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너나 잘해(4)
순서대로 모두 사인을 마친 우리는 숨을 내쉬며 마음을 한번 진정시켰다.
첫 경험이기에 다들 얼굴에는 피로보다 뿌듯함이 맴돌고 있었다.
“다들 들어올 때 번호표 뽑았잖아요. 잘 가지고 있죠?”
“네!”
“옳지, 우리 솜뭉치들 착하다.”
하준 형은 어쩐지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고 솜뭉치들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고 있었다.
“우리 대화 시간이 아쉬웠잖아요. 그래서 지금부터 10명을 뽑아서 질문을 받고, 멤버들이 대답을 할 거예요.”
“와아!”
“몇 번 뽑았으면 좋겠어요?”
“25번이요!”
“11번!”
“92번이요!”
하준 형과 힘찬이가 솜뭉치들과 대화하며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어서 나는 조금 편한 마음으로 솜뭉치들을 더 바라볼 수 있었다.
경환 형은 번호표가 담긴 박스를 들고 흔들고 있었고, 세빈이는 네임 팬으로 테이블 위에 무언가 쓰고 있었다.
어째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아, 이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가진 번호를 부르는 솜뭉치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하준 형은 경환 형에게 순서를 넘겼고, 씩 웃던 경환 형이 박스를 마구 흔들더니 금방 번호를 하나 뽑아 들었다.
“음…. 34번, 누구예요?”
손을 번쩍 든 솜뭉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어서 무척이나 귀여웠다. 우리 모두 그 솜뭉치가 무슨 질문을 할지 기대하고 있었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 알려주세요! 아니면 기억에 많이 남는 음식이나.”
씩씩하게 물어보는 솜뭉치의 질문에 모든 멤버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먹을 거.
그것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게 없었고 우리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저는 환이가 해준 김치볶음밥이요. 이제는 엄마가 해준 것보다 환이가 해준 게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저는 찬이 어머님이 해주신 갈비찜이요. 찬이 어머님이 진짜 요리 잘하셔서 엄청 감탄하면서 다 같이 먹었어요.”
먼저 마이크를 잡은 경환 형의 대답이 있었고, 그다음은 내 대답이었다.
그 갈비찜을 떠올리면 지금도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았다.
감자와 고구마를 넣은 갈비찜은 신세계였고, 고기도 맛있었지만 양념이 잔뜩 배어있는 고구마와 감자는 비교 불가였다.
“제일 좋아하는 건 소불고기인데, 요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무래도 환이가 해주는 김치볶음밥인 것 같아요.”
“제일 좋아하는 건 고기요! 고기는 전부다! 치킨 포함!”
열심히 고민하던 영빈 형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찬이가 대답을 이어갔다.
“좋아하는 건 김치찌개인데 최근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멤버들이랑 먹은 탕수육인 거 같아요.”
“전 치킨이 제일 좋아요. 환이 형이 해주는 김치볶음밥도 좋고!”
그리고 이어진 하준 형과 세빈이 대답에 솜뭉치들은 또 자기들끼리 여러 얘기를 재잘거렸다.
“아무래도 저보고 계속 밥해달라고 지금 다들 밑밥 까는 것 같아서 불안한데요?”
“에이, 우리가 설마 너를 부려먹겠어?”
“입술에 침 발랐어?”
“립밤 발랐지.”
내가 수상쩍다는 듯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어필하는 찬이의 모습에 내 의혹은 더 깊어져만 갔다.
우리 힘찬이가 이렇게 이제 입바른 소리도 하고, 헛소리도 하고.
하, 참.
“그럼 다음 번호 뽑을게요. 이번엔 찬이가 뽑아보자.”
“전 남자답게 한 번에 갈게요! 72번?”
“저예요!”
남자답다기보다 그냥 씩씩했던 우리 찬이의 뽑기와 손을 번쩍 든 솜뭉치 모습에 다들 웃고 있었다.
서로를 알아가는 데는 대화가 가장 좋은 수단이었지만, 아이돌과 팬은 직접 대화를 나누는 시간보다 거리를 가지고 지내는 날이 더 많아서 이런 시간 하나, 하나가 다 소중했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들은 개개인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멤버들 전체에 대한 질문들이 주를 이뤘다.
사인을 받을 때 다들 소소하게 물었던 것처럼, 질문을 하는 솜뭉치들은 전부 멤버들의 취향과 일상에 관해 물었다.
다행히 민감할 수 있는 질문들은 없었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물음은 스포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이야기를 언급했다.
“아쉽지만 질문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아아….”
“아쉬워요?”
“네!”
“우리도 아쉬워요. 그런데 계속 질문받으면 다음 거 진행 못 하는데? 괜찮아요?”
씩 웃으면서 솜뭉치들을 조련하는 하준 형이 내가 아는 모습 그대로여서 나도 모르게 속으로 외쳤다.
‘저건 천성이었어!’
‘뭐가?’
‘아, 아냐….’
포잉은 솜뭉치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팬사인회 직전, 포잉이 나에게 물었었다.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해도 되냐고.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되물었더니, 이렇게 사람들이 흥분하고 열광하고 소리 지르는 장면을 실제로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다고 했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테고, 더 다양한 감정들을 배우게 될 거라고. 그래서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모두 소중한 사람일 테니 자신이 관찰하는 게 기분 나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의외로 상식적인 이야기를 해서, 새삼 포잉이 요정이라는 걸 느끼기도 했었다.
잠시 포잉을 바라보던 내가 다시 솜뭉치들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눈이 마주친 솜뭉치가 나에게 손을 흔들었고, 나도 뿌듯한 마음에 작게 하트를 만들어주었다.
“형! 넷째가 혼자 솜뭉치들한테 애교 부려요!”
“그냥 내 마음을 표현한 것뿐인데?”
“그럼 공개적으로 예쁜 짓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람직한 형의 자세겠네.”
“와, 이걸 이렇게 복수한다고?”
“다음 코너로 넘어가기 아쉬우니까 우리 지환이 예쁜 짓 보고 갑시다.”
“와아!”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지고 찬이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하준 형의 얼굴에는 다정한 형님의 미소가 그린 듯 번졌다.
주말에 채팅방에서 찬이를 놀렸던 그대로 솜뭉치들 앞에서 돌려받았다.
내 목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아 슬픈 눈으로 세빈이를 바라봤지만, 세빈이조차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진짜 내가 복수하고 만다.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고개를 푹 숙인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솜뭉치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여러분, 뭐가 보고 싶어요?”
“애교요! 머리띠 쓰고!”
“맞아! 머리띠 쓰고 해줘요!”
왠지 신난 듯한 영빈 형의 목소리에 배신감을 느낄 새도 없이, 유난히 커다랗게 외치는 솜뭉치의 호응과 기쁨에 찬 솜뭉치들의 함성이 사정없이 나를 몰아붙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스태프들조차 싱글벙글 웃으며 다양한 머리띠를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어떤 게 좋아요?”
“고양이 귀요!”
“꽃 달린 거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게 낫고, 어차피 아이돌을 직업으로 삼은 이상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많을 거라고, 그렇게 내 심장을 다독이는데….
신난 찬이는 내 앞까지 달려와 머리띠를 골라주고 있었다.
아무리도 우리 찬이가 나와 함께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여러분, 이왕이면 찬이랑 같이하는 게 좋겠죠? 우리 찬이 귀여운 거 다들 아시죠?”
나에게 화관을 씌워주던 찬이는 내 외침에 그대로 굳었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고양이 귀 머리띠를 들어 힘찬이 머리에 씌워주었다.
멤버들을 슬쩍 돌아보니 다들 눈으로 외쳤다.
‘나만 아니면 돼!’
그렇게 결국 찬이는 나와 같이 무대 앞으로 나와 동요 ‘나비야’를 부르며 율동을 했고, 거기에 영빈 형과 화음을 넣고 경환 형이 즉석 랩까지 덧붙였다.
이 모든 게 영상으로 남겠지만, 포기하기로 했다.
포기하면 편하다.
“여러분, 재밌었어요?”
“네에!”
“좋아요!”
“그럼 귀여운 거 봤으니까 이제 멋있는 거 볼 차례죠?”
“와아!”
하준 형은 능숙하게 분위기를 잡고 이끌어가고 있었다.
언더 생활을 하면서 무대를 해본 경험이 이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방금까지 대화를 더 나누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표하던 솜뭉치들은 금세 하준 형의 말에 호응하며 더 크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손을 흔들어준 우리는 장막 뒤의 백스테이지로 이동했고, 테이블을 치우는 사이 우리 사진이 걸려있던 자리에 하얀 스크린이 내려오더니 영상이 재생되었다.
우리가 의상을 갈아입는 동안 이번 리얼리티 티저 영상, 뮤직비디오, 무대를 편집한 영상이 틀어질 것을 알기에 조급해하지 않고 준비할 수 있었다.
“다 됐지?”
우진 형의 물음에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어 처음 뮤직밸류에서 입었던 의상을 매만졌다.
“잘하자. 잘할 수 있잖아.”
“난 꿈에서도 연습했어.”
하준 형이 주문처럼 우리를 보며 웃었고, 그 모습에 힘찬이가 중얼거렸다.
처음 쇼케이스 무대 후 우리가 무대에서 생각보다 실수가 많았다는 걸 두 눈으로 보고, 한동안 더 많이 연습하고 더 죽어라 뛰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앞으로 더 멋진 모습만 보여주자고, 우리끼리 참 많이도 얘기했었다.
지금은 비록 100명의 솜뭉치만 불러서 보여줘야 하는 게 아쉬웠지만, 이게 끝이 아니니까 그래서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을 수 있었다.
“이번 무대도 실수 있으면 제영 쌤이랑 시영 쌤이 특훈이래.”
“와, 제발 살려주세요….”
“그리고 연대책임을 묻겠다고 하더라고.”
웃으면서 트레이너 선생님들의 말을 전하는 우진 형의 얼굴이 그렇게 사악해 보일 수가 없었다.
특훈이라니, 연대책임이라니. 이 무슨 공산주의도 아니고?
“그러니까 잘하면 돼.”
“네! 잘합시다! 이번에 틀리는 사람이 한 달 동안 설거지랑 쓰레기도 버리기!”
의욕을 서로에게 빵빵하게 불어넣은 내 얼굴과 멤버들의 얼굴에서 긴장보다 설렘이 더 많이 느껴졌다.
아주 조금이지만 이제는 다들 무대를 기대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 같아서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손을 모으고 다 같이 이번 앨범의 타이틀 곡명을 외치는 걸로 파이팅을 한 우리는 무대로 오르는 장막 뒤에 섰다.
인이어와 마이크를 다시 한번 매만지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언래블, 들어갈게요!”
우리가 무대에 오를 준비를 마치자, 무대 편집 영상이 끝나가는 시점이 되었다.
모든 불이 꺼지고 조용해진 공간에 뚜벅뚜벅 걷는 소리가 먼저 재생됐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많은 땀을 흘리며 준비한 새로운 I'm OK의 인트로와 ‘I'm OK. Are you all right?’라는 가사가 짧게 흘러나왔다.
몇 초 후 무거운 느낌의 intro ‘0’ 가 흘러나오면서 무대의 중앙에 핀 조명이 떨어지고, 가면을 쓴 하준이 무대를 지켜보는 객석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괜찮아?”
그 한마디에 솜뭉치들의 환호성이 무대를 향해 쏟아졌다.
열렬한 환호성과 함께 멤버들의 위치마다 작은 조명이 차례대로 내리꽂혔고, 그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던 멤버들은 안무를 시작했다.
잡아 뜯으려는 듯 양손으로 가면을 쥐는 힘찬이의 뒤에서 세빈이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듯 낮은 자세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경환 형은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하준 형의 손목을 잡아끌고 가려 했다.
그 반대편에서 내가 하준 형의 다른 팔을 잡아 반대쪽으로 끌고 가려 했고, 영빈 형은 우리 모두를 피해 하준 형의 맞은편에 섰다.
곧이어 천천히 얼굴로 다가간 손이 하준 형의 가면을 잡았고 그와 동시에 무겁게 사방을 조여오듯 흐르던 멜로디가 뚝 끊겼다.
그와 동시에 쿵 하는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순간 하준 형을 제외한 모두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서 힘없이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