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너나 잘해(3)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우리는 동선을 맞추고 의상을 점검하고 순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첫 곡은 역시 타이틀곡이었다.
“쇼케 때 했던 거랑 거의 비슷하니까 안무 틀리지 말고. 곡 순서는 I’m OK, 어쩌면, 점멸,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로 끝. 앵콜 곡은 졸업식으로. 다 기억했지?”
“얍. 전 다 외웠어요.”
“가사 다시 체크하고. 틀리면 진짜 가만 안 둔다.”
하준 형이 곡 순서를 짚어주고 멤버들은 각자 손에 쥔 종이를 보며 순서를 되새겼다.
그 와중에 힘찬이는 핸드폰으로 가사를 켜놓고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하준 형이 가사 틀리면 친히 조지겠다는 말하자 움찔한 걸 나는 다 봤다.
유난히 가사를 못 외우는 편이라 잘 때도 이어폰으로 노래 들으면서 자라고 수면 교육을 시켰더니 많이 나아지긴 했다.
그래도 무대에서는 가사 안 틀리던 앤데 아무래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 같았다.
힘찬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만한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마땅한 게 없어서 열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가끔 시선을 느낄 때마다 움찔하는 것이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이게 다 저를 위한 일이니 알아서 감당해야지.
영빈 형은 목을 풀면서 한쪽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카모마일 차가 신경 안정에 좋다면서 우진 형이 준비해 준 거였다.
“미니 팬 미팅도 이렇게 떨리는데 진짜 콘서트는 더하겠죠?”
“아, 빨리 우리도 콘서트 할 만큼 컸으면 좋겠다.”
세빈이는 기대되는 건지 긴장한 건지 평소보다 말이 많았고 어느샌가 레몬 맛 막대 사탕을 입에 물고 있었다.
그런 세빈이랑 경환 형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하준 형은 스태프들과 함께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포잉을 무릎 위에 얹고 멍하니 있었다.
“지환이는 왜 이렇게 멍해?”
“그냥 멍해요. 잘 모르겠는데 멍하네요.”
“애가 넋이 나갔네.”
첫 무대를 하고 미니 팬 미팅으로 가까이에서 솜뭉치들을 만났었다.
그때의 터질 것 같았던 심장의 두근거림도, 울컥하고 올라올 것 같았던 감정의 덩어리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때에도 그렇게 주체 못 하고 눈물이 날 만큼 감정이 널뛰었는데, 오늘은 괜찮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머리를 비우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스킬을 쓰면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자꾸 스킬에 의지하기보다 스스로의 의지로 이겨내고 싶었다.
다른 멤버들처럼 그렇게.
“언래블, 10분 후에 입장할게요. 준비해 주세요.”
“네!”
힘찬이가 씩씩하게 대답하면서 손을 달달 떨었다.
그렇게 우리가 첫 팬 사인회를 진행할 곳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입장했을 때, 환호성은 없었다.
다들 숨죽이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예민하진 신경 사이로 세빈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하준 형의 안녕하세요가 끝나고 우리가 구호를 외치며 고개를 숙이는 사이, 솜뭉치들도 함께 우리 구호를 외치며 소리 질렀다.
100명만 뽑았던 팬 사인회지만 소리는 작지 않았고,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여러분, 저희 보고 싶었어요?”
“네!”
“보고 싶었어! 언래블 사랑해!”
“우리가 더 보고 싶었는데!”
어떤 순서로 진행될지 사전에 안내문을 교부했기 때문에 다들 오늘 자리가 단순한 팬 사인회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 팬 사인회는 촬영을 막지 않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녹음기를 소지하고 사인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할 뿐.
기존의 팬 사인회와는 달랐지만 우리도 촬영을 막지 않았고, 더 많은 솜뭉치들끼리 지금 기분을 공유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여러분들이랑 재밌게 즐기려고 많이 준비했어요!”
“더 많이 초대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나와 힘찬이가 솜뭉치들에게 손을 흔들며 외치자 솜뭉치들도 같이 손을 흔들었고 영빈 형은 눈을 빛내며 한 명, 한 명 다 눈에 담을 것처럼 객석을 바라봤다.
“자, 그러면 언래블의 첫 팬 사인회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들과 안전요원들이 나서서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했고, 사전에 뽑은 번호대로 솜뭉치들이 나와서 줄을 섰다.
우리는 평소에 인사하던 대형대로 하준 형, 경환 형, 찬이, 세빈이, 나, 영빈 형 순서로 앉아있었다.
큰 사람들 사이에 작은 사람들을 끼워 넣어서 괜히 울컥했지만 나는 성장기라는 단어를 늘 중얼거리며 마음을 달랬다.
자꾸 손이 근질거려서, 이제 막 사인을 시작한 하준 형을 바라봤다.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다정한 눈으로 눈앞의 솜뭉치를 바라보며 이름을 묻고 있었다.
손에 쥔 편지를 내밀면서 행복한 듯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생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팬 사인회였지만 어쨌든 이번 생에는 오긴 했다.
비록 받는 쪽이 아니라 하는 쪽이 되었지만.
시간을 너무 많이 할애할 수 없었기에 몇 가지 대화가 끝나자마자 스태프들이 와서 옆으로 이동을 요청했고, 그 모습이 못내 아쉬웠다.
고개를 돌려 옆에 세빈이를 봤더니 긴장했는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솜뭉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상기된 듯 뺨이 붉어진 게 메이크업을 뚫고 나올 정도면 어지간히 기쁜듯했다.
“형, 솜뭉치들이 다 엄청 반짝반짝해요.”
“너도 지금 반짝반짝해.”
세빈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모습에 솜뭉치들이 든 카메라가 쉴 새 없이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둘만 얘기해.”
“너한텐 비밀이야. 말 안 해줄 거야.”
우리끼리 키득거리는 모습에 조금 뚱한 표정을 짓던 찬이가 툴툴거리자 솜뭉치들이 웅성거리며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는 게 귀여워서 웃었다.
“친구들끼리 온 솜뭉치들이 많은 건가?”
“글쎄요. 그냥 모르는 사이여도 이런데 오면 옆 사람이랑 친해지기도 하고 그래요.”
영빈 형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길래 대답해 주며 앞에 있는 텀블러를 들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영빈 형이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면서 커피나 물을 마시는 걸 본 우리는 우리도 영빈 형처럼 텀블러 가지고 다니자! 라고 마음을 모았고, 각자 취향껏 색을 골랐다.
그래서 우리 테이블 위에는 각자의 텀블러가 놓여 있었다.
하준 형이 블랙, 영빈 형이 실버, 경환 형이 메탈 골드 색이었고, 내가 네이비, 가위바위보에서 진 찬이랑 세빈이가 각각 코랄 핑크색, 민트색이었다.
세빈이는 민초파라 색에 만족하는 것 같았지만 핑크색을 손에 쥔 찬이 표정은 볼만했었다. 지금은 익숙해져서 잘 쓰고 있지만.
잠시 우리끼리 어수선했던 사이 세빈이 앞에 솜뭉치가 도착했고, 그 솜뭉치는 곱게 포장된 상자와 우리 앨범을 내밀었다.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네, 세빈이 생각하면서 고른 거예요.”
팬 사인회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미리 교육받았던 탓에 세빈이는 당황하지 않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선물은 나중에 열어봐도 돼요? 편지 먼저 보고 싶은데.”
“앗, 네네.”
처음 만난 솜뭉치와도 많이 내외하지 않고 잘하는 세빈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놓였다.
우리 솜뭉치들은 하나같이 어쩜 이렇게 예의 바르고 착한지.
그리고 곧바로 내 앞에 온 솜뭉치는 또 다른 쇼핑백과 두툼한 편지 뭉치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예요?”
“진아에요, 이진아.”
“이름 예쁘다. 이 편지 다 저한테 써주신 거예요?”
몇 가지 대화를 나누면서 솜뭉치도 긴장이 풀렸는지 곧잘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메시지를 써줄까 하고 묻자 오래 보자는 말을 요청하기도 했다.
최대한 글씨체에 신경 쓰면서 썼는데 어째서인지 조금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 후로는 계속해서 다양한 솜뭉치들을 만났다.
“다치지 말고 안 아팠으면 좋겠어요.”
“밥은 잘 먹고 있어요? 맛있는 거 많이 먹어요.”
“오늘 밥은 먹고 왔어요? 뭐 먹었어요?”
“밤에 잘 잤어요? 무슨 꿈 꿨어요?”
“멤버들한테 생일선물 뭐 받고 싶어요?”
“쓰는 향수 이름 알려줄 수 있어요?”
“좋아하는 꽃 있어요?”
“이번에 졸업식 만들어줘서 너무 고마워요. 잘 듣고 있어요.”
“무대 의상 너무 멋있었어요! 다음 앨범도 기대하고 있어요.”
등등…. 많아봤자 두어 개의 질문 밖에 대답해 줄 수 없었지만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 일부러 더 천천히 고민하면서 대답해 줬다.
이 모든 질문들에는 언래블에 대한, 그리고 나에 대한 애정이 넘치도록 담겨있었다.
“엇, 형 뭐야.”
잠깐 틈이 생겼을 때 멤버들을 관찰하다 보니 그 와중에도 장난을 멈추지 않는 멤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작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경환 형이 네임펜을 든 채 찬이 목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고, 솜뭉치들을 보면서 손짓과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던 찬이는 경환 형 손의 네임펜을 보자 자기 목에 콕 찍은 줄 알고 들고 있던 네임펜으로 경환 형을 때렸다.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본 솜뭉치들은 웃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하아, 내가 말을… 해서 무엇하리.’
‘저 인간들이 저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타는 내 속마음을 말할 수 있는 건 포잉 뿐이라 중간중간 포잉에게도 투덜거렸다. 포잉은 이제 멤버들에게 익숙해진 건지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윽고 세빈이가 건네준 솜뭉치의 앨범을 받아 눈앞에 솜뭉치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예요?”
“이예나요. 작은 환 실물이 훨씬 나은 거 같아요!”
“작은 환이요?”
“네! 팬들끼리 작은 환이라고 불러요. ”
“아, 경환이 형도 환이라서 내가 작은 환이구나.”
이렇게 새로운 호칭을 하나 얻었고.
“다음 앨범에는 작은 환 곡도 들어가요?”
“글쎄요. 열심히 작업하고는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손을 뻗어 손깍지를 하고 웃으며 대답해 주자 동물들이 있는 스티커와 내 사진이 프린트된 걸 내밀었다.
“언래블 닮은 거 같아서 가져왔어요.”
“고마워요, 제가 멤버들 얼굴에 꼭 붙여볼게요.”
“옆으로 가실게요~.”
“와줘서 고마워요. 우리 또 봐요.”
이동을 요청하는 스태프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아쉬워하는 솜뭉치에게 다시 보자는 말을 건네며, 스티커 묶음에서 토끼가 하트를 달고 있는 스티커 하나를 떼어냈다.
“세빈아.”
“네? 앗?”
방심하고 있는 세빈이 뺨에 토끼 스티커를 붙이자 순간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세빈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솜뭉치가 준 거야. 우리 닮았대.”
세빈이는 솜뭉치가 줬다는 말에 스티커를 떼어내지 못하고 툴툴거렸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나는 만족하며 씩 웃었다.
솜뭉치랑 대화 중이던 영빈 형의 뺨에도 양으로 보이는 동물 스티커를 툭 붙였다. 의아한 눈을 하던 영빈 형이 나와 세빈이를 번갈아가며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에게 스티커를 줬던 솜뭉치가 세빈이와 영빈 형의 얼굴을 보더니 기뻐하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이 동물들 중에 뭐가 나를 닮은 건지 훑어보던 나는 호랑이 스티커를 떼어내서 내 손등에 붙였다.
그리고 손등을 들어 솜뭉치들에게 보여주자 무어라 말하며 좋아하는 모습에 같이 웃었다.
세빈이에게 사인을 받던 솜뭉치가 내 쪽으로 이동하는 사이, 세빈이 옆구리를 쿡 찔러서 스티커를 내밀었고 내 뜻을 이해한 세빈이가 씩 웃었다.
수없이 많은 카메라 셔터음과 행복해 보이는 멤버들, 솜뭉치들의 얼굴.
많은 양의 편지와 생각지도 못한 선물들은 모두 스태프들이 챙겨서 멤버들 각자의 박스에 잘 넣어주었다.
소속사를 통해 전달받았던 것들과는 기분이 또 너무 달라서 속이 또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지환아,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잠깐 멍해져서.”
영빈 형이 내 얼굴을 살피고 스태프를 불러 물을 달라고 했고,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온전히 내 스스로 이 순간의 감정들을 감당하고 싶었다.
과거가 어땠든 간에 지금 나는 언래블의 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