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우연이 아니야(2)
학교 끝난 후, 우진 형이 경환 형을 회사에 내려주고 나와 찬이, 세빈이를 바로 사전 미팅 장소로 데리고 갔다.
그냥 앉아서 토크 하는 프로그램도 부담이 되는 마당에, 미궁 탈출은 말 그대로 온갖 방해 공작을 피해서 촬영 세트를 탈출하는 프로였다.
그래서 나 대신 다른 멤버가 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우진 형에게 물었더니, 소현 팀장님이 얘기를 잘해놨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걱정하는 나를 다독였다.
그 후 만난 미궁 탈출 팀 스태프분들은 어디서 어떤 소문을 듣고 오신 건지 우리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데미갓은 이제 정말 발 디딜 곳 없겠네.’
‘진짜 소문 빠르다….’
금요일에 있었던 일인데 소문낸 사람은 없고 소문만 남았다.
포잉과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긴장을 풀고 있었던 나는 이쪽 사람들과 만날 때는 꼭 입을 조심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다행히 미궁 탈출 팀과의 사전 미팅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잘 마무리되었고, 이주 후 촬영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회사로 복귀할 수 있었다.
“휴, 나 진짜 우리 나오지 말라고 할까 봐 엄청 긴장했어.”
“그렇게 됐으면 내가 진짜 그 망둥이 가만 안 뒀어.”
돌아가는 차 안에서 쿵쾅거리던 심장을 진정시키며 찬이한테 기대 축 늘어지자, 웬일로 찬이가 얌전히 내 편을 들며 어깨로 내 머리를 잘 받쳐줬다.
하준 형이랑 영빈 형이 서로 조심하자고 했던 일을 기억하고 미안해하는 걸까?
때때로 멤버들의 속마음이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스킬을 쓰면 속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적어도 멤버들에게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 스킬을 쓰고 싶지 않아서 꾹 참는 중이었다.
왠지 멤버들을 배신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둘 작정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포잉은 물러터졌다고 혀를 찼지만… 그래도 이런 선을 스스로 만들어 지키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너무 쉽게 여기게 될 것 같아서 꺼려졌다.
조금이라도 나와 우리 멤버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가고 싶어서 방송국 관계자들이나 회사 사람들에게는 스킬을 사용했지만, 그마저도 가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전 생에서 봤었던 프로그램 내용만으로 힘찬이를 멋대로 판단했던 끔찍한 순간이 아직 생생했다.
그때 내가 느꼈던 죄책감은… 아마 앞으로도 영영 잊지 못할 부채감이 되었다.
“왜? 내가 너무 잘생겼어?”
“그 입 다물라.”
“그 말만 안 했어도 참 좋았을 거예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에 찬이가 씩 웃으며 물었다. 대답을 들은 후에도 차마 환자인 나는 건드리기 미안했는지 애꿎은 세빈이에게 장난을 쳤다.
얘는 입을 다물면 참 호쾌한 미남상인데, 입만 열면 그냥 비글이 된단 말이지.
회사 근처 병원에서 내가 물리치료 받는 동안, 찬이랑 세빈이를 회사에 데려다주고 병원으로 다시 돌아온 우진 형이 다음 앨범에 대한 회의가 있을 거라고 전해줬다.
“대표님이나 실장님은 이번엔 환이 네 곡도 기대하시는 것 같더라.”
“윽… 부담스러운데요….”
스스로가 표절 가수가 되어버린 현실에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지금의 졸업식이 에단의 지도하에 원 졸업식과 매우 다른 곡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원래는 에단의 곡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의도하지 않았다고 한들 내 필요에 의해 타인의 몫을 빼앗은 죄책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 번은 이 일로 포잉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작곡을 배우고 있으니, 나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앞으로 인기몰이할 곡들을 베껴 올 수도 있었다.
완벽한 카피는 불가능하더라도 멜로디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하면 언래블이 정상에 서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유명 곡들이 유행하던 시기에 알맞은 수정곡을 발표해 변수를 줄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뿐만 아니라 언래블이 표절 가수가 되는 것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포잉에게 하소연했다.
그래, 어쩌면 그건 투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원해서 스스로 죄를 짓는 건 온전히 내가 감당할 몫이지만, 그 욕심으로 내 별의 빛까지 바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포잉은 배부른 소리 한다며 부루퉁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은 너무 요령 피우지 않는 사람이 좋다며 은근슬쩍 꼬리로 내 손등을 스치듯 토닥여 주었다.
우리 요정님은 너무 감정 표현에 서투르다.
언제쯤 솔직해지려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 죽어라 연습하고 노력하는 것밖에는 사실 답이 없었다.
재능이라고는 바닥을 기었던 나다. 이제는 나를 갈아 넣는 만큼 시스템이 능력치를 추가로 넣어주니,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우진 형의 말에서 시작된 고민이 온갖 방향으로 무럭무럭 자라느라 정신을 놓고 있는 와중에, 영빈 형이 다가와서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컨디션 안 좋아? 왜 이렇게 넋이 나갔어.”
“아, 아니에요. 뭐 좀 생각하느라….”
“아프면 참지 말고 바로 말해. 알았지?
“넵.”
긴 다리를 휘적이며 다가온 하준 형의 얼굴이 그사이 퀭해져 있었다.
분명히 아침에는 비교적 멀쩡한 얼굴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병원에서는 뭐라고 해?”
“물리치료 잘 받으라고 하죠, 뭐. 통증은 많이 줄었어요. 근데 형, 무슨 일 있어요? 왜 얼굴이 이렇게 갔어요. 내가 아니라 형이 병원에 갔어야 했을 거 같은데?”
내 발언에 자기 얼굴을 만져보던 하준은 한숨을 푹 내쉬며 회의실 테이블에 엎드렸다.
“곡 작업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되니까 스트레스가….”
“아….”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다른 말 없이 그냥 등을 토닥여주었다.
우리의 궁상맞은 모습에 영빈 형만 한숨을 내쉴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나머지 멤버들과 앨범 제작에 연관된 회사 분들도 하나, 둘 회의실에 도착했다.
회의의 주요 주제는 두 번째 앨범의 방향성이었다.
언래블이라는 그룹이 앞으로 가져갈 음악의 방향을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 ‘성장’에 맞춰서 진행하자고 첫 회의 때 정하긴 했지만, 세부 내용은 매번 달라지니 늘 처음처럼 어려웠다.
“전 분노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요.”
“첫 번째 주제가 무거웠으니 이번에는 조금 밝은 쪽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준 형이 첫 앨범은 두려움이었으니 그 후엔 그런 현실에 분노하고 덤벼드는 모습이 이야기의 흐름에 자연스럽지 않겠냐는 의견을 제시했고, 멤버들도 그 의견에 마음이 기우는 표정이었다.
다만, 회사에서는 연달아 무거운 주제로 앨범을 내는 건 우려스럽다는 입장이었다.
여름에는 주로 청량한 느낌을 주는 밝은 곡이나 신나는 댄스곡을 발표하는 게 보편적인 흐름이었다.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회의 분위기가 익숙해진 덕분에 멤버들도 의견을 말하는 걸 어색해하거나 어려워하지 않았다.
멤버들은 각자의 생각을 메모해두었다가 발언권을 청해 말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메모해두기도 했다.
잠깐 새에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갔고, 그 모든 내용을 듣고 있던, A&R 팀과 프로듀싱 팀을 총괄하는 김건욱 실장님이 입을 열었다.
“더블 타이틀로 가는 건 어때?”
“이번에도 정규 앨범으로 만들 생각이세요?”
“미니 앨범으로 해도 될 것 같은데. 꼭 분노의 표출이 어두울 필요는 없잖아?”
실장님의 발언에 회의는 또 다른 가능성의 방향을 보았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준 형은 무언가 영감이라도 떠올랐는지 급하게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실장님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큰 교훈을 얻었다.
그때,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저희 히든 트랙 넣는 건 어때요?
“말을 꺼낸 걸 보니 생각해둔 곡이라도 있나 봐?”
이제는 서로 장난도 주고받을 만큼 친해진 안시영 대리님이 은근슬쩍 떠보려는 듯 쿡 찔러서 급하게 철벽을 쳤다.
“에이, 제 실력으로 무슨…. 실장님이 더블 타이틀 얘기하시니까 거기에 히든 트랙까지 있으면 재밌을 것 같아서 그러죠.”
이게 무슨 창과 방패의 싸움도 아니고. 에휴….
그 후로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고, 결국 하준 형의 아이디어대로 이번 앨범은 주제는 분노로 정해졌다.
그 외에도 어떤 작곡가분들의 곡을 수배해볼지, 전반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엮을지 등 다양한 이야기로 한참 동안 회의가 이어졌다.
“고생하셨습니다!”
“너희도 고생했다. 또 보자.”
“하하… 네엡.”
겨우 긴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남은 멤버들은 뻐근해진 몸을 풀면서 식당으로 향했다.
앨범 사이에 텀을 많이 두지 않는 게 걱정스럽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신인일 때는 최대한 자주 얼굴을 비춰야 한다며 그래야 신인상을 노려보지 않겠냐는 말도 있었다.
“오늘은 김치찌개 먹어야지.”
“난 제육.”
“계란찜 먹고 싶다….”
다른 프로그램의 촬영은 준비해야 했지만, 앨범 활동을 할 때보다는 먹는 것에 있어 꽤 많은 자유가 생긴 우리는 밥 다운 밥을 먹는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얘들아, 밥 먹고 GIVE 앱 켜야 하는 거 까먹지 마.”
“에이, 그건 안 잊어버리죠.”
“나중에 우리도 먹방 해봐요!”
“우리 먹는 거 보면 솜뭉치들이 놀라지 않을까?”
평소 먹는 모습은… 진짜 어지간하면 솜뭉치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나는 같은 남자여서인지 언래블에 대한 환상은 음악이나 무대에 관련된 것들 뿐이었어서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전쟁 같은 식사를 이해했다.
하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소중한 솜뭉치들에게 이런 멤버들의 못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먹방은 아주 나중에나 생각해보자. 지금 내 눈앞에는 언래블이 아니라 식탐에 허우적대는 불쌍한 중생이 3명 앉아있는 거 같으니까.”
다행히 우리 중에 가장 이성적인 하준 형이 힘찬의 꿈을 현실적인 이유와 함께 꾸욱 눌러주었다.
나중에는 단체 방송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라이브 방송도 하고 할 텐데 꼭 우진 형에게 힘찬이 혼자 먹방 못 하게 해달라고 말해놔야겠다.
회사에서는 스타일리스트, 헤어, 메이크업 아티스트 선생님들을 하나로 묶어 서포트 팀으로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서포트 팀분들에게 잡혀 아이돌 언래블의 모습으로 변신을 하고 있었다.
“그, 제가 그냥 거울 봤을 때는 잘 모르겠는데 차이가 많이 나요?”
먼저 단장을 끝낸 나는 우진 형을 통해 오늘 방송에서 솜뭉치들에게 전해야 할 이야기의 대본을 전달받아 확인하고 있었고, 막 단장을 시작한 찬이가 질문을 던졌다.
“우리 지금 몰골로 그냥 카메라 앞에 서면, 솜뭉치들이 우리 단체로 아프냐고 물어볼 거 같은데?”
눈 밑에 까맣게 내려온 다크서클을 감추고 있던 영빈 형이 힘찬이의 질문에 대신 대답해 주었다.
분명히 잘 먹고 주말에 잘 쉬고 왔는데 오늘따라 멤버들의 얼굴색이 영 좋지 못했다.
오죽하면 메이크업 선생님이 평소에는 잘 쉬지 않는 한숨까지 쉬며 퍼프를 두드리고 있었다.
“주말에 잘 쉬었다고 들었는데 오늘 너희 얼굴이 왜 이래.”
“놀다가 와서 그런가 봐요…. 그냥 계속 일할 때는 몰랐는데 이틀 쉬었더니 오늘따라 집중이 잘 안 되더라고요.”
휴일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는 굉장히 서글픈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세빈이 모습에 왠지 다들 더 짠하다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우리는 불쌍하지 않다는 걸 주장하고 싶었던 나는 당당하게 외쳤다.
“동정할 거면 돈으로 주세요!”
“옜다.”
다만 내가 던진 시대의 명언은 경환 형이 내민 백 원짜리 동전에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내 동정이 이렇게 백 원에 팔렸다. 젠장.