짚어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형, 연단술이 뭐에요?”
“음…. 불로장생할 수 있는 약을 만드는 고대 중국의 도술 같은 거야. 연금술은 알지? 그거랑 비슷한데, 연금술은 금을. 연단술은 불로장생 약을 추구하는 게 좀 달라.”
“이 중에 어떤 문이 지하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는데, 분위기상 저희는 지하로 탈출해야 하는 것 같죠…?”
“김악규 PD 이놈이 우리 잘되는 꼴은 못 보니까 아주 엉망으로 꼬아놨을 거야.”
“이대로 바꾸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공백은 어떻게 만드는지를 모르겠네요.”
우리는 서로 알고 있는 내용을 주고받으며 하나씩 해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수첩에 그려진 모양을 토대로 문에 놓인 그림을 바꿨지만, 정작 남은 공간과 일치하는 모습이 없어서 이영진과 나는 문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그림을 계속 넘겨봤지만 수첩에 그려진 것과 동일한 내용은 없었다.
“다른 걸 먼저 풀어야 하나?”
“그러기에는 다른 곳에 힌트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러던 찰나에 조그맣고 동그란 머리통이 우리 둘 사이에 들어왔다.
“이걸로 한번 움직여 보는 건 어때요?”
“자석?”
세빈이가 어디서 찾은 건지 학교에서 실험할 때나 보던 N극과 S극이 색칠된 막대자석을 들고 왔다. 그러더니 여태 이영진과 내가 고심하던 위치에 자석을 가져다 댔다.
“어?”
N극을 댔을 때는 그냥 찰싹 붙는 게 전부였던 퍼즐이 S극을 들이대자 뒤로 밀리면서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니! 이게 무슨!”
모양 외에 모든 공간의 퍼즐이 사라지자 둔한 소리와 함께 문에서 철컥 소리가 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빈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수줍게 웃었다.
“보통 이런 곳에서 소품도 주의 깊게 챙겨야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우리 애는 천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