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너나 잘해(2)
“시팔!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최태성은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지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박살 난 휴대폰과 사방이 깨진 유리 조각, 찢긴 종잇조각이 나풀거려 태풍이라도 맞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앞에는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가 망나니, 아니 최태성이 발광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표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게 답니다.”
제논 엔터의 대표, 최철만은 외동아들인 최태성을 아꼈지만, 이번에 그가 벌인 일은 수습하는 데 너무 많은 돈이 소모됐다.
거기다 가장 중요한 최철만의 자존심이 뭉그러졌기에 그 분노를 직격으로 맞은 비서들과 부하직원들은 숨소리조차 조심하며 지내는 상황이었다.
그에 반해 최태성은 고급 오피스텔로 얻어준 집에 있으면서도 뭐가 그리 불만인지 꼬리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었다.
돈 많은 아비 밑에서 태어나 제 편한 대로 휘젓고 다니던 최태성에게는 ‘고작’ 이런 집 안에 자신을 가둔 부모에게 화가 나는 모양이었지만.
하루 이틀 보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보고 싶은 모습도 아니었기에 자신의 상사인 최철만이 그대로 전하라고 한 말만 전하고 한발 물러나 있었다.
‘숨소리도 내지 말고 얌전히 쥐 죽은 듯이 있어라. 딴짓하다 걸리면 다리뼈를 죄 부숴서라도 방 안에 가둬두겠다.’
최철만의 전언은 이게 다였다.
연예계 활동을 아예 접으라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 데미갓은 활동을 하되, 최태성만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근신하라는 것.
어차피 얼마 지나면 풀릴 근신이었지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최태성은 말을 전하러 온 최철만의 비서, 김오식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겼고, 안경이 날아가 금이 갔다.
“대표님 말씀은 전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 거기 안 서, 이 새끼야?”
말도 전했고 상태도 봤으니 빠르게 몸을 빼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김오식은 떨어진 안경을 챙겨 오피스텔을 나섰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최태성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어차피 쫓아 나오지 못할 것을 알기에 깊이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고 문을 닫았다.
“아악!”
문 너머로 언뜻 악을 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문이 완전히 닫히자 우월한 방음 설비를 자랑하듯 아무런 소리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니 여기에 가둔 것이겠지만.
손으로 더듬어 맞았던 부위를 확인하자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했는지 열감이 느껴졌고, 입안에서는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끝나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어차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게 될 테니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김오식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 * *
“정말로 망둥이 잠수에요?”
“그렇대. 기사로는 건강상의 이유라네.”
“개뿔.”
“정신 건강이면 모를까.”
“그냥 우린 모른척하면 돼.”
시니컬하게 중얼거리는 힘찬이 모습에 그냥 같이 웃어줬다.
당사자들은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런 수법도 써먹을 수 있는 거겠지.
확실한 건 제논 엔터도, 데미갓도 최태성이라는 쓰레기가 벌인 우발적인 행동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고, 아마 한동안은 몸을 사리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
어차피 그들이 무엇을 하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던 우리는 조용히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정윤 실장님이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을 거고, 우리는 받은 돈으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즐기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기에도 하루가 짧았다.
우진 형도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아서 내용을 전달해 줬을 테고.
그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비어있는 무대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지금은 비어있는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이 자리에 우리 팬들만 모여서 우리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현실에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내일 리허설을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행사장을 보고 싶어 하는 우리 마음을 눈치챈 팀장님이 한번 둘러보고 숙소로 가서 준비하라고 해주셨다.
“아, 기분 되게 이상해.”
“진짜 콘서트 할 때는 어쩌려고 벌써 그러냐.”
“연수 선배님처럼 큰 무대에서 공연하면 진짜 짜릿하겠죠?”
“객석이랑 엄청 가까워요. 실수하면 어떡하지?”
중얼거리는 경환이 형한테 준이 형이 타박하듯 답했지만, 정작 준이 형의 눈도 반짝거리는 게 오늘 다들 쉽게 잠들지는 못할 것 같았다.
경환 형뿐만 아니라 나도, 멤버들도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스테이지 겸 사인할 공간은 지금 당장은 텅 비어 있었지만, 내일이면 거기에 테이블을 놓고 솜뭉치들과 사인을 하며 짧은 인사를 나누게 될 터였다.
그 뒤로는 1집 Question의 단체 사진이 프린트된 현수막이 크게 걸려있었다.
긴장을 풀려고 바라본 사진이었지만, 보고 있자니 기분이 또 묘했다.
“이렇게 보니까 다른 사람 같은데?”
“이게 바로 메이크업의 힘 아니겠어?”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못 알아볼 듯.”
“인간적으로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냐….”
많은 사진을 찍고 몇 번 무대에 올랐지만, 이렇게 크게 출력된 자신들의 모습은 여전히 추가 낯설었다.
A컷을 고른다고 다 같이 모니터 했지만 화면으로만 보던 것과 출력물은 확실히 그 느낌이 다르니까.
앨범 자체의 분위기가 어두운 편이었기 때문에 무대 의상도 절제된 느낌의 옷이 많았고, 좋은 비율을 살리고 싶었던 코디 누님들의 필사적인 요청으로 메인 사진은 정장이었다.
지금 우리는 추리닝을 입고 너덜너덜해진 얼굴로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저기 훤칠한 총각이 지금 내 눈앞의 푸 닮은 애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티만 입은 변태 곰이랑 닮았다고 하지 마!”
“전 세계 푸 팬들한테 사과해라, 푸가 더 귀여우니까.”
시원시원하게 생긴 만큼 입이 크고 활짝 웃으면 눈이 없어질 것처럼 환한 힘찬이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티만 입고 다니는 곰돌이를 생각나게 했다.
평소에 원색 티를 즐겨 입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에 질색하는 힘찬이보다 그 곰돌이한테 사과하라고 하는 경환 형의 모습이 더 웃겼는지 세빈이는 웃느라 바빴다.
“슬슬 돌아가야지.”
“배고파요….”
“숙소에 닭 가슴살 다 먹었어?”
“그거 말고 맛있는 거 먹고 싶은데.”
“내일 퉁퉁 붓고 싶으면 그래라.”
투덜거리는 힘찬이 어깨를 토닥거려준 우진 형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구경하던 우리를 한자리에 모아 숙소까지 데려다줬다.
우진 형은 숙소 안까지 따라오더니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정말 괜찮아진 거 맞아? 약 더 안 먹어도 되냐.”
“네. 진짜 괜찮아요. 오늘 내내 죽 먹어서 기운 없는 거 빼면.”
먹은 음식이 체한 게 아니라 감당하기 힘들 만큼 큰 부담감과 죄책감에 짓눌려 감정 과잉으로 체했던 거라 조금 털어낸 지금은 괜찮았다.
그래도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었기에 얌전히 회사에서 준비해 준 죽을 하루 종일 먹어야 했다. 덕분에 기운이 전혀 나질 않았다.
뒤돌아서면 배고픈 기분이었다.
“일요일 저녁에 회식하니까 그때 맛있는 거 많이 먹어.”
“알았어요. 형도 얼른 가서 쉬세요.”
“우진 형, 조심히 들어가세요!”
“운전 조심하세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뚱한 표정으로 빨리 가라고 형을 밀어냈더니 못 이기는 척 현관문을 나서는 형에게 멤버들도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줬다.
역시 우리 애들은 인사성도 밝지.
“진짜 이런 날이 오긴 오네.”
“밤새 사인 연습해야 할 거 같아요….”
“지환이가 제일 많이 연습해야 되는 거 아냐?”
씻고 나와서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멤버들은 뽀송뽀송한 것이 갓 태어난 병아리들 같았다.
끊임없이 내일 일에 대해 조잘대는 모습까지도.
“연습 많이 해서 괜찮대요.”
“지환이 진짜 악필이던데.”
“아, 거 너무하네!”
이미 아이돌 창조 때 내 글씨를 봤던 하준 형의 중얼거림에 그동안 지켜봐 온 멤버들은 솜뭉치들에게 코멘트를 써줄 내 글씨체를 걱정했고 나는 분노했다.
연습했다니까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포잉, 네가 봐도 내 글씨체가 그렇게 이상해?’
‘…글씨체를 연습할만한 장비가 있는지 알아봐야겠음.’
‘…내 편이 없다.’
‘널 위해서 하는 말임.’
오늘도 종일 나와 함께 다닌 포잉은 조금 피곤한 듯 느릿하게 꼬리를 움직이며 내 눈을 피했다.
“처음보다야 나아지긴 했지.”
“그쵸? 저 연습 많이 했다니까요.”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준 영빈 형을 바라보며 내가 의기양양하게 외쳤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도 동조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차라리 천천히 또박또박 적어. 기껏 코멘트 썼는데 솜뭉치들이 못 알아들으면 그게 더 손해잖아.”
“네….”
결국 나중에 더 연습하는 걸로 내 글씨체에 대한 논평이 끝나자 낄낄거리며 웃기 바빴던 힘찬이도, 경환 형도 팔다리를 쭉쭉 뻗어 몸에 긴장을 풀었다.
“내일 어그로성 질문은 무조건 대답하지 말고 그냥 웃어넘겨. 한 사람당 정해진 시간 넘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시선 처리 하나, 웃는 거 하나 가지고도 말 많을 테니까 조심하고.”
“형, 지금 한 번 더 말하면 50번쯤 되는 것 같은데요….”
“너희 보니까 불안해서 그러지.”
하준 형은 지나치게 활기찬 우리가 걱정인 건지, 아니면 어그로성 인물들 때문에 시달릴 우리 멘탈을 걱정하는 건지 계속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 정도면 거의 세뇌 수준인 것 같았다.
“우리만큼 듬직한 동생들이 어디 있어요.”
“내가 말을 말지….”
선량한 동생들의 표본이라는 듯 나와 힘찬이 세빈이가 눈을 깜박이며 순진무구한 눈으로 하준 형을 바라보았고, 그게 재밌어 보였는지 경환 형도 옆에서 따라 하고 있었다.
그런 우리 모습에 질색한 얼굴을 하던 영빈 형은 거리를 더 벌렸고, 하준 형은 해탈한 듯 중얼거렸다.
“이번 주말이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다.”
“아, 맞다. 다들 가사 잘 외웠죠?”
갑자기 생각난 팬 송을 떠올리며 멤버들의 얼굴을 살펴보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앨범에 넣자는 얘기가 나왔지만, 팬들에게 먼저 들려주고 싶었던 나는 주말에 있을 팬 사인회 때 현장에서 공개하고 싶다고 회사 측에 이미 말을 해두었다.
고심하던 팀장님은 현장에서 곡을 공개하고, 이후 오피셜 계정으로 올라갈 동영상에 일부 편집본을 넣는 것으로, 음원은 이후 발매할 앨범에 포함되는 것으로 하자고 하셨다.
그래서 이번에 공개되는 버전은 어쿠스틱 버전으로 조금 가벼운 느낌으로 부를 예정이었고, 멤버들이 부르는 모습을 지켜본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세련되게 표현하기보다는 투박하더라도 곡을 만들 때 우리가 생각했던 감정들이 더 솔직하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솜뭉치들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나도.”
조금 졸렸는지 발음이 늘어지는 세빈이가 멤버들을 바라보며 웃었고, 같은 생각을 갖고 만들었던 나도 같이 웃었다.
다행히 내일은 날씨도 좋을 예정이었고, 두 번, 세 번 점검했던 만큼 긴장됐던 마음도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
“자, 오늘은 일찍 자자. 내일은 열심히 뛰어야지.”
“다 같이 거실에서 잘까요?”
“안돼. 너무 좁아서 내일 결릴 거야.”
“이사 날짜도 정해야 하는구나.”
팬 사인회 이후에 이사 날짜를 정하자고 했던 우진 형의 말을 떠올리며 하나, 둘 멤버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자라, 사고뭉치들아.”
“전 좀 빼주세요…. 다들 잘 자요.”
다행히 꿈같은 건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