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우연이 아니야(4)
“정윤 실장님이 말 안 해주셨어? 합의금!”
“아, 그거요?”
치료비와 합의금을 칼같이 입금해왔다는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이미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돈이 들어왔다는데 당연히 기쁘지.
“걔네가 이런 데는 빠르네요.”
“그러게 말이야. 네 통장으로 보내놨으니까 누님한테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해. 너도 쇼핑도 좀 하고.”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함박웃음을 짓는 팀장님 얼굴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본인에게 돈 한 푼 떨어지지 않는 일인데 왜 이렇게 좋아하나 싶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네. 그런 의미로 오늘 가수 1실이랑 A&R 팀에 치킨 제가 쏩니다! 팀장님이 적당히 알아서 해주세요.”
“어이구, 우리 지환이가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너희도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이거지?”
“헤헤, 들켰어요?”
“그래, 먹어. 오늘 우진이한테도 말해 둘 테니까 너희끼리 얘기도 좀 하고 맛있는 거 먹어.”
시원시원하게 웃던 소현 팀장님은 내일도 병원은 꼭 들리라는 말과 함께 작업실에서 나갔다.
[여러분, 어서 나를 찬양하세요!]
우리 빈이 형 [?]
내 동생 [우리 지환이 형이 최고다!]
모지리 [뭔데? 갑자기 왜 그래 ㅋㅋㅋㅋㅋㅋ]
우리 경환이 형 [★우윳빛깔 공지환☆]
[경환이 형…. 제가 잘못했슴다.]
우리 경환이 형 [ㅋㅋㅋㅋㅋ니가 하라며]
우리 빈이 형 [지환아 너 어디야?]
우리 준이 형 [무슨 일 있어?]
[우리 오늘 저녁에 고기 파티 한번 합시다!]
[내가 허락 받았음!! 오늘은 내가 쏨!]
[일단 집에 가자!!]
급격하게 기분이 좋아진 나는 핸드폰을 켜서 회사에 말해둔 은행 앱을 켰다.
생각보다 큰 금액이어서 얼떨떨했지만 그래도 내 통장에 꽂아주신 거니까 이건 내 거란 말이지?
나한테 넘겨주신 돈이 이 정도면 총금액이 얼마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내가 다치면서 실질적으로 우리의 모든 일정에 차질이 생겼고, 일정을 변경하는 과정에 생기는 손해도 모두 손해배상에 포함해서 청구했다고 들었다.
역시 회사에서 일을 하니까 깔끔하게 떨어지는구나 싶기도 하고, 만약에 우리가 제논 엔터보다 훨씬 작은 회사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오싹해졌다.
어차피 내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은 회사에서 부담할 거라면서 제논 측에서 준 치료비와 피해 보상 금액 중 내 몫을 고스란히 계좌로 넣어주셨다.
다른 멤버들에게도 얼마간의 금액을 분배해 주신다고 하셨지만 실질적인 피해자인 나보다는 적은 금액이라고.
그러니 서로를 위해 금액은 각자만 알고 있으라는 당부도 있었다.
두 시간 정도를 더 연습하고 숙소로 복귀하려던 우리는 고기라는 말에 한 시간 정도만 각자 연습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중에 우진 형의 도움을 받아 숙소에서 고기 파티를 열 준비까지 철저하게 마친 우리는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고기~ 고기!”
“난 바짝 구운 게 좋아!”
“영빈아, 김치 좀 더 꺼내줘.”
“동치미도!”
오늘의 물주였던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집게를 들고 고기 굽기를 자처했고, 덕분에 그 외에 다른 준비는 멤버들이 도왔다.
멤버들이 잘 먹는 걸 보니 이래서 돈 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잘 먹는다, 내 새끼들.
그래, 많이 먹고 무럭무럭 크자.
“먹는 건 우린데 왜 네가 그렇게 좋아하냐.”
“쟤 맨날 저러잖아.”
“우리 솜뭉치들이 저러면 이해하겠는데 지환이는 왜….”
“님들은 몰라도 되니까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세요.”
“뭐야, 키워서 팔아먹는 거야?!”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낄낄대는 우리 멤버들의 얼굴이 정말 신나 보였다.
고기는 역시 구워 먹는 고기가 최고라면서 어제 갈비찜 먹을 때는 밥을 두 공기나 먹은 힘찬이가 중얼거렸고, 김치와 새송이버섯을 굽는 하준 형의 손놀림은 예사롭지 않았다.
저 형, 언제 우리 몰래 고깃집 알바라도 했나?
내일의 우리는 오늘의 우리를 욕할지언정, 돈이 들어왔는데 고기 한 점 먹지 못하는 것은 삶의 의미가 없다는 내 말에 모두가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으니 이것으로 되었다.
물론 포잉은 언제나처럼 한심하다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지만, 아무렴 어때.
같이 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포잉에게 물어보니 현실 세계의 음식은 요정인 자신이 먹을 수 없다고 했었다.
츄르라도 사다 주고 싶었건만 어쩔 수 없지.
거실 창문을 활짝 열고 신나는 고기 파티를 끝마친 우리는 부른 배를 통통 두들겨가며 각자 편한 자세로 거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뒷정리는 오늘도 가위바위보였고, 찬이랑 경환이 형이 정리 담당, 세빈이랑 하준이 형이 쓰레기 담당이었다.
“아, 팀장님이 보내준 첫 촬영 컨셉 확인한 사람?”
“그거 제목이 뭐였죠?”
“언래블 스토리. 프로그램 이름 짓기 싫으셨나 봐.”
“약간 그런 느낌?”
우리는 한결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곧 첫 촬영에 들어가야 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내용을 확인했다.
방송국이랑 대판 싸우고 자체 제작이라는 초강수를 둔 회사의 결심에 박수를 보냈지만, 사실 비용적인 부분에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비용 아낀다고 어설프게 만들면 안 하느니만 못할 텐데.
회사에서 다 생각이 있겠지?
“첫 번째 촬영은 우리끼리 밥하는 거래.”
“이거 재밌겠다. 그럼 우리끼리만 하는 거예요?”
“응. 아, 맞다. 우리 홍보 영상 대신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던 거, 그 첫 화 초반 영상 넣을 거를 홍보에 쓰신대.”
“아, 그래서 오늘 영상 안 찍었구나.”
“너 다 나을 때까지 미루려다가, 그러기엔 시간 너무 잡아먹는다고….”
냥톡을 통해 전달받은 파일에는 콘티와 함께 어떤 스토리로 이어질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적혀있었다.
첫날은 프로그램 촬영 기념으로 우리끼리 음식을 만들어서 맛있게 먹는 그런 내용이었다.
“근데 지환이 말고 밥할 수 있는 사람?”
“영빈이 할 수 있고 난 잘 못하고….”
“난 힘쓰는 거 시켜주면 안 될까?”
“저 할 수 있어요.”
대충 먹을만한 걸 뭐라도 만들 수 있는 건 나랑 영빈이 형, 세빈이 정도였다.
절반이 밥을 할 수 있으니 뭐 이 정도면 매우 준수하지.
사실 세빈이나 하준 형은 계란 프라이나 라면 정도였지만, 경환 형이나 찬이에 비하면 매우 준수한 수준이었다.
따로 대본 없이 처음 인사 멘트만 적혀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대본 없이 그냥 즉흥적으로 하라는 건데 우리 괜찮겠지…?
어차피 아창 때처럼 편집 왕창 들어갈 테니까, 뭐.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은 적당히 하고 넘어가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슬슬 졸려오는지 눈을 끔벅이는 세빈이를 툭툭 건드려 깨운 나는 이미 졸고 있는 힘찬이를 발로 밀었다.
“잘 거면 들어가서 자. 여기서 자면 누가 옮기냐!”
“우리가 옮기겠지.”
모처럼의 휴일이 익숙지 않았던 우리는 쉬는 날 없이 일주일 내내 회사 연습실에서 살았던 날보다 오늘이 더 피곤했다.
졸고 있던 찬이랑 세빈이를 방으로 보내고 나니 영빈 형도 피곤하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와 하준 형과 경환 형만 거실에 남아 벽에 기대서 축 늘어져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타이틀은 어떻게 한대요?”
“가영 형이 해보고 싶다고 했다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원래 에단 선생님이 하신다고 했는데…. 우리 분위기랑 안 맞을 거 같다고 고민된다고 하셨대.”
너무 마이너한 방향으로 가는 건가 하는 고민도 들었지만 성장통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 컸다.
자기만의 확고한 장점이 있는 그룹들이 비교적 오래 살아남는 걸 봐오기도 했고, 내 개인적인 욕심이 들어가 있기도 했다.
언래블만의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심.
“처음에는 환이 네가 컨셉에 대해 의견 낼 때는 걱정이 더 많이 됐었는데, 지금은 그때 네가 그렇게 말해서 다행인 것 같아.”
“네?”
이 형 졸린 거 아냐? 아니면 우리 모르게 술 마셨나?
평소보다 풀어진 얼굴을 한 경환 형의 말들이 너무 간질거렸다.
“솔직히 자신 없었거든. 힙합만 해오던 내가 아이돌, 그것도 그룹에 맞는 곡을 쓸 수 있을까 하고.”
“아, 나도 그 생각 했었지.”
“그쵸? 내 곡을 쓸 때는 내가 부를 거니까. 근데 우리 팀이 부를 거 생각하니까 부담감이 어우….”
곡 쓰는 사람들만 남겨져서 그런지 갑자기 자기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아직 햇병아리인 내가 끼기엔 조심스럽기도 하고 무겁기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내가 멤버들에게 곡 쓰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서 심장이 조금, 그러니까 아주 조금 두근거렸다.
“환이 너는 어땠어?”
“작업할 때요?”
“응. 혼자 독학으로 공부해서 이제는 저작료 받는 작곡가님이잖아.”
장난스럽게 웃는 하준 형의 말에 새삼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졸업식.
이 곡은 아마 평생 나에게 뿌듯함과 죄책감을 함께 선사할 곡이 될 것 같았다.
“다른 분들이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어림없었을걸요. 오늘만 해도 컴퓨터 앞에 진짜 멍하니 앉아있었어요.”
“나도 그래. 10시간 작업실에 있어도 실제로 곡 쓰는 건 3시간이나 되려나?”
“그 3시간을 위해서 7시간을 쓰는 거죠, 뭐.”
이 순간 나는 언래블의 멤버, 형들의 동생이 아니라 온전하게 곡을 만드는 동료로 존중받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시원한 맥주 한 캔이 간절해졌다.
“난 이번에 좀 무겁게 쓰고 싶어서 고민 중이야. 예전에 썼던 사운드 들어보는 데 왜 이렇게 낯 뜨겁냐.”
“전 당장 이번에 썼던 점멸 듣는데 너무 부족해서 한숨 나오던데요.”
“형들도 그래요? 전 제가 아직 부족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랑 똑같은 고민을 그들도 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의 위안이 되기도 했다.
“대부분 그럴걸? 사운드나 멜로디 만들었던 거 나중에 듣잖아? 100개 만들었으면 그중에 97개는 갈아엎고 싶어져.”
“인정. 전에 가영이 형한테 물어보니까 형도 그렇다더라.”
“아, 맞다. 형들은 스피커 뭐 써요?”
예전에는 이어폰도 그냥 핸드폰 살 때 들어있던 번들 이어폰을 썼었다.
그나마 누나가 생일선물이라고 shure 이어폰을 사줘서 이어폰에 따라 들리는 소리가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구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이번에 수중에 돈이 생기니 이어폰과 스피커에 욕심이 생겼다.
내 전용 작업실까지는 안돼도, 회사에 얘기해서 내가 쓰는 작업실에 스피커 사서 달아두는 것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오, 지환이 이제 막 기기에 욕심도 생겨?”
“아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그 맘 내가 알지. 크, 처음에는 비싼 게 다 좋은 건가 보다 했다니까.”
두 형님들은 건수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또 신나게 나를 놀려댔다.
“아니! 좀! 저렴한 거라도 사서 제 작업실 꾸며보고 싶어서 그러죠!”
“그래그래, 그 맘 다 안다.”
“장비 보면 막 사고 싶고 조금만 더 주면 더 좋은 거 사는데 이 생각 들지.”
“아오, 내 말 안 듣고 있죠? 둘 다?”
머리를 쥐어뜯는 내 몸부림도 신난 두 형님들 귀에는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내가 말을 말지!”
“삐졌냐. 기특해서 그러지, 인마.”
“맞아. 그렇게 공부 좀 하라고 닦달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형들이 이럴 거 같아서 내가 형들한테 말 안 한 거야.”
“내가 산 건 아닌데 작업실에 있는 게 KRK VXT 6이더라. 처음에 들어올 때, 나랑 경환이 둘 다 작업실 맞춰주신다고 해서 온 것도 있으니까.”
실컷 놀릴 만큼 놀리고 나니 장비 얘기를 주섬주섬 꺼내준다.
이렇게 다시 장비 얘기를 시작하니 아는 게 없는 나는 또 집중해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한테 말씀드리면 제 작업실을 가질 수 있을까요?”
“실장님이나 대표님 선에서 컨펌 나야 가능할 거라 팀장님한테 물어라도 봐.”
“정 안되면 좀 저렴한 거라도 제가 장비 사서 채워서 쓰고 싶은데….”
음악적으로 욕심을 내기 시작하는 내가 둘의 눈에는 제법 기특해 보였나 보다.
웬일로 둘 다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스럽게 왜 그렇게 봐요. 에이, 잠이나 자요.”
“우리 애가 이렇게 컸네. 코찔찔이 주제에 고집만 드럽게 쎘던 놈이.”
“제가 언제 코찔찔이였어요!”
“사람 됐지, 암.”
이전 지환이가 싸질러놓은 것들을 몽땅 뒤집어써야 하는 나는 속이 터졌지만, 어디다 하소연할 곳도 없어서 심히 우울해지는 밤이었다.
이게 다 내 업보다, 업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